받아온글

학역지탐방-한겨례신문

백합사랑 2007. 8. 21. 16:16
8·15 예언하고 춤추다 6·25 내다보고 피눈물
주역 대가 야산 발자취 탐방
47년 홍역학회 창립, 회원 무려 1만2천명
조연현 기자
동양에서 ‘만학의 제왕’으로 꼽히는 주역을 배우는 동호인 100여명이 18~19일 ‘주역의 길 스승의 길’을 따라나섰다. 대표적인 주역 공부 모임인 동방문화진흥회 회원들이 자신들의 스승인 대산 김석진 선생(79)이 주역을 배웠던 곳들을 순례한 것이다. 대산은 주역에 통달해 이주역으로 불렸던 야산 이달(1889~1958)의 제자로, 야산이 세운 홍역학을 계승하기 위해 20년 전 동방문화진흥회를 창립해 주역을 전해왔다. 홍역학은 태극사상으로 모든 것을 하나로 모으자는 취지다. 대산은 19살 때 야산을 찾아간 뒤 줄곧 야산을 따라다니면서 주역을 배웠기에 그가 머물던 터는 곧 야산의 숨결이 배어있는 유적지다.

▶천하면 귀해지고 귀하면 천해지는 이치

서울, 대전, 대구, 제주 등 각지에서 온 회원들이 모인 곳은 충남 논산시 벌곡면 대둔산. 해방 뒤 야산이 머물며 주역을 세상에 전하기 시작한 석천암을 순례하기 위해서였다. 대산이 처음 야산을 만나 주역의 길로 들어선 것도 바로 석천암이다.

소학교 6년 과정을 마치고 사서삼경을 공부하던 대산은 친구들처럼 신학문을 계속 공부하고 싶어 그 뜻을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그러자 곧은 한학자였던 할아버지 청하 선생은 ‘인기아취(人棄我取·다른 사람이 버린 것을 나는 취함)하라’고 했다. ‘천즉귀(賤卽貴·천하면 귀해지고), 귀즉천(貴卽賤·귀하면 천해지는 것)이니, 지금은 한문이 천하지만 반드시 귀해질 때가 있을 터이니, 오로지 한문공부에 힘쓰라’는 것이었다.

▶쌀 서말 짊어지고 스승 만나러 험로 올라 

그래서 1946년 겨울 쌀 서말을 등에 지고 석천암으로 향했다. 찌는 더위에 대둔산의 좁은 고갯길을 오르니, 쌀 서말을 감당키 어려운 약골임에도 오직 스승을 만나기를 발원하며 험로를 올랐을 대산의 간절한 마음이 절절히 느껴진다.

한 시간 가량을 올라 석천암에 다다르니 하늘을 가리는 암벽 구멍에서 솟아나는 바람과 생명수가 땀에 젖은 몸을 �어준다. 암자는 불사한 흔적이 없어 야산이 머물던 60여년 전이나 별다름이 없어 보인다. 청년 대산이 올라오니 열대여섯 명의 문도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리고, 그 가운데 눈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야산이 앉아 있었다. 그로부터 대산의 60년 주역 인생이 시작되었다.

▶일제 때 회유와 협박 물리치고 민족 해방 기원

대산의 스승 야산은 시대를 예지하는 이인이었다. 암울한 일제 때 일인들의 회유와 협박을 물리치고 민족 해방을 기원하다 8·15 광복을 예언하면서 제자들 앞에서 춤을 추면서도, 다시 6·25의 비극을 내다보며 비통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야산은 거부하기 어려운 시대의 큰 흐름 속에서도 변화의 학문인 주역의 이치를 통해 진리를 깨우치고 시대의 어둠을 밝히도록 이끌고자했다. 그는 석천암에서 통강(전문을 모두 외움) 제자 108명을 길러내고, 47년 홍역학회를 창립했다. 당시 회원이 무려 1만2천명에 이르렀다.

순례단은 석천암을 떠나 논산 개태사로 향한다.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이 후백제를 물리친 뜰에 세워진 개태사엔 땅에 묻혀졌던 돌미륵이 발굴돼 모셔져 있고, 창훈각엔 불상과 단군 영정이 나란히 앉아있다. 야산은 108 제자와 함께 이곳을 찾아 후천 세계를 열 신명행사를 가졌다.

▶음률 넣은 한문 독송이 산하에 낭랑히

이어 대산의 고향 함적골과 대산이 서당을 열어 후학을 가르쳤던 모름티를 거쳐 부여의 야산 묘소에 이른다. 묘소 입구의 비문 가운데 ‘우리에게 생명의 변화를 깨우쳐주신 야산 선생’이란 대목이 유난히 눈에 띈다. 스승을 다시 뵌 듯 깊게 고개를 숙이는 대산의 뒤로 스승이 깨우친 진리를 깨닫고 싶은 회원들이 간절한 바람을 모아 홍역학 발문을 읽는다. 음률을 넣은 한문 독송이 산하를 울려 퍼진다. 그 일부의 뜻을 풀자면 이렇다.

‘천지는 서로 통하고 막히며, 만나고 또 순환하여 되돌아오는 이치로 이루어지고, 사람은 서로 만나 사랑하고 이를 변치 않는 도리로 지켜나가면서 얻고 잃음의 작용이 이루어지느니라. …배움에 뜻이 있는 자들이 이를 높이 들어 올린다면 이 바른 법도를 다시 세우는 데에 어찌 어려움이 있으리오?’

▶비를 세우면서 산이 다시 이어졌으니 우연인가 기연인가

야산의 자택이 있던 인근에서 하룻밤을 묵은 순례객들은 일어나자마자 지역민들이 세운 야산선사 사적비를 참배했다. 사적지는 일제가 용의 꼬리의 혈맥을 끊고 신궁을 지으려던 곳에 있다. 주역의 원리를 통해 후천 세계는 동북간방인 이 땅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보았던 야산의 비를 세우면서 산의 맥을 끊은 도로 위에 흙을 덮어 다시 산이 연결됐으니 우연인가 기연인가.

순례단은 야산이 유(교)·불(교)·선(도) 3도를 회통시키려는 염원으로 후학을 양성했던 충남 부여군 운산면 옥교리 옥가실 마을에 들렀다. 야산은 이곳에 단황척강비를 세웠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조상을 폄하해 ‘단군’이라고 칭하는 것을 거부하고 ‘단황’으로 일컬었다. 일제 식민과 한국전쟁 등 우리 민족 최대의 시련기 속에서 초근목피로 연명하면서도 진리로 민족과 세상을 건지려는 원대한 꿈을 잃지 않은 스승의 서원에 순례객들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한국전쟁 예견하고 300호 이끌고 안면도로

순례의 대미는 태안군 안면도. 안면도는 6·25를 예견한 야산이 300호를 이끌고 난리를 피했던 곳이다. 전쟁 3년 전 이미 이를 예견한 야산은 “내가 지위도 권력도 능력도 없으면서 어찌 큰 송사인 전쟁을 좌지우지할 수 있으랴! 그러므로 다만 300호쯤 이끌고 숨어보자는 것이니 따라갈 사람은 서둘러 가도록 해라”고 했다. 그 때 그를 따라나선 가구가 정확히 300호였다고 한다.

야산은 안면도에 도착하자마자 제자들을 이끌고 삼봉용굴로 가 제사를 지냈다. 삼봉해수욕장 옆 모래 위 바위섬엔 정말 용이 살았을 법한 용굴이 있고, 용이 승천하며 갈긴 똥이라는 전설이 있는 자국까지도 선명하다. 용굴에선 야산으로부터 주역을 배운 뒤 이곳 안면도에서 살아온 양덕근 할아버지(79)가 눈빛이 형용했던 야산의 모습을 전해주었다.

▶닫힌 진리의 문 열고, 닫힌 세상과 희망 열기 위한 것

대산은 이곳에서 해신제를 올리면서 순례자들의 호와 이름을 적어 연결한 긴 한지를 태워 올린다. 불붙은 한지가 마치 비상하는 용꼬리처럼 요동친다. 대산은 후학들을 향한 야산의 절절한 당부를 전한다.

“내가 홍역학을 창립할 때 모든 것을 한데 모아놓고 자물쇠를 잠갔다. 내가 두려워할만한 사람이 나와 열쇠를 따고 들어와야 한다. 이제 그 자물쇠를 열자가 누구냐?”

대산은 우리가 주역을 배우는 것도 닫힌 진리의 문을 열고, 닫힌 세상과 희망을 열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대산의 쩌렁쩌렁한 목소리 뒤로 끝없는 창해가 이미 열려 있다.

글 조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사진 영상미디어팀 이규호 피디 recrom295@news.hani.co.kr

기사등록 : 2007-08-21 오후 02:3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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