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 http://blog.naver.com/kimkyoc/40051677217
나의 죄는 “죽어가는 사람 살린 죄밖에 없어”
더 늦기 전에 암환자 등에 조건 없는 치유
우리 사회 일각에서 신의 (神醫)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장병두옹’이 최근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본지의 심층보도 이후 여러 언론과 온라인상에서 장 할아버지의 구명운동이 활발히 이뤄졌고 본지로도 많은 문의 전화가 오는 등 큰 반향을 일으켰다. 장 할아버지와 지지자들은 이번 판결에 승복할 수 없다며 대법원 상고를 준비하고 있어 논란의 여지는 계속되고 있는 상태다. 이와 관련 <뉴스포스트>에서는 장병두 할아버지를 직접 만나 그간의 사정과 심경에 대해 들어보았다.
11월 13일 아침, 기자는 약속한 시간에 맞춰 장 할아버지를 찾아갔다.
서울 **동의 한 주택에 장 할아버지는 조카와 살고 있었다. 초인종을 누르고 집안에 들어서자 조카 A씨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방안에는 장병두 할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본 기자는 깜짝 놀랐다. 92세(실제 나이 102세)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은 때문이었다. 그는 무엇보다 발음이 정확했다. 최근 재판 결과와 관련, 큰소리로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는 이번 재판에 대해 “내가 여기서 할 일을 다한 것 같다. 여기서 이렇게 홀대 받고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차라리 외국에 나가 대접 받고 사람들 생명을 구하는 게 낫겠다.”라며 현실을 안타까워 했다.
다음은 장병두 할아버지와의 일문일답.
1심에 이어 2심에서도 유죄 판결을 받았다. 불만이 있나.
-불만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내가 무슨 죄를 지었나. 내가 고쳐줄 테니 돈을 내놔라. 또는 병원에 가서 입원한 환자를 내가 고쳐준다고 병원을 나와라 한다거나 했으면 죄를 지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내가 내 약을 가지고 아프다는 사람 먹여 봤는데 나은 것이다. 이게 무슨 법에 걸리는 것이냐. 아프다고 살려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찾아와 울고불고 난리를 친다. 이런 환자들의 안타까운 사정을 알고 내가 만든 약을 먹인 죄 밖에 없다.
다만 중한 병에 쓰이는 약재들은 원래 재료값이 비싸서 환자가 일부 부담하고 내가 일부 부담하는 선에서 돈을 내 재료를 구해 약을 만들어 준 것 뿐이다.
예를 들어 한 달에 50만원 하는 약값을 1년 넘게 먹어야 하는
환자한테는 부담이 될 수 있지 않나.
-중한 병은 1년이나 그 이상 약을 먹어야 하는데 약값이 많이 든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보통 병원이나 한의원에서는 이보다 훨씬 많은 돈이 들지만 잘 낫지도 않는 게 대부분이다.
또한 암은 유전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그 환자의 자녀들도 약을 먹어야 한다. 이럴 경우에는 약값을 받지 않았다. 부모가 약값을 내고 치료를 받았으니 그 자녀들은 무료로 약을 처방해 줬다.
처음 한방에 관심을 갖고 환자들을 치료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부인을 늦게 만났다. 그런데 병을 얻어 죽고 말았다. 병을 고치기 위해 안 가본 한의원이 없었다. 아기를 낳고 산후조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얻은 병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게 고칠 수 있는 병인데 당시에는 고칠 수 없었다. 그게 한이 됐다. 이후부터 산속에 들어가 나만의 방법을 터득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의학 관련해 체계적인 학습은 전혀 받지 않았나
-그렇다. 집이 가난해 학교를 전혀 갈수 없었다. 다만 외조부가 한의학에 정통해서 많은 환자들을 고쳤다. 나도 등창이 걸렸는데 외조부가 고쳐줬다. 그 이후 외조부에게 간단한 의술을 얘기를 통해 전수 받은 게 전부다. 그 이후에는 나 혼자 터득했다.
한의학에서 쓰는 용어들과 다른 용어를 쓴다고 하는데
-나는 체계적인 공부를 하지 않아 한의학에서 말하는 약초 용어를 쓰지 않는다. 내가 임의대로 부른다. 그렇기 때문에 그 누구도 내가 어디에 어떤 약을 쓰는지 모른다. 내가 약을 처방할 때 도움을 주는 사람도 내가 어떤 약을 쓰는지 모른다. 사람을 죽일 약인지 살릴 약인지 어찌 알겠는가.
터득한 비법을 계승할 의향은 있나
- 내 비법을 계승하려고 해도 그만한 그릇이 없다. 내 아들도 한의사인데 기본적인 것들에 대해선 알려줬다. 하지만 중요 병에 대한 비법은 알려 주지 못한다. 그릇이 작아서 그렇다. 자칫 물이 넘쳐 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도껏 알려 줘야한다. 예를 들어 소화불량, 감기 등 가벼운 병에 대해선 비법을 알려줄 수 있지만 암, 백혈병 등 중한 병은 알려 줄 수 없다. 아는 게 독이 될 수 있다.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안타까웠던 적은 없는가.
-가장 안타까운 것은 치료할 시기를 놓쳐 나조차도 손 쓸 수 없는 경우다. 그런 사람들에게 ‘당신 곧 죽는다. 내가 고칠 수 없다’라고 말하기 힘들다. 처음엔 대 놓고 때가 늦어 고칠 수 없다고 솔직히 얘기를 해줬다. 그러자 환자와 가족들이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약이 떨어져 한 달 후에나 제조할 수 있다고 선의의 거짓말을 하게 됐다. 그렇게라도 돌려보내야 순순히 돌아가지 그렇지 않으면 절대 돌아가지 않는다. 미안한 얘기지만 어쩔 수 없다. 진찰을 해보고 2~3일 뒤에 죽을 사람보고 죽는다는 얘기를 어찌 할 수 있겠는가.
진맥을 하는 방법이 특이하다는데
-내가 배워서 터득한 것이다. 등과 허리 쪽에 맥을 짚어 어디가 이상 있나 확인한다. 나만의 방법이라 다른 사람은 진맥을 짚어도 알 수 없다. 진맥을 짚어 암이 어디로 전이될지도 미리 알 수 있다.
수많은 환자를 살려냈는데 그중 기억에 남는 환자는
-지금 내 구명운동을 하고 있는 박태식 교수의 경우 솔직히 내가 고칠 자신이 없었다. 박 교수는 두 달 시한부 선고를 받고 나를 찾아왔었다. 내가 진맥을 짚어보니 반반이었다. 확답을 안 하고 멈칫거리자 박 교수의 부인이 나를 붙들고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다. 그 마음이 안쓰러워 ‘그래 한 번 고쳐 보자’고 승낙을 했다. 그래서 한 6개월 정도 약을 먹고 병이 나았다. 그 이후부터 나를 믿고 내 구명운동에 앞장서서 하고 있다.
또 기억에 남는 환자는 이경숙씨의 딸이다. 인공호흡기를 달고 나를 찾아왔다. 생후 10개월부터 홍역과 폐렴 합병증으로 중환자실 신세를 진 아이다. 그 아이도 내가 약을 지어줘 나을 수 있었다. 벌써 8살이 됐다. 많이 커서 잘 뛰어 다닌다.
담당 재판부 서경환 부장판사의 아버지도 간암 말기로 재판 중에 돌아가셨다는데
-재판장이 자신의 아버지가 간암 말기로 병원에 누워있다고 얘기를 했다. 그 얘기가 왜 나왔느냐 하면 판결이 연기가 되자 방청석에 앉아있던 환자 가족들이 환자가 죽어간다며 선처를 호소하자 재판장이 했던 말이다. 그런데 그런 불효가 어딨느냐. 자신의 아버지가 죽어가는데 재판이 무슨 소용이 있나. 나를 한번 데려가 진맥을 짚게 하면 모두 끝나는 것인데. 그러면 재판에 쟁점인 환자 치료가 가능한지도 알 수 있는 것이고 자신의 아버지도 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뉴스포스트> 보도 후 본지에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자택을 찾는 환자들이 지금도 많은가.
-재판을 하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나를 찾아왔다. 어찌들 알았는지 집 주변에 서성거리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다고 누구는 진료를 봐주고 누구는 안 봐줄 수 없는 노릇 아닌가. 특히 지금은 재판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봐 줄 수 없다. 딱한 사정은 알지만 그럴 수 없어 나도 안타깝다. 심지어 외국에서도 사람들이 찾아온다.
주위를 둘러보면 암환자들이 많다. 그 이유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우리나라는 여러 가지 환경 문제로 암이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환경오염으로 병균들이 진화하고 기존의 병균들도 돌연변이가 되어 생겨나고 있다. 특히 시멘트 빌딩 숲에서 살다 보니 독성에 많이 노출 되어 있다. 이런 환경 요인들 때문에 암, 백혈병 등이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최고의 의술을 펼쳐 보이고 싶다. 특히 서양 사람들은 당뇨와 아토피에 많이 시달린다. 내 의술로 이런 사람들을 고쳐 세계적인 명의가 되고 싶다. 한국 사람이건 외국 사람이건 환자들은 비슷하다. 환자를 위해 내 모든 힘을 쏟고 싶다. 솔직한 심정으론 지금이라도 대체의학을 인정해 주는 곳에 가서 얼마 남지 않은 내 일생을 걸고 환자들을 고쳐 보고 싶을 뿐이다. 그전에 대법원 상고를 통해 이번 일이 원만히 해결되기를 바란다.
두 시간 가까이 진행된 인터뷰 내내 장 할아버지는 자세에 변함이 없었다. 다리가 저린 기자가 몇 번이나 자세를 고쳐 앉았는데도 불구하고 장 할아버지는 꼿꼿이 앉아 인터뷰에 응했다. 인터뷰를 끝내고 돌아서는 기자의 귓전에 장 할아버지의 마지막 음성이 맴돌았다.
“내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는가. 내 나이가 100세가 넘었다. 더 늦기 전에 내가 가진 의술을 이 땅의 죽어가는 암환자들에게 조건 없이 베풀고 싶다.”
인상준 기자 sky0705i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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