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

발해~ 백제까지

백합사랑 2008. 1. 12. 09:58

남북국시대 : 는 삼국을 톨일한 신라와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가 공존했던 시기이다.

톨일신라(676- 935)는 확장한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 왕권을 강화하고 행정구역을 재정비하여 중앙집권적 전제국가로 발전하였다 . 또한 삼국문화를 통합하고 , 당과 서역 문화를 받아들여 고대 문화의 꽃을 피웠다.

한반도 북부와 만주지역을 아울렀던 발해(698- 926년)는 고구려 문화의 기반 위에서 중국 당 문화를 받아들여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하였다.

당의 통치제도를 받아들여 3성과 육부를 근간으로 편성하고 전략적 요충지에는  5경을 두었다.   그리고 여러차례  도성을 옮겼으며 주변나라와 교류하여 다양하고 수준높은 문화를 향유하였다.   남북국시대의 통일신라와 발해의 문화는 고려에 계승 되었다.

 

 

 

 발해의 용머리渤海 龍頭

건물 기단에 끼워 넣어 장식하였던 것으로, 벽면에 튼튼하게 끼워질 수 있도록 뒷부분을 쐐기 모양으로 길게 깍아내고 고정하기 위한 홈을 팠다. 상경성을 비롯한 발해의 도성에서 몇 개가 출토 되었지만 형태와 조각기법은 모두 같다. 귀밑까지 찢어진 입, 날카로운 이빨, 툭 튀어나온 두 눈, 머리에서 귀 뒷부분까지 이어진 갈퀴 등이 어떤 악귀도  얼씬하지 못할 상서로운 용의 모습이다.

 

 

 금동 관음보살 입상  , 남북극시대(발해) , 8-9세기 , 일본 도교대 소장

넓은 어깨와 튼튼한 두다리 강건한 고구려 불상의 전통이 그대로 남아 있다.

 

 

 부처 석회암 2불 병좌상 ,  남북극시대(발해) , 8-9세기 ,일본 도교대 소장 , 석가와 다보 두 여래상이 나란히 앉은 모습을 표현하였다.(불교 경전 법화경에서 유래한 것임)

 

 글씨가 있는 불비상 , 사암 ' 함화4년'  남북극(발해)시대 834년,  일본오하라미술관 소장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가르침을 듣는 승려와 보살이 새겨져 있다.    위에는 용으로 보이는 동물 두마리가 , 아래에는 글씨와 인왕상이 각각 새겨져 있다. 글씨는 함화4년 (834) 발해 허왕부의 관리였던  조문휴의 어머니가  모든 불제자들을 위해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이를 통해 발해에서는 '함화'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허왕이 관할하던 관청이 있었고 그 허왕 위에 발해 황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

 

위의 조각상의 전신의 모양을 추정한 그림

 

 

 

토용 

 토용 

 

십이지상- 쥐

 십이지상과 토용 (12지상은 방위와 시간을 맡은 12동물을 사람의 모습으로 표현한 것이다,

십이지는 방위와 시간을 맡은 쥐, 소, 호랑이,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 등 12 동물을 사람의 모습으로 표현한 것이다. 처음에 무덤안에 12지상을 넣다가 차츰 수호신으로 성격이 바뀌어 무덤 둘레에 배치하였다.  토용은 흙으로 사람이나 동물을 본떠 만든 것으로 옷이나 모자 표정등이 사실적이며 사회와 지위에 따라 색깔이나 크기를 다르게 만들었다.

 

 

 

 

돌 12지상 (원숭이) , 경북 경주 성덕왕릉 , 남북극시대 8세기 ,

12지는 초기에 무덤 둘레돌에  돋음 새김의 형식으로 새겨졌으나 성덕왕릉에서는 보다 입체감이 두들어진 독립된 조각상으로 나타난다.  갑옷을 입고 큰 칼을 잡고 서있는 형태로 불교의 사천왕상 복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왕의 무덤을 보호하고, 왕권의 위엄을 나타내는 상징물로 경덕왕(재위 742-  765) 대인 8세기 중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 금속공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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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단지 : 통일신라시대에는 불교의 영향으로 화장이 유행하여 타고남은 뼈를 담아 묻기 위한 그릇이 만들어졌다. 뼈단지로는 일상생활에서 쓰던 그릇이나 중국 청자, 당삼채등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뚜껑과  몸체를 연결하는 고리가 달린 것 .  뚜껑의 꼭지가  탑 모양을 한 항아리나 집모양을 한 것 등 형태가 다양하다. 뼈단지를 넣는 외함은 대부분 토기이지만 돌로 만들어진것도 있다.

 

 뼈단지-- 통일신라시대

 

 

 통일신라 토기

 

 

 신라

신라는 한반도 남동쪽에 있던 진한 12국 가운데 경주 지역의 사로국이 성장 발전한 나라이다.  주변의 소국을 병합하여 영토를 확장한 신라는 6세기에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받아들여 정치와 사상의 기반을 마련하고 고대국가 체제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대가야(562)를 병합하는 등 통일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신라 문화는 돌무지덧널무덤과 불교로 대표된다.  돌무지덧널무덤에서 출토된 금관, 귀고리 등은 신라를 ' 황금의 나라'로 부를 만큼 화려하고 뛰어난 세계적 금공예품이다.  불교는 골품제와 함께 신라 사회 전반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신라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하였다.

한편 경주 지역에서 출토되는 외래의 유물과  토용에서 보이는 서역 문화의 흔적은 신라의 대외 교류와 국제적인 면모를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삼국시대(신라)

 

 

 말탄사람 토기 , 삼국시대 신라 6세기 ,  경북 경주 금령총 국보 91호

 

 

삼국시대(신라) 신라의 무기

 

 

 술잔 --삼국시대(신라)

 

 

 토우 --신라

  

배모양 토기 -신라

 

 

 신라--토기의 장식

 

 

 토우 붙은 항아리 , 국보

 

 동물이 새겨진 항아리 , 삼국시대(신라) 5세기

 

 

발굴현장 재현

 

 

금속그릇, 금그릇과 은그릇 : 삼국시대 (신라)

신라에서는 흙으로 구워 만든 토기와 금 , 은 ,  청동 또는 철로 만든 그릇을 사용하였다.   금속 그릇은 권위나 신분을 상징하기 위해 만들어 쓰다가  무덤에 함께 묻었다. 사발이나 굽다리 접시  같은 작은 그릇은  금 . 금동 . 은으로 만들고  합 초두( 액체를 데워주는 그릇) 항아리 등은 주로 청동으로 만들었다.   그릇의 밑바닥이나 뚜껑에는 죽음을 애도하는 글이나  연호와 같은 글자를 새기기도 하였다.   특히 초두와 세발 솥은 고구려와 중국과  교류를 보여준다.

 

 

 굽다리 접시와 합 --은그릇--삼국시대(신라) 보물

 

 

사발과 굽다리 접시  --금그릇 - 삼국시대(신라)

 

 

 금신발--삼국시대(신라)

 

 

위의 금신발에 있는 무늬 --삼국시대(신라)

 

 

은잔 --삼국시대(신라)

 

 

 

위의 은잔의 무늬 --삼국시대(신라)

 

 

장신구 --목거리 , 삼국시대(신라)

 

 

 

 장신구 - 귀고리 ,   삼국시대(신라)

 

 

장신구 ---금 목거리 ,  삼국시대(신라)

 

 

신라 왕의 금관과 금허리장식, 삼국시대(신라)

 

가야

가야는 바다에 접해 있다는 지리적인 이점과 풍부한 철 자원을 바탕으로 중국 및 일본과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솥, 거울, 방패꾸미개, 적갈색토기, 등은 가야와 주변국가와의 국제적인  교류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가야의 꾸미개

 

 

가야의 꾸미개

 

 

 

가야의 관

 

 

가야의 관 :  관테와  풀꽃 모양 세움 장식이 있는 형태로서 나뭇가지모양 장식의 신라 금관과는  다르다.  관테의 위아래에는 점무늬와 점줄문살무늬가 새겨져 있고 둥근 달개가 달리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이다.

 

 

가야의 철 생산

 

 가야의 무기

 

 

가야의 말갖춤

 

 

 

 

 

 

 금관가야

 

 아라가야

 

 소가야

 

 대가야

 

 가야의 대외 교류

 

 삼국시대의 상형토기

 

 

 

 

 

 

백제

 

 

 백제 금동대향로  삼국시대 백제 6-7세기 충남 부여 능산리 절터 .  국보 287호

 

 

 무령왕릉

1971년 7월 1400여 년의 침묵을 깨고 무령왕릉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령왕릉에서는  무덤 주인공과 연대를 기록한 묘지와 2,900여 점의 화려하고 많은 유물이 출토되어 백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무령왕릉은 벽돌무덤으로 중국 남조의 무덤과 닮았으며,  내부에서 출토된 유물은 대부분 중국 일본과 관련 된 것 이어서 백제 문화의 국제성과 개방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관꾸미개나 귀걸이,  매장 방법 등은 백제의 고유한 전통과 특색을 지니고 있어 백제가 주체성을 가지고  외부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 들였음을 알 수 있다.

 

 

 무령왕릉에 사용 된 벽돌

 

 독널 (옹관): 삼국시대(백제) , 5세기 ,전남 영암  독널 무덤은 세계각지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등에서도 선사시대부터 나타나고 있다. 백제가 한성에 도읍하고 있을 무렵의 영산강에서 큰 독널무덤이 유행하였다. 독널은 높게 쌓은 흙 속에 묻히는데, 쌓은 흙의 형태는 긴 사다리 모양, 네모모양, 긴 네모모양, 원모양 등 무덤 박물관이라 할 만큼 다양하다. 독널무덤에서는 주로 칼, 화살촉, 창 등의 무기와 단지, 구멍단지, 접시 등의 토기 외에도 금동관과 금동신, 목걸이 등의 화려한 꾸미개와 봉황 등이 화려하게 장식된 고리자루칼이 함께 출토되는 경우도 있어 이 지역을 지배하던 실력자의 무덤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백제의 대외교류 지도

 

 백제의 대외교류

 

 백제의 철기문화

 

 백제의 금속공예

 

 

 백제의 금속공예

 

 

 

 

 

 

 

 

 백제기와의 여러가지 무늬

 

 무늬벽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