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법정스님의 "말과 침묵"에서

백합사랑 2012. 7. 22. 07:45

침묵의 체로 거르지 않은 말은 사실 소음이나 다를 바 없다.

침묵을 배경으로 한 귀한 말씀을 듣고 싶어 불타 석가모니의 설법(大藏經)과  조사(祖師)들의  어록을 읽으면서  그때그때 메모해 두었던 것을 정리하여 책으로 엮은 것이 이 <말과 침묵(沈默)이다.   내 눈으로 읽어서 확인하고 가려서 뽑은 말들이므로 얼마쯤 주관적인 경향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70년대에 <불교성전>을 편찬했던 경험을  살려 작은 지면이지만 , 불교사상의 핵심을 잡으려고 생각을 모았다.

- 책머리에-  중에서

 

(나무사랑의 어떤 실수에서였는지? 서문 첫 페이지가 없어서저 안타깝습니다)   앞머리는 생략된채  법정스님의 말씀을  이어가면 ....... 불교의 명언들은 소설이나 다른 산문을 읽듯이 잡은 참에 내려 읽지 말고, 한 귀절 한 귀절 음미하듯 읽으면서 독자 자신의 마음 속에 그 뜻을 새겨보라는 것.  차를 마실 때 한 입에 꿀꺽 삼켜버리면 아무리 좋은 차라도 그 맛을 알 수 없다.   한 모금씩 입안에 머금었다가 삼키고 나면 그때부터 향취와 맛이  우러난다.  경전을 읽는 태도도 이와 마찬가지다.

말과 침묵은 하나의 틀을 이룬다.   뜻을 담은 말은 침묵을 배경으로 발음될 수 있고, 말끝에 오는 침묵은 새로운 뜻을 담은 말을 잉태한다.      음과 음 사이에  침묵이 깔리지 않는다면, 아름다운 음악이 이루어질 수 없듯이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이 말과 침묵의 의미를 거듭 다져서 온갖 소음에 매몰되어 시들어가는 인간의 뜰을 다시 소생기키기를 빈다.

산의 일이 많아 말빚을 뉘늦게 갚게 된 것을 미안하게 생각한다.   샘터의 끊임없는  배려와 노고에 감사드린다.    모든 이웃들이 다 행복하라.     태평하라.   안락하라!

 

나의 주인은 누구인가

자기야말로 자신의 주인이고 의지할 곳 

말장수가 말을 다루듯 자신을 잘 다루라

 

 

 

 

베나레스의 녹야원(鹿野苑)에서 최초의 설법을 마치고, 부처님은  우루벨라를 향해 교화의 길을 떠났다.  도중  길가에서 깊숙히 들어간  숲속 한 나무 아래  앉아  쉬고 있을  때였다.  한 떼의 젊은이들이 무엇인가를 찾아 허둥지둥 제 정신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나무 아래 조용히 앉아 있는 부처님을 보자 그들은 물었다.

[혹시 이리로 도망가는 여인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그 여자를 어째서 찾으려고 하는가?]

사연인즉, 그들은 이 근처에 사는데, 저마다 자기 아내를 데리고 숲으로 놀이를 나왔었다.  그중 한 사람은 아직 미혼이라 기생(遊女)을 동반했었다.  놀이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기생은  그들의 값진 물건을 가지고 달아나버렸다.  그래서 그여자를 찾느라고 온 숲을 뒤지고 있다는 것이다.

[젊은이들,  달아난 여자를 찾는 일과 자기 자신을 찾는 일과 어떤 것이 더 보람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달아난 여자만을 찾아 정신없이 헤매던 그들은 이와같은 질문을 받고서야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물론 자기 자신을 찾는 일이 더 보람있는 일이지요]

[그럼, 다들 거기 앉거라. 자기 자신을 찾는 길을 가르쳐 주겠다]

부처님은 그들을 위해 차근차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극복과 그극복에 이르는 길을 말씀하셨다.

그들의 마음은 흰 천과 같이 아직 세상에 물들지 않았으므로, 이치에 맞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진리를 보는 눈이 열리었다.    <律藏  1권>

*괴로움(苦)과 괴로움의 원인(集)과 고로움의 극복(滅)과 그 극복에 이르는 길(道)을 사성체(四聖諦)라고 한다. 인생문제와 그 해결법에 대한 네가지 진리라는 뜻.

괴로움이란, 인생 그 자체가 괴로움이라는 것. 불교에서 본 인간의 현실상을 말한 것인데 , 생(生) 노(老) 병(病) 사(死)가 괴로움이고 ,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지는 괴로움(愛別離苦), 미운사람과 만나는 괴로움(怨憎會苦),  구해도 얻지 못하는 괴로움(求不得苦), 온갖 욕망이  불타오르는 괴로움(五陰盛苦). 이를 팔고(八苦)라고 한다.

괴로움의 원인은 인간의 욕망과 애착에 있다는 것. 모으고 쌓은 것은 모두 괴로움인데,  재산도 지나치게 많이 쌓으면 그것이 괴로움이 된다.  괴로움의 극복이란 ,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번뇌가 완전히 사라진 상태 . 즉 불교가 지향하는 이상은 온갖 모순과 갈등이 소멸된 열반에 있다.

괴로움의 극복에 이르는 길은,  그 이상에 도달하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방법인데 , 여기에는 여덟가지 바른 길(八正道)이 있다.   불교의 기초교리에 생소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좀 지루한 주석을 달았다.

어떤것이 괴로움의 극복에 이르는 길인가.  소멸에 이르는 방법 즉 여덟가지 바른 길이다.    그것은 바른 견해(正見), 바른 생각(正思),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활(正命), 바른 노력(正精進),  바른 기억(正念),  바른 명상(正定)이다.

바른 견해란  네 가지 진리(四聖諦)를 바로 보는 지혜이고,  바른 생각이란 번뇌 망상을 멀리하고  성냄과 원한이 없는 생각이다.   바른 말이란 거짓말, 악담, 이간질, 그럴듯이 꾸미는 말을 떠나서 하는 도리에 맞는 참된 말일다.

바른 행위란, 살생, 도둑질, 음란한 짓을 하지 않고 올바른 생활규범(戒行)을 지키는 일이다. 바른 생활이란,  불공정한 거래나 점술 따위의 수단을 떠나 정당한 방법으로 의식을 얻어 살아가는 것.  바른 노력이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나쁜 생각을 일지 않게 하고, 이미 일어난 나쁜 생각은 없애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착한 생각을 일게 하고,  이미 일어난 착한 생각은 원만히 키워 나가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다.     바른 기억이란 ,  생각을 한곳에 집중하여 몸과 마음과 진리를 바로 관찰하고 탐욕에서 일어나는 번뇌를 없애는 것.   그리고 바른 명상이란 온갖 욕심과 산란한 생각을 가라앉혀 선정(禪定)에 들어감을 말한다.

- 中阿含 分別聖諦經-

 

*부처님이 바라나시의 녹야원(鹿野苑)에서 다섯 사람의 수행자를 상대로 한 최초의 설법이다.

자기야말로 자신의 주인이고 의지할 곳. 그러니 말장수가 좋은 말을 다루듯 자기 자신을 잘 다루라.

자기야말로 자신의 주인, 어떤 주인이 따로 있을까.  자기를 잘 다룰 때 얻기 힘든 주인을 얻는다.

어디서나 자주적인 인간이 된다면 그 자리가 다 참되다(隨處作主立處皆眞).   - 臨濟錄-

*인간의 주인은 신(神)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것이 불타(佛陀) 석가모니의 가르침이다.  어디까지나 인간 중심적인 입장.  신에 대한 관념이나 형이상학적인  견해는 불타의 기본적 입장에서 보면 개념적 존재에 불과하다.   자기 자신과 진리 이외에는 의지하지 말라는 것이 그의 유언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란 온갖 모순과 갈등 속에서 부침(浮沈)하는 일상적인 자기가 아니고 본래적인  청정한 자아(自我)를 가리킴이다.

명상(瞑想)에 전념하고 욕망에서 벗어나 고요를 기뻐하고, 깨달음을 얻어 깊이 생각하는 현자(賢者)는 신들까지도 그를 부러워한다.     - 법구경-

 *기독교,  회교와 같이 세계종교일지라도 사막지방에서 일어난 것은 [기도의 종교]이지만, 인도의 여러 종교처럼 몬순지방의 것은 [명상의 종교]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불교학자 헬만 벡크가 지적한 말이다 .  기도의 경우는 기도의 대상으로서 인격적 창조신의 존재가 없어서는 않된다.   그곳에는 으레 초자연적인 기적이 대두된다.   신앙의 부조리는  [기도의 종교]에 있어서  그 본질을 이룬다.   거기에서는 이성보다도 신앙의 우위를 존중한다. 그러나 불타는 자기 계발의 극한에 도달, 몸소 깨달음(內證)을 실현한다.   그것은 자신의 존엄성과 인간의 절대성에 대한 확신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불합리한 신앙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와같은 불교의 기본적 성격은 인간으로서 만인에게 공통된 보편적 진리를 말하기에 이른다.   즉, 모든 중생은 다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다고.

전쟁터에서 백만인과 싸워 이기기보다 자기 하나를 이기는 이가 가장 뚸어난 승리자. 자기 자신을 이기는 일은 남을 이기는 일보다 위대하다.   그러니 항상 자신을 억제하고 절제하는 사람이 되라.  신도 범천(梵天)도  악마까지도 이와같은 사람의 승리는 물리칠 수 없다.    - 법구경 -

먼저 자기 자신을 바로 갖추라.    그런 다음에 남을 가르치라.   이와같이 하는 지혜로운 사람은 근심이 없으리라.

남을 가르치듯 스스로 행한다면 그 자신을 잘 다룰 수 있고 남도 잘 다스리게 되리라.  자신을 다루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    - 법구경-

   물 대는 사람은 물을 끌어들이고, 활 만드는 사람은 화살을 곧게 한다.  목수는 나무를 다듬고, 어진 이는 자기 자신을 다룬다.      - 법구경-

* [불교를 배운다는 것은 곧 자기를 배움이다. 자기를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잊어버림이다.   자기를 잊어버림은 자기를 텅 비우는(無我) 일.  자기를 텅 비울 때 비로소 체험의 세계와 하나가 되어, 그 어떤 것과도 대립하지 않고 해탈된 자기를 알게 된다.].  

해탈된 자기란 본래적인  자기,  전체인 자기를 가리킴이다.   그 이름은 잊었지만 어떤 선사(禪師)의 어록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남의 잘못은 보기 쉬워도 자기 잘못은 보기 어렵다.   남의 잘못은 겨처럼 까불어 흩어버리지만, 자기  잘못은 투전군이 나쁜 패를 감추듯 한다.      - 법구경-

쇠에서 생긴 녹이 쇠에서 나서 쇠를 먹어 들어가듯, 방종한 자는 자기 행위 때문에 제 발로 걸어서 지옥으로 간다.      - 법구경-

자업자득(自業自得), 좋은 일이나 궂은 일이나 모두 내가 지어서 내가 받는다.    누가  들어서 그렇게 해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내가 뿌린 씨의 열매를 내가 몸소 거두는 것. 그러므로  내 인생에 대한 책임은 오로지 내게 달린 것이다. 그렇게 할 수도 있고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선택의 의지가 자기 자신에게 있음을 강조한 가르침.

독경(讀經)하지 않음은 경전의 때, 수리하지 않음은  집의 때, 게으름은 아름다움의 때,  방일(放逸)은 수행자의 때,  부정한 짓은 부녀자의 때, 인색은 베푸는 이의 때,  악덕은 참으로 이승과 저승의 때.        - 법구경-

* 게으름(放逸)은 최대의 악덕. 모든 가능성이 이 게으름 앞에서는 흩어지고 만다.  아무리 청정한 불성(佛性)을 지녔다 할지라도 게을러 활용하지 않으면 무명(無明)에 가리어 매몰된다.    불타 최후의 유훈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 도 이 때문일 것이다.   동물 중에서 가장 용맹을 떨치는 사자는 외부로부터 침해를 받아서가 아니라, 자기 안에서 자생하는 벌레로 인해 죽는다고 한다.   마치 쇠에서 나는 녹이 쇠 자체를 침식하듯이 .

자신을 등불 삼고 자신에게 의지할 것이지 남에게 의지하지 말라 .  법(진리)을 등불 삼고 법에 의지할  것이지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라.       -  南傳 大涅槃經 -

*  사람은 누구에겐가 의존하려는 버릇이 있다.   부처님이라 할지라도  그는 타인.     불교는 부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의 가르침에 따라 자기자신답게 사는 길이다.   그러므로  불교란,  부처님의 가르침일 뿐 아니라  나 자신이 부처가  되는 자기 실현의  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의지할  것은 부처님이 아니라 나 자신과 진리 뿐이라는 말.   불교는 이와같이 탐구의 종교다.       자기 탐구의 과정에서 끝없는 이웃(衆生)의 존재를 발견한  것이 대승불교 . 초기 불교가 자기 자신을 강조한 것은 자기로부터 시작하라는 뜻에서이다.  자기로부터 시작하여 이웃과 세상에  도달하라는 것.  자기자신에게만 갇혀 있다면 그것은 종교일  수 없다.  인간에게 있어 진실한 지혜란 이웃의 존재를 보는 지혜다.   자기라는 표현이 때로는(특히 대승경전에서는) 만인 공통의 [마음]으로 바뀐다.

 

본래 산에 사는 사람이라

산중 이야기를 나눈다

5월에 솔바람 팔고 싶으나

그대들 값 모를까 그게 두렵네.

- 禪宗古聯 <山中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