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겨울의 창덕궁

백합사랑 2015. 11. 27. 20:07

우리가 방문한 날은 영하 5도가 넘는 이번겨울 첫추위가 온날

창덕궁昌德宮

조선조 3대 임금인 태종은 1405년에 제2의 왕궁으로 창덕궁을 창건했다.  그럼으로써 수도 한양의 서쪽에는 경복궁이,  동쪽에는 창덕궁이  위치하여 균형 잡힌 도시공간을 구성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서울의 모든 궁궐이  불탄 후 경복궁은 재건되지 않았고,  270여 년 동안 창덕궁이 조선 왕조 제 1의 정궁으로 역할 하였으며, 마지막 임금인 순종 때까지 사용된 최후의 궁궐이기도 하다.    동쪽의 창경궁(昌慶宮)과  함께 하나의 궁궐로 사용되어 동궐(東闕)이란 별칭을 갖고 있다.   중국을  비롯한  동양의 궁궐 예제는 남북 중심축을 따라 엄격하게 배치되는 것이 일반적이며 경복궁 역시 이 제도를  따랐다.  그러나 산자락에 자리 잡은 창덕궁은 인위적인 제도를 벗어나 주변 자연 지형에 순응하고 변화를 거듭하면서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 되었다.

왕실 생활에 편리하면서도 친근감을 주는 공간 구성은 경희궁, 덕수궁 등 다른 궁궐 구성에 영향을 주었다.  1917년에 대조전을 비롯한 내전들이 불타 없어지자 경복궁의 전각들을 헐어다 옮겨 짓는 등 많은 건물들이 변형, 훼손,  철거되었다가, 1991년부터  복원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덕궁은 조선 궁궐의 원형을 비교적  충실히 지니고 있으며, 동궐의 후원은 한국 전통 조경의 특성과 아름다움을 가장 훌륭하게  구현한 예로 평가된다.  1997년 12월 유네스코(UNESCO)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창덕궁 돈화문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敦化門)은 왕의 행차와 같은 의례에 사용되었고, 신하들은 서편의 금호문(金虎門)으로 드나들었다. 창건 당시 이미 종묘가 창덕궁 앞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돈화문은 궁궐의 서쪽 끝에 놓여졌다.

궁궐의 중심부가 동쪽에 있기 때문에 정문을 들어서면 동쪽으로 금천교를  건너 정전인 인정전 일곽과  연결된다.

1609년 재건된 돈화문은 2층 누각형 목조건물로 아래층은 출입용으로,  위층은 감시 전망용으로  사용되었다.  앞에 넓은 월대를 두어 출입시의 대기공간으로 사용했고,  원래는 여기서부터 종로까지 관청가가 조성되었다.

 

 

돈화문을 들어가면  회화나무들이 먼저 반깁니다. 풍수적으로 회화나무는 잡귀를 쫓는다고 알려져서 궁궐이나 고관댁 동쪽에 심었다고 합니다 

 

다리곁에 있는 고목 느티나무입니다

우리나라 고목나무 중에는 느티나무가 가장 많고 창덕궁에도 30여 그루의 고목 느티나무가 있습니다

 

돈화문을 지나면 금천교라는 돌다리가 있는데  보물이랍니다.  600여년이 지난 다리로 물론 중간에 변형은 조금 되었다고 하네요.

돌다리를 지나면 진선문으로  들어가서~~ 

 

인정문

안으로 들어가면 인정전이 나오고  1609년에 재건된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으로서 신하들의 조회, 외국 사진 접견 등 중요한 국가적 의식을 행하던 곳이다. 앞쪽으로 어도와 품계석을 둔 조정 마당을 마련해 국가적인 상징공간을  이루고, 뒤편에는 계단식 정원을 두어 뒷산인 매봉의 맥을 잇고 있다. 조정 마당을 둘러싼 내행각에는 호위대 주둔소와 창고등을 두었으나 현재는 비어있는 회랑이 되었다.  사다리꼴로 만들어진 인정문 앞 외행각 마당은 불규칙한 지형과 규칙적인 궁궐 형식을 절묘하게 조화시킨 공간으로,  세종조의 건축가 박자청의 솜씨이다.  외행각과  진선문, 숙장문은 1996년 복원된 것이다.

 

 仁政殿인정전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으로서 왕의 즉위식이나 외국사신 접견 등 나라의 공식 행사를 치르던 곳이다.   1908년 인정전 내부를 고치면서, 커튼, 전등 설치 등 서양식 실내 장식이 도입되었다.

인정전 앞에는 벼슬의 품계에 따라 서도록 품계석을 세워두었습니다 .  이것도 정조왕때 만들어진것이며 그 이전엔 신하들이 아침 조회를 설때 자리를 가지고 우왕좌왕하였기 때문이라고 해설가님이 알려줬습니다.

이제부터는 이 계단은 아예 오르지 못하도록 막아두었습니다. 옆으로 돌아서 올라가도록~

 

인정전仁政殿 내부

정면에 보이는 그림은 일월오봉

仁政殿앞에서 보이는 품계석과 멀리 남산타워까지 볼 수 있습니다

인정전앞 돌로 만들어진 뜰은 기울기가 조금씩 낮아짐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빗물을 잘 빠지게 하기 위해 애초부터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고 그밖의 옆에 건물들도 조금씩 낮아짐을 볼 수 있는데 그 역시 빗물 빠짐이 원할 하도록 해 놓은 것이라함

 

仁政殿 옆모습

 

인정전을 나와 선정문

宣政門안에 宣政殿,  이곳 지붕은 청기와로 청기와를 얹은 선정전은 왕이 평상시 나랏일을 보시던 편전이다.  옆에 있는 희정당으로 편전 기능이 옮겨가면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는 혼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희정당은 왕의 생활공간 이었으나 편전인 선정전이 비좁고 종종 국장을 위한 혼전으로 사용되면서 편전의 기능을 대신 하게 되었다.

 해설사님이 이 안으로는 들어가지 않고 옆쪽으로 가며 해설을 해준다.

그래서 옆으로만 보고

 

 

희정당

 

 

 

 

 

 

 

 

 

대조전大造殿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이며 왕실의 큰 행사도 자주 열렸다. 대조전은 창덕궁의 침전으로 안대청을 사이에 두고 왕과 왕비의 온돌방이 설치되었다. 원래의 興福軒은 1910년 마지막 어전회의를 열어 경술국치를 결정했던 비운의 장소이며, 행각과 복도로 여러 부속 건물들이 연결되어 있다.  1917년에 불에 타 없어진 터에 경복궁의 침전인 교태전을 옮겨 지어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마지막 왕비였던 순정효황후의 거처로  해방 후까지 사용되었기 때문에 고유한 장식과 벽화,  문살 등이 잘 남아 있다.  뒤편에  4단의 계단식 정원을 만들어 후원으로 삼았고,  누마루를 뒤편으로 돌출시켜 이를 감상하는 장소로 사용했다.

대조전 내부

대조전 내부와  기물들

대조전에 이어진 왕비의 공간 흥복헌興福軒

 

대조전 아래채에 있는 방의 전등 역시 이태리 유리공예로 이태리에서도 귀한 것이라고 함

 

건강 강령을 뜻하는 '康'자가

낙선재樂善齋 일원

 

 

 

낙선재樂善齋

헌종은 명헌왕후에게서 후사가 없자 1847년 김재청의 딸을 경빈慶嬪으로 맞이하여 중희당 동쪽에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 등을 지었다.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였고,  석복헌은 경빈의 처소였으며,  수강재는 수렴청정이 끝난 순원왕후를 모신 곳이었다. 헌종의 뜻에 따라 낙선재는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외형을 지녔으며,  또한 외국 문물에 대한 왕의 기호를 반영하듯 낙선재 창살무늬와 상량정의 건축 양식 등에서 청나라 양식을 볼 수 있다.  낙선재 현판은 청나라의 대가 섭지선의 글씨이며, 대청마루 앞 주련에는 추사 김정희의 스승 옹방강의  글씨가 있다.

낙선재 위에 있는 정자는 들어가지 못했다 그곳은 아마도 후원신청을 해야만 갈 수 있는 곳인듯 하다.

 

중무장을 한 나의 모습 ㅎㅎ

 

선정문 내에 있는 청기와 집은 선정전

 

고궁에 들어갈 땐 인정문  나올땐 숙장문으로 나왔습니다

 

돈화문 매표소 옆에 있는 은행나무는 마치 보석나무 같다 ㅎㅎ

 

주최측에서 한 달전부터 예약을 하신다기에 난 후원관람을 신청해 놓으신줄 알았는데 아쉽게도 아니었다.

참고로

 

그리고 위의 모든 전각이나 궁의 설명은 그곳에 있는 글을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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