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한국사상사에 우뚝 선 위대한 고승 -원효(617~686)

백합사랑 2009. 4. 23. 11:58

1993년 6월의 문화인물

문화체육부가 한국인 재발견 운동의 하나로 추진하고 있는 6월의 문화인물에 화합과 대중교화에 힘쓴 민족사상가 원효(元曉)(617~686)대사가 선정되었다.

화쟁사상 등을 창조해 당나라. 일본 등에도 큰 영향을 미쳤던 그는 100여부 240여권에 달하는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왕실중심의 귀족화된 불교를 민중불교로 바꾸는데 크게 공헌한 인물이다.   원효의 생애와 사상을 통해 그의 고귀한 뜻을 되새겨 본다.

'제2의 붓다'로 불리는 '용수(龍樹)'에 비견되는 원효(元曉)(617~686)는 해방자였고 자유인이었다. 

 시대와 민족과 종교의 벽을 뛰어넘는 '보편성'에 입각하여 그는 인간이 온갖 사슬과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진정한 자유를 누려야  함을 이론적으로 밝혔을 뿐 아니라 온 몸으로 구현했다.

  천부적 재능과 불같은 열정, 냉철한 비판력,  그리고 뛰어난 문장력을  두루 갖춘 대학자 원효는 한국불교의 토대를 마련한 인물로서 중국과 일본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가 파헤쳐 보여주고 있는 마음의 세계와 화쟁(和諍)의 논리, 그리고 자유인의 몸짓 등은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각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원효는 압량불지촌(押梁  佛地村. 지금의 경북 경산군 자인면)의 한 하층귀족인 설(薛)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유성(流星)이 품속으로 들어오는 태몽의 소유자였던 그가 세상에 나오던 날에는 오색구름이 주위를 덮었다고 한다. 원효의 집은 본래 율곡의 서남쪽에 있었다고 전하나 , 어머니가 원효를 배고 이 골짜기를 지나다가 갑자기 산기가 있어 집에 들어갈 사이도 없이 밤나무 밑에서 출산을 하여 이 나무를 사라수(娑羅樹)라 불렀다고 전한다. 또 밤이 이상하게 커서  이를 사람밤(娑羅栗)이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서당(誓幢)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던 원효의 어린 시절에 관한 기록이 거의 없어 출가 시기와 동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화랑의 무리에 속하였다가 깨달은 바가 있어 출가할 것을 결심하고 자기집을 헐어 초개사(初開寺)라는 절을 세웠고, 648년에 황룡사에서  승이 되어 각종 불전을 섭렵하며 수도에 정진하였다고 전해질 뿐이다.

 당시 사회상은 당나라와의 처절한 싸움을 벌이고 있을 때였고, 공인된지 1백년도 않된 불교계는 귀족화하여 중생들과 거리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그도 당시 불승들이 유행처럼 떠나던 당나라 유학길에 오르나 고구려 국경을 통과하다 순라군들에게 잡혀 겨우 목숨을 건지고 돌아왔다.

  그 10년 후 원효는 44살의 나이에 첫번째와 마찬가지로  의상(義湘)과 함께 두번째 당나라 유학을 시도한다.

 두 사람이 남양만 언저리에 이르렀을 때 심한 폭우를 만나 이를 피하기 위해 길 옆의 움막에 들었다. 다음 날 날이 밝아보니 움막은 해골이 뒹굴고 있는 무덤이었다.  그 다음날도 폭우가 그치지 않아 무덤에 머물 수밖에 없던 원효는 온갖 잡귀들이 어른거리고 잡생각이 들어 잠을 자지 못하고 뜬눈으로 지새웠다.

 그 다음날은 맑았다.  의상은 짐을 꾸리며 원효에게 당나라행을 재촉했다. 그러자 원효는 전날의 잠자리는 움막이라 편했는데 지난밤의 잠자리는무덤이라 편하지 않았다며, 움막과 무덤이 둘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갖가지 잡념에 괴로워했던 것은 오직  마음에 달려있다는 깨달음을 피력한 뒤 의상 혼자 당나라로 가게 하고 헤어져 돌아왔다. (연수의 <종경록>에는 무덤 속에서 시체가 썩어 고인 물을 마신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 원효는 비로소 번뇌 속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그후 원효의 행적은 자유분방 그대로였다. 때로는 술집에 들어가 기생들을 희롱하기도 하고, 때로는 여염집에 들어가 살기도 하고, 때로는 산 속에서 좌선을 하기도 했다.

  원효는 어느날 상례에서 벗어나 거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허락하려나. 내 하늘 바칠 기둥을 다듬고자 하노니"

 사람들은 아무도 이 노래의 의미를 몰랐는데, 태종은 이를 듣고 귀부인을 얻어 아들을 낳겠다는 뜻이라며 그를 요석궁으로 불러오게 했다.

 원효는 일부러 물에 빠져 옷을 적신 다음 요석궁으로 끌려와 옷을 갈아입고 그곳에 머물렀고, 과부였던 요석공주와 통정을 하여 아들 설총(薛聰)을 낳게  했다.

  이렇게 파계한 원효는 승복을 벗고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로 부르며 더욱 기행을 벌였다.

  원효의 실계(失戒)는 불교를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었다.   더 열심히 학문을 정진했고 , 더욱 자유롭게 교화활동을 펼쳤다.

   그 예로 어느날 한 광대가 이상한 모양을 한 큰 표주박을 가지고 춤추는 놀이를 구경하고는 깨달은바가 있어 광대와 같은 복장을 하고 불교의 이치를 노래로 지어 세상에 유포시킴으로써 부처님의 가르침을 무식한 대중에게까지 잘 알 수 있도록 했다.

  또 그는 사랑의 열병에 시달리던 엄장(嚴莊)이 그에게 도를 구함에 쟁관법(錚觀琺)을 만들어 지도했고, 문무왕 2년에 군사에 관한 암호문서의 의미를 해석해 줌으로써 김유신이 이끌던 신라군을 위기로부터 구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세상살이를 두루 섭렵하며 삶의 폭을 깊고도 넓게했던 원효는 만년까지 학문연구를 계속하며 1백여부  2백40여권에 이르는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는 55세에 행명사(行名寺)에서 <판비량론>을 저술했고, 분황사에서는 <화엄경소>를 지었다.

<금강삼매경론>과 <대승기신론소>가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데, 특히 <금강삼매경론>찬술에 얽힌 설화는 그의 학문적 기행을 짐작케 한다.

  국왕이 1백명의 고승대덕(高僧大德)을 초청하여 인왕경대회를 열었을 때 원효를 천거하자 일부 승려들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은 뒤 왕후가 종기를 앓게 되었는데, 아무리 좋은 영약을 써도 낫지 않자 어명을 받고 당나라로 약을 구하러간 사신들은 <금강삼매경>을 갖고 돌아왔다.

  그러나 이를 강론할 사람이 없어 결국 원효가 강론을 부탁받게 된다.

  강론을 맡게된 원효는 우차를 준비케 하고 소뿔 사이에 벼루를 놓고 요론을 적으면서 경주로 왔다.   모두 8권으로 만들어진 요론은  시기하는 무리들이 훔쳐갔고, 그는 다시 밤을 새며 3권을 완성하여 황룡사에서 설법을 했다.

  왕을 비롯한 왕비와 왕자. 공주, 그리고 여러 대신들과 전국의 절에서 온 명망 높은 고승들 앞에서 원효는 흐르는 물처럼 도도하고 질서정연한 논리로 <금강삼매경>의 강해를 설파해 나가자 수천명의 참석자들의 입에서는 찬탄의 소리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강론을 끝낸 원효는 "지난날 나라에서 백개의 서까래를 구할 때에는 그 속에 끼일 수 없더니, 오늘 아침 단 한개의 대들보를 가로지르는 마당에서는 나혼자 그 일을 하는구나 "라고 독백했다. 이 말을 들은 고승들은 부끄러워 하면서 깊이 뉘우쳤다고 한다.

  원효의 사상은 너무 다양하여 쉽게 헤아리기는 어렵지만 항상 '하나'라는 구심점을 향하였고, 화쟁과 자유를 제창하였다.

  일심(一心)은 모든 것의 근원이요, 평등무차별하므로 다를 이유가 없다는 것.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다툼질이 생긴다는 것이다.

  화쟁은 그의  저서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에 잘나타나 있는데, 요약하면 나는 옳고 남은 그르다 하며 또 나는 그러하나 남들은 그러하지 않다고 고집을 부리는데서 논쟁이 일어난다. 바로 이런 고집을 용해시키고 바른 견해를 갖게 하는 것이 화쟁이다.

  원효의 자유사상은 그의 기행적 사생활에 잘 나타나 있다.    "일체의 걸림이 없는 사람은 단번에 생사를 벗어난다"며 그는 어느 종파에도 치우치지 않고 일심과 일승의 바탕에서 스스로 철저한 자유인으로 살았다.

  원효의 일생은 결코 고답적이 아니요, 현실을 외면하지 아니했다.

  밤을 지새우는 학문생활로, 거리를 누비는 교화의 길로 그는 686년(신문왕 6년)3월 30일 70년의 빛나는 생애를 깊은 산속의 한 혈사(穴寺)에서 마감했다.

   삼국간의 전쟁도 끝나고 당나라 군사가 물러간지도 10년이 지나 온 강토에 평화로움이 피어나  무르 익을 때 , 그는 조용히 사바세계를 떠나  피안의 세계로 입적했던 것이다.

 

 

글 /  (글을 쓴분을 소개하지 않고 다만 이런 글자가  있는데 제가 모르는 한문입니다.

출처/ 1993년 6월 2일자 문화일보 에서

 

 

 

 

 일연이 원효의 전기를 기록한 삼국유사 원효 불기조

 

 

 

 <무량수경종요>의 책함

 

 무량수경종요

 

 원효스님이 <화엄경소>를 지었던 분황사 탑

 

 

 

오래전에 상영했던 원효대사 영화 화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