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소수서원을 가는 길에 차창으로 보이는 장면인데 선비님들이 살고계신 양반의 고장이라 그런지? 가을이라 시제를 지내시는 것 같은데 어르신들 모두 똑같은 두루마기들을 입으시고 제를 올리시는지? 많은 자손들이 모인것도 그렇고 어떤 종가댁 시제인듯 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
사적 제 55호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이 서원은 풍기군수였던 신재(愼齋) 주세봉(周世鵬) 선생이 고려말의 유현(儒賢)인 안향(安珦)선생의 연고지에다 중종37년 (1542) 사묘(祠廟)를 세워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다음해에는 학사(學舍)를 건립하여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창건한데서 비롯되었다.
명종 (1550) 퇴계(退溪) 이황(李滉)선생이 풍기군수로 재임하면서 나라에 건의 ,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사액(賜額)을 받게 되어 최초의 사액서원이자 공인된 사립고등교육기관이 되었다.
이곳에 주향(主享)된 회헌(晦軒) 안향(1243~1306) 선생은 도첨의 중찬(都僉議 中贊) 등을 거치면서 문교진흥에 진력한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이시며 , 동방 신 유교(新 儒敎)의 비조(鼻祖)이시다. 경내에는 국보 제 111호인 회헌 영정과 보물 5점 , 도유형문화재 3점을 비롯한 유물 . 전적(典籍)등이 소장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 93년도에 건립된 충효교육관에는 160석의 좌석에 시청각 기기등을 갖춘 교육시설과 서원의 역사와 기능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사료관이 있어 유교문화의 도장으로 그 기능을 다하고 있다.
소수서원 입구에는 학자수라는 명칭을 가진 300년에서 길게는 천년이 된 적송나무 수백그루가 서원 주변을 아름답게 지키고 있다.----겨울을 이겨내는 소나무처럼 인생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참선비가 되라고 이 소나무들을 학자수라고 부른다. 이나무들은 겉과 속이 모두 붉다 하여 적송~
소수서원 주변 학자수군락
숙수사지 당간지주 (보물 제 59호) 통일 신라시대 작품 , 절에서 석조지주 가운데
기둥을 높이 세워 깃발을 걸었던 곳
취한대 : 퇴계 이황 선생 명명 , '취한' 이란 뜻은 푸른 연화산의 산기운과 맑은 죽계의 시원한 물빛에 취하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 는 뜻에서 옛시 송취한계 (松翠寒溪)의 비취 취(翠)자와 차가울 한(寒)자에서 따옴
취한대翠寒臺 이 루대는 院生들이 詩를 짓고 學問을 討論하던 곳으로 조선 명종 5년에 풍기군수 이황선생이 세웠다. 翠寒이란 푸른 솔, 맑은 내 등 자연경관에 도취되어 호연지기를 기른다는 松翠寒溪의 뜻이다.
경렴정 : 신재 주세봉 창건. 서원담밖 , 풍광이 수려한 곳에 위치하여 시연 (詩宴)을 베풀고 , 호연지기를 가꾸던 곳 .
이 건물은 원생들이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정자로 중종 38년(1543) 주세붕周世鵬 선생(1495~1554년)이 건립하였다. 亭子名은 北宋의 철학자 염溪 周敦이를 景慕하는 뜻에서 그의 自號에서 따왔다.
정자안의 초서 현판은 퇴계 이황선생의 제자 황기로의 글씨다.
소수서원 입구
白雲洞 보물 제 1403호 : 강학당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유생들이 모여서 강의를 듣던 곳이다. 사방으로 툇마루를 둘러 놓고 배흘림 기둥 양식이 특이한 구조임 , 최초의 사립대학(私笠大學)
前廳後室의 특이한 예로서 현판이 걸린쪽이 건물 앞이 되며, 현판인 백운동은 서원의 처음 이름이다.
직방재와 일신재 : 서원의 원장과 교수가 기거하던 스승의 집무실이다.
학구재
학구재와 지락재 : 유생들이 공부하던 기숙사 자리로 학문의 숫자인 3을 상징하여 세칸으로 꾸몄고 공부 잘하라는 뜻으로 건물 입면(立面)이 한자인 工자형으로 지어져 있으며 스승의 그림자(踏師影)를 피해 뒷물림하여 지었다.
소수서원 내에는 '숙수사지 출토석조유물들'이 있다 : 숙수사는 통일신라 초기에 창건되어 안축의 '죽계 별곡'에도 언급된 사찰이나 , 세조 3년 단종 복위 운동 실패로 순흥이 혁파될 때 소실되었다. 이곳에 전시된 석등, 초석, 광배등의 부재, 서원입구의 보물 제 59호 숙수사지 당간지주와 1953년 출토되어 국립대구박물관에 소장된 금동불상 25구는 이 곳이 숙수사의 영역임을 알려주고 있다.
불상의 좌대로 보이는 석물 등
문성공묘 : 보물 제 1402호
회헌 안향 선생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후에 안보와 안축, 주세봉을 함께 모시고 매년 음력 3월, 9월 초정일(初丁日)에 제향하고 있다. 사당현판 글씨는 明使 주지번(朱之番)의 글씨임
* 담장앞에는 [숙수사지 목탑] 흔적이 남아있다.
이 건물은 조선 중종37년(1542) 풍기군수였던 주세붕선생(1495~ 1554)이 고려(918~ 1392)의 유현인 회헌 안향선생(1243~ 1306)을 기리고자 그의 연고지에 세운사당이다. 중종 39(1544)년에는 안축선생(1287~ 1348)과 안보선생(1302~ 1357)을 배향하였고, 인조 11년(1633)에는 주세붕 선생을 추향하였다. 매년 춘. 추로 사당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강학당과 문성공묘의 배치도
서원에는 학교기능의 강학당과 제사기능의 사당이 있다. 충국식은 전학후묘라 해서 학교를 앞에 세우고 사당을 뒤에 세우는 것으로 우리나라 대부분의 서원이 이 방식을 따랐지만, 소수서원은 동학서묘로서 동쪽에는 학교를 서쏙에는 사당을 세워 서쪽을 으뜸으로 삼는다는 우리나라의 전통 위차법(位次法)인 이서위상(以西爲上)을 따른 것이다.
사료관 : 사료관에는 아래 사진과 같은 강학기능의 모습과 제향기능의 모습을 모형으로 만들어 놓았으며 그곳의 역사적인 자료들이 설명과 함께 보존되었음
제향기능의 모습
강학기능의 모습 모형
영정각에는 회헌 안향선생 영정과 신재 주세붕선생 영정 퇴계 이황선생님 영정등 여러 영정이 모셔져 있다
주자 선생님의 영정과 안향 선생님( 영정은 국보 제 111호 )
주세붕 선생님의 영정( 보물 제 717호 )과 ?
퇴계 이황 선생님영정과 ?
뒤의 단청이 된 건물이 영정각이며 오른쪽 앞에 건물이 직방재
장서각 : 장서각은 오늘날의 대학 도서관으로 임금이 직접 지어 하사하신 [어제 내사본]을 비롯, 많은 장서를 보관하던 곳이다. 서책은 좌우지선(座右之先)의 예를 따라 으뜸 자리에 둔다고 스승의 숙소 우측에 세워져 있다
왼쪽 건물은 장서각 : 장서각은 오늘날의 대학 도서관으로 임금이 직접 지어 하사하신 [어제 내사본]을 비롯, 많은 장서를 보관하던 곳이다. 서책은 좌우지선(座右之先)의 예를 따라 으뜸 자리에 둔다고 스승의 숙소 우측에 세워져 있다.
* [숙수사지 목탑] 흔적이 남아있다.
전사청 : 전사청은 봉향집기(제사용그릇) 등을 보관해 두던 곳이며, 춘 . 추 제향 때마다 집사들이 제물을 마련하던 곳이다.
탁영대와 탁청지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겸암 류운용 선생이 풍기군수로 재임할 때 연못을 파고 대를 쌓았던 곳이다. (훗날 창석 이준이 군수로 부임하여 다시 판 기록이 전해옴
백운동(白雲洞) 경(敬)자 바위
백운동은 주세붕 선생이 서원을 창건할 때 중국의 白鹿洞書院을 참고하여붙인 이름으로 이황선생이 刻字 후 흰칠을 하였다. '敬'은 유교의 근본사상인 '敬天愛人'의 머리글자이다. 문헌에 의하면 주세붕선생이 조선 세조3년 (1457) 10월 단종복위운동 실패로 이 고을 사람들은 [정축지변] 이라는 참화를 당하게 되었다. 그 때 희생 당한 도호부민들의 시신이 이 곳 죽계천에 수장되면서 밤마다 억울한 넋들의 울음소리를 듣게되어 당시 풍기군수 주세붕 선생이 희생된 원혼을 달래기 위하여 주세붕선생이 직접 경(敬)자를 써서 새긴후 위에 붉은 칠을 하고 정성들여 위혼제를 드렸더니 그 후로 울음소리가 그쳤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 온다.
바위에 새겨져 있는 '白雲洞은 퇴계 이황선생 글씨로 전해 오고 붉은 색의 경자는 신재 주세봉 선생이 직접 써서 새긴 것으로 신재집에 전해오며 유교의 근본사상인 경천애인敬天愛人의 머릿글자이다.
* 순흥의 [ 단종복위운동]은 세조 3년 (1457]에 수양대군(세조) 이 단종 임금(노산군)을 쫓아 내고 왕의 자리에 오르자, 그의 친동생인 금성대군이 반대하여 이 곳 순흥에서 복위 운동을 펴다가 사전에 탄로가 나면서 많은 이들이 희생된 사건임'국내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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