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신라말 선승이자 풍수의 대가

백합사랑 2009. 4. 23. 21:18

7월의 문화인물

전남 승주 선암사에 봉안된 도선의 영정

도선(道詵 827~898)

불교적 지덕사상(地德思想)에 바탕을 두면서도 민족특유의 풍수지리설을 개발한 신라말기의 대표적 고승 도선이 7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됐다.   도선의 삶과 업적을 재조명해 본다.

 

[좋은 뜻을 갖고 있다고 해도  낡은 부대에 새술을 담을 수는 없는 법이다.  또 이성적인 합의가 불가능한 직관의 영역에서는 도인이 하나 나타나면  그 그늘에서 독버섯이 비온뒤 죽순 돋듯 하는 법이다.  말길이 끊기는 곳에서는 입을 다무는 것이 상책이다](<창작과 비평> 94년  봄호 윤구병의 서평 [바람도 바람 나름 물도 물 나름] 중에서).

[풍수는 땅의 질서와 인간의 논리 사이에서 벌어지는 여러 문제점과 갈등 속에서 합치점을 찾고자 하는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땅에 관한 지혜이다..... 진정한 우리 것이어야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있다.  민족적 특수성을 가진 지리학의 한국화를 풍수를 통해 이룰 수 있다 ] (<녹색평론>  94년 5~6월호 최창조의 글 [풍수비판에 대하여 ] 중에서).   한때 논쟁이 거의 없던 우리 학계 풍토에서 신선한 자극을 주며 나름대로 뜨거운 공방전을 펼쳤던 [풍수가 학문이냐- 잡술이냐]의 논쟁 가운데 대표적인 [비판]과 [반박] 글을 굳이 길게 인용한 까닭은 아직도  묘를 쓸  때 풍수를 믿는 사람이 72%(한국여성단체협의회의 최근 설문조사 결과)나  된다는 엄연한 현실과 논쟁할 가치가 있을만큼 우리 지성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다.

애초 중국에서 발원한 것으로 알려진 이런 풍수사상이 신라말기에 우리나라에 들어왔으며, 그 이론적 토대를 만든 사람이 신라시대 선승 도선 이라는게 통설이다.

 

도선은 누구인가?

 명주 꿈 안고 출생

도선을 둘러싼 얘기는 분분하지만 신라 말기 어수선한 사회에 나름대로 영향력을 행사하던 지성인이었다는데는 대체적으로 뜻을 같이하는 것 같다.

속성이 김씨인 도선은 신라가 통일로 문화의 절정기를 누렸다가 점차 내리막길을 걷고있던  827년 전남 영암에서 [어떤 사람이 준 맑은 구슬(明珠)을 먹은 후 잉태]한 태몽을 안고 태어났다.

젖먹이 시절부터 여느 아이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는 도선은 [맵고 냄새나는 채소와 비린 음식을 싫어하고 경전을 지송하며 염불을 일삼았다]는 어머니의 태교가 영향을 끼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열 다섯 나이에 월유산 화엄사에서 머리를 깍고 불문으로 들어간다.

화엄사에서 사미과정을 거치는 동안  그는 공부한지 오래지 않아 방대한 화엄경을 통달하였는데, 특히 문수보살의  미묘한 지혜와 보현보살의  심오한 실천철학에 심취, 그 뜻을 깨우쳐 함께 공부하던 학도들은 물론 스승과 대덕스님들로부터 총명함에 대한 칭찬을 받았다 

  스무살 되던 해 어느날 그는  홀연히 깨달은 바가 있어 [대장부가 불법을 공부하여 마땅히 교법의 집착을 떠나 스스로 적정(寂靜)의 열반을 얻어야지, 어찌 구차스럽게 글자에만 매달려 있겠는가]는 말을 남기고 화엄사를 떠나 구도의 길에 오른다.

  이때 그는 중국에서 남종선을 공부하고 돌아와 구산선문의 하나인 동리산(桐理山) 태안사 . (전남 곡성에 있음)에서 선법을 가르치고 있던 혜철선사를 찾아가 가르침을 구한다.   850년 혜철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도선은 이미 진리를 깨우친 상태라 한곳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어 스승의 곁을  떠나 실천수도의 길에 오른다.   그런 가운데 지리산에 암자를 짓고 지내던 어느날 어떤 이가 찾아와 그에게 이런 말을 하고 금새 사라졌다고 한다.[내게 작은 술법이 있어 스님께 드리려 하니 다음날 남해 물가로 오십시요]  도선이 약속한 대로 그날 그곳에 가보니 과연 그 사람도 와있었는데, 그 사람은 그곳에 있는 모래를 모아 우리나라의 산과 강을 입체적으로 나타낸 지도를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도선이 산과  강의 기운이 순조롭게 뻗은 형세와 거슬러 흐른 형세가 너무도 분명한 지도를 보고, 감탄하고 있는 동안 그 사람은 또 자취를 감춰버렸다고 한다.

  그곳이 지금의 전남 구례 화엄사 아래 있는 사도촌(沙圖村)으로 도선은 몇날며칠을 그 지도를 보고 탐구해 음양오행의 이치를 깨달았다고 한다.

 도선이 풍수의 대가로도 크게 이름을 떨치게 되는 첫 출발을 알리는 일화이다.

명성 자자해 제자 몰려

그후 도선은 광양의 백계산에 이르렀다가 한 옛절에 이끌려 그곳에 자리잡고 머믈게 되는데, 그 절이 바로 옥룡사(玉龍寺)로 도선은 법당과 요사채를 늘리고 고쳐 사방에서 소문을 듣고 모여드는 제자들을 가르친다.    곧 그의 명성은 곧  온 나라에 퍼졌고, 마침내 왕궁에까지  알려져 헌강왕의 부름을 받아 신묘한 선법으로 임금의 마음을 활짝 열기도 했다.   며칠간 왕을 중심으로 불법을 펼치던 그는 왕의 만류를 뿌리치고 돌연 옥룡사의 제자들 곁으로 돌아왔다. 

그러고 898년 어느날 그는 제자들을 불러 모았다.

[나는 이제 가려고 한다. 인연을 따라 왔다가 인연이 다하면 가는 것이 곧 불변의 이치인데 어찌 이곳에 오래 머물 수 있겠는가]

 이 말을 남기고 도선은 그 자리에서 곧 바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풍수설이라는 게 주술적 언어의 사용으로 인해 도선이라는 인물에 대해 여러가지 설이 존재하고 있고,  역사적 실재인물이라기 보다는 신화적 존재로까지 파악되기도 한다.   도선에 대한 신비감을 더욱 높여준 사람은 고려  태조.

 875년에 도선은 [지금부터 2년 뒤에 반드시 고귀한 사람이 태어날 것이다]고 예언했는데, 그 예언대로 송악에서 태조가 태어났다는 것 . 

  이 예언으로 인해 태조는 열렬한 도선의 풍수사상 신봉자가 됐으며, 당시 민간에게 널리 유포돼있던 <도선비가(道詵秘記)>에도 대단한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태조의 도선에 대한 애정은 후세 왕을 위해 남긴 <훈요십조> 두번째 조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여기 새로 된 절은 모두 도선이 산수지리의 순조로움과 거슬림을 점쳐서 개창했다.  도선은 [내가 점쳐서 정한 곳 이외의 땅에 함부로 절을 지으면 지덕(地德)을 손상시키고, 따라서 왕조가 오래가지 못하리라......]   이 일로 인해 태조는 물론이거니와 이후의 고려왕들은 도선을 극진히 존경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도선의 참모습이 선승으로서보다는 풍수가로서 더 알려지게 됐고, 다소 과대포장되거나 윤색됐을 가능성에서 신비적인 인물로 비춰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도선은 풍수지리와 음향오행을 통해 불교를 가꾸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불교에서 매우 중요한 일로 여겨지는 수도처를 정하는 일에 있어서 지리와 풍수를 따져 신중을 기하였고, 또 세상을 교화하려는 자세에서 당시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개성적인 지성인이었음에 틀림없는 것 같다.

 도선이 남긴 것으로 전해지는 저서에는 <도선비기>를 비롯<송악명당기(松岳明堂記)> <삼각산명당기(三角山明堂記)> > 등이 있다.

 

 

 

도선이 풍수설에 의해 위치를 정해줬다는 비보사찰중 운암사, 용암사와 더불어 3대 비보사찰로 꼽히며 유일하게 남아있는선암사

 

 

전남 구례 연곡사에 있는 부도로 도선의 부도로 전해지고 있지만 확실치 않다 

 

글/  (글을 쓴분을 소개하지 않고 다만 이런 글자가  있는데 제가 모르는 한문입니다

출처/ 1996년 문화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