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예배의 참뜻

백합사랑 2012. 7. 25. 19:33

이 썩어질 몸둥이를 보고 예배를 해서 어쩌자는 거냐, 법을 보는 사람은 나를 보는 사람이요

 부처님이 라자가하의 죽림정사(竹林精舍)에 계실 때였다. 박칼리 비구는 어떤 도공(陶工)의 집에서 앓고 있었다.   병이 위중해 회복이 어려워졌다.   그는 마지막 소원으로 스승인 부처님을 한 번 뵙고 예배를 드렸으면 싶었다.     간호하던 스님이 병자의 소원을 부처님께 알렸다.    부처님은 도공의 집을 방문, 일어나려던 환자를 만류하고 머리맡에 앉으셨다.    뼈만 남은 그의 손을 잡고  위로의 말씀을 하셨다.

[박칼리,  그대로 누워 있거라.    병은 좀 어떠냐,   음식은 무얼 먹느냐?]

[세존이시여,  고통은 심하고 음식은 통 넘길 수가 없습니다.     병은 더하기만 하여 소생할 가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마지막으로 부처님을 찾아  뵙고 예배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 몸으로는 죽림정사까지 갈 수가 없었습니다 ]

이때 부처님은 정색을 하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박칼리,  이 썩어질 몸둥이를 보고 예배를 해서 어쩌자는 거냐.  법을 보는 사람은 나를 보는 사람이요,  나를 보는 사람은 법을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나를 보려거든 법을 보아라.]

이 말을 듣고 박칼리는 지혜의 눈이 열리었다.      - 상응부경전 22 -

 * 불타 석가모니는 스스로 예배의 대상이 되기를 거부했다.     자기에게 인사치례를 하기보다는 진리를 보고 그 진리를 실현하는 것이 곧 진정한 예배임을 강조한 것이다.    여기 불교의, 아니 모든 종교의 본질적인 면목이 있을 것 같다.

 날 때부터 천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날 때부터 바라문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 행위에 의해서 천한 사람도 되고 바라문도 된다.   - 숫다니파아타 -

 출생(家門)을 묻지 말고 그의 행위를 물으라.   불은 온갖 섶에서 일어난다.  천한 집안에 태어난  사람일지라도 성자로서 도심(道心)이 견고하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으로 행동을 삼가면 고귀한 사람이 될 수 있다.

    - 숫다니파아타 -

 * 불교 교단에서는 출신성분을 가리지 않았다.   그가 바라문이건 슈드라(천민)건 일단 출가하여  수행승이 되면 똑같이 불자(佛子)라 불리웠다.     아무런 계급도 인정하지 않고,   출가 후의 햇수에 따라 차례를 결정할 뿐이다.

 성자의 마음은 행동과 말에 잘 나타나 있다.   밝은 지혜와 청정한 행을 갖추고 있는 그를 찬탄하고 기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 숫다니파아타 -

 이 세상 진리를 통달한 사람은, 견해와 학문과 지식을 보고 성자라고 하지는 않는다.  번뇌의 마군(魔群)을 깨뜨려 고뇌가 없고, 욕망이 없이 행동하는 사람을, 그들이야말로  성자라고 할 수 있다.      - 숫다니파아타 -

  * 아는 것이 많다고 해서  성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안으로나 밖으로나 때가 없는 사람이 성자다.  진리를 깨달음에는 학문만 가지고는 될 수 없다.  종교학자일수록 종교의 진실에서 먼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아는 것보다 진실한 행위를 높이 사는 불타의 가르침이 윤리적이고 도덕적으로 보이는 것도 불교의 기본적인 입장이 행위주의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바라문도 아니고 왕자도 아니오 . 나는 바이샤족 사람도 아니요, 다른 아무것에도 속하지 않소. 모든 범부의 성(姓)을 잘 알고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생각하면서 세상을 두루 다니오.  나는 가사(누더기)를 걸치고 집이 없으며, 수염과 머리를 깎고 마음을 편안히 하고, 세상  사람에게 누를 끼치지 않고 편력하고 있소. 바라문이여,  당신이 내게 성을 묻는 것은 당치 않소.              - 숫다니파아타 -

  * 이것은 어떤 바라문(바라문교의 수행자)이 부처님에게  [당신의 출신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은 데 대한 대답이다.   출가 수행자는 어떤 가계(家系)에도 소속될 수 없으므로  성(姓)을 묻는 것은 당치 않다고 한 것.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의 불교 승려들은 속성(俗姓) 쓰기를 무척들 좋아하는 것 같다.   그만큼 세속적인 것에 미련이 남아서인가.            

 

출처/ 법정스님의 '말과 침묵' 중에서

 

 

36도로 이글거리는 하늘 모습 그래도 조금은 흐린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