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

조광조님의 심곡서원과 그분의 묘

백합사랑 2008. 12. 31. 12:16

 

 

 

조광조선생님의 영정

조광조라는 이름이 나오면 언제나 마음이  짠~ 하고 아프다  영원히 빛나소서 ~~~

 

 심곡서원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7호

소재지 : 경기도 용인시 상현동 203-2

이 곳은 중종 때의 문신인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1482~1519)를 기리기  위하여 효종 원년(1650)에 건립된 서원으로 그해에 바로 사액을 받았다.  현종 14년(1673)에 강당이 중건 되었다. 고종 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았던 전국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조광조는 연산군 때의 폭정을 개혁하기 위하여 중종에 의하여 등용된 인물로 ,향약 보급운동,  반정공신위훈(反正功臣僞勳) 삭제, 현량과(賢良科) 실시 등 각종 개혁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개혁의 내용이 지나치게 급진적이어서 훈구대신들이었떤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의 정치적 반격이라 할 수 있는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났다. 이 사화로 조광조는 전라도 능주로 유배가서 그곳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선조때 영의정으로 높임을 받고 문정공(文正公)이란  시호를 받았다. 심곡서원은 사당과 강당만으로 이루어진 조선 후기의 소규모 서원이지만 건물은 상당히 짜임새 있다.

 

 

 이곳이 강학을 하던 곳으로 원내의 여러행사및 유림의 회합과 학문을 강론하며 서예교실로 사용되고 있으며 , 현판 11기가 걸려 있음

 

山仰齋

연지위에 별당인 산앙재와 임심각 문향각을 건립했다고 전해지나 언제 훼손되었는지는 상고할 수 없고 산앙재 현판만 전해지고 있음

심곡서원 강당기

강당기는 정암선생의 학문과 도덕적 높으신 뜻을 우암 송시열 선생의 친필로 1673년(현종 4)에 기록한 것임

 

숙종대왕 어제

숙종 임금께서 정암집을 읽으시고 감화받아 읊은 시를 민진원(민진원)선생이 1730년(영조 6)에 씀

오른쪽 글은

정암 선생의 유묵

정암선생의 친필로 안처순이 부모님의 봉양을 위하여 남행(남행)할때 보낸 시(시)5수(수)임

 

정암집

정암선생의 시문집 본집 5권, 부록, 속집 4권, 합 10권, 5책으로 이루어진 목판본임.

 

 

 장서각엔 정암집 외 67종 486책과 목판본 13종이 보관되어 오던중 두차례의 도난으로 인하여 모두 분실하였고, 현재는 서예교실로 사용되고 있음

느티나무 보호수 25호

1982년 10월 15일에 경기도 보호수로 지정된 이 느티나ㅜ는 나이가 500년이 되고, 논ㄴㅍ이는 17m

둘레가 40m로 연못 위에 있음

그 옆에 있는 연못은

정암 선생님이 손수 은행나무와 괴목 각 한 그루씩 심으시고 연못과 池塘을 만드셨으나,관리 소홀로 매폐(埋廢)된 것을 1994년에 원장이하 장의의 주관으로 복원하였음

 

정암선생의 신도비

이 신도비는 노수신이 비문을 짓고 이산해가 글씨를 썼으며, 김응남이 전액을 하여 1585년 (선조 18)에 건립함

 

 

 심곡서원에서 내려다 보이는 곳으로  주변엔 지금 아파트들이 많이 들어서고 있음

 

 

 

 

 정암조광조선생님 묘

1972년 5월 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호로 경기도 지사가 지정함

소재지 : 용인시 상현동 산 55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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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 묘 및 신도비

경기도 기념물 제 169호     (경기도 용인시 상현동 산 55-1)

조선 중기 사림의 중심 인물로 정치개혁을 주도한 조광조(靜庵 趙光祖, 1482~1519)의 묘이다. 조광조는 성리학 연구에 힘써 김종직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의 영수로 인정받고 있다 . 조광조는 중종5년(1510) 생원. 진사시 합격,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 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이후 훈구파의 권력독점으로 사회적 모순이 심화되고 있어 정치적 개혁이 요구되고 있던 상황에서 중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은 조광조는 왕도정치의 실현을 역설하면서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의 개혁정치는 고려 시대부터 내려오는 조선 시대의 풍습과 사상을 유교식으로 바꾸어 놓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훈구파의 강력한 반발로 새로운 정치질서를 이루려던 계획은 실패하고 탄핵을 받아 유배되었다가 죽임을 당했다.

그 뒤 선조 초에 신원되어 영의정에 추증 되고 문묘에 제향 되었다.   선조 38년(1605)에는 그의 묘소 아래에 있는 심곡서원(深谷書院)에 봉안되었다.   이이는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등과 함께 그를 동방사현(東方四賢)이라 불렀다.   조광조의 묘역은 선조 때 만들어져 현재까지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봉분은 부인 이씨와의 합장묘이며 묘비와 영혼이 나와 제사를 받는 혼유석과 상석이 각 1기씩 있고  문인석과 망주석이 각 2기씩 갖추어져 있다.   묘역의 아래에는  이산해가 글을 쓴 선조 18년(1585)에 세워진 신도비가 있다.

 

 

靜庵 趙光祖  辭世之絶句를 옮기면

 

임금님 섬겨 사랑하기를

어버이 섬겨 사랑하듯  하였노라

백성걱정 돌보기를

식구 걱정 돌보듯 하였노라

밝은 태양 대지를 환히 밝혀주니

내 정성어린 속마음  거울처럼 비쳐지네

 

靜菴先生의 生長과 略歷

趙光祖先生은 (1482~1519)

朝鮮 中期의 學者로 本貫은 한양(漢陽), 자(字)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菴)시호는 문정(文正)이시고, 1482년 8월 10일 한양(漢陽)에서 出生하시었고 선친(先親)의 묘소(墓所)가 서원뒤편에 (安葬)하였기에 先生께서

3년간 시묘하신 곳으로 심속서원을 여기에 건립하여 위패(位牌)를 모신 것이다. (1972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7호로 지정 )

1. 中宗 5年 1510年 29歲의 나이로 사마시(司馬試)장원합격

성균관에서 공부하였고 유생들의 추천과 좌의정 안당(安塘)의 천거로 관직에 임하였다.

2. 中宗에 신임의 배경으로 유교로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고 지치주의(至治主義)에 입각한 왕도정치(王道政治) 실현을 역설하였다.

3. 향촌에 상호부조를 위하여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전국에 실시토록하여 서로 상부상조(相扶相助)하는 기풍(氣風)을 진작하는데 힘을 쓴 결과 (지금의 친목회)백성들의 큰 호응과 칭송을 받았다.

4. 미신(迷信)을 타파하기 위하여 소격서(昭格署)를 혁파하고 어진 人才를 양성할 현량과(賢良科)를 신설 어질고 젊은 인재를 등용하였다.

 

5. 연산군(燕山君)을 폐위한 정국공신(靖國功臣) 훈구대신들이 공적을 재심사 하여야 한다는 이른바 僞勳削除(위훈삭제)를 강력히 주장하여 공신의 3분의 2인 76명을 훈작삭탈함으로 훈구의 강한 반발을 받게 된다

6. 후훈구파의 홍경주(洪景舟) 남곤(南袞) 심정(沈貞)등은 후궁을 움직여 왕에게 신진사류를 무고 하였다.

대궐나무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씨를 써서 벌레가 갉아먹게 한다음 이를 왕에게 고하여 그가 왕이 되려 한다는 허무한 무고를 능주(陵州) 현재(전남 화순군 능주면)로 유배되었다가 中宗14년 1519년 12월 20일 사약(死藥)을 받고 마침내 절명(絶命) 하시었음.

7. 죽음에 임하였을 때 가족에게 보내는 유언의 절명시를 남겼다.

 절명시(絶命詩)

임금을 어버이 같이 사랑하고(愛君如愛父)

나라일을내일 같이 걱정하였네(憂國如憂家)

발고 밝은 햇빛세상을 비추니(白日臨下土)

거짓없는 이마음 환히 비추리(昭昭丹哀

8. 선조38년 1605년 사림(사림)들의 함모(함모)로 서원을 창건하고

위패(위패)를 배향하고 현재까지 전국 유림들이 모여 매년 음2월 , 8월 中丁日에 享祀를 봉행한다

 

참고 : 李良將軍

本貫 咸平李氏로서(1446) 세종 8년에 태어나 성종 11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함경북도 절도사, 전라 좌도 수군 절도사, 충청 수군절도사

연산3년 히선대부 연산8년(1502)咸川君에 봉해졌다.

여수시 중앙동 1번지 섬에 왜구가 자주 나타나 노략질을 한지라 홍치 11년 정사에 절도사 이랑장군이 섬(지금의 장군도) 양쪽 바닷물 깊ㅍ이를 측정하여 왼쪽에 암석을 실어다 방위축조로 해저에 쌓아 삼면이 바다인 썰물을 이용하여 왜구를 전멸시킴.

임진왜란(1497) 이랑장군이 구축한 수중성이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한 곳 수중성이다

그리하여 섬명을 장군도라 영원히 불리고 비석과 유물이 지금도 있는 무인도 작은섬이며 유적으로 전국 유일한 국방사적 유물이다.

* 用語解說

世와 代

始祖를 一世로 하여 차례대로 정하는 것이 世이며

本人을 뺀 나머지를 차례대로 따저 代인 것이다

 

*민간자요법(식중독 토사광란)

변절된 음식, 유독성 식품을 먹어 식중독에 걸려 토사광란시 생밀가루반그릇을 물 한그릇에 반죽하여 꿀2수저에 개어 마시면 즉효다

 

*서거정 묘

서거정 선생은(1444) 식년 文科, 乙科로 급제하여

司宰監直長에 제수되여 문종 1년(1451)부교리 수양대군을 따라 명나라에 다녀온 인연으로 세조를 도와 일하고 세자를 가르치는 일과 혼란에도 불구하고 예종원년(1469) 漢城府判尹이 되고 서울의 행정책임 성종 1년(1470) 左參贊이 되었으며 이듬해 純誠明호 佐理功臣 3등에 녹훈되고 달성군에 봉해졌다.

한성판윤2번 대사헌2번 황비5번 지내고 經學을 강의하고 試官을 23번이나하여 많은 인재를 뽑았다.

조정에서 45년 대제학으로 23번이다

언제인가 西江을 여행하다 한명희의 시를 보고 시를 인용하여 권력부패를 비난 즉흥시를 읊었다.

靑春亡社禝(청춘망사직) ~~~젊어서 나라를 망치고

白首汚江湖(백수오강호) ~~~ 늙어서 강호에 뭍힌다(한명희 시)

 

청춘망사직(청춘망사직)~~~젊어서 나라를 망치고

백수오강호(백수오강호)~~~ 늙어서 세상을 더럽힌다 (서거정 반론)

서거정은 학문이 넓어 성리학, 천문, 지리, 의약, 복서 , 성명, 풍수지리 등을 정통하였다.

 

위의 글들은 심곡서원을 찾았을때 그곳에서 준 프린트의 글을 옮긴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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