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선(禪)이란 ?--선가구감을 통해서 배우는 禪 !

백합사랑 2010. 12. 16. 21:03

내가 10대 때 애독했던 책 선가구감을 다시 읽어봅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선에 대해 짤막하게 생각해 봅니다.

 불교는 단순히 믿음(信仰)을 요구하는 종교가 아니고, 깨달음을 가르치는 법문(法門)입니다.

따라서 깨닫기 위하여 닦아가는 방법의 하나인 선(禪)이야말로 모든 형식과 법칙에서 뛰어난 가장 자유로운 큰 길이라 생각합니다.

선(禪)이란 범어(梵語)로 디야아나(dhyana), 속어(俗語)로는 자아나(jhana)의 음을 중국에서 선나((禪那)로, 다시 줄여서 선(禪)으로 써 왔는데, 그 의미는 [고요히  생각함(靜慮)] [생각하여 닦음(思惟修)]이라는 뜻으로.

이는 곧 생각을 가라앉혀 산란치 않게 하는 것이므로 정(定)이라 번역하고, 둘을 합하여 선정(禪定)이라고도 합니다.

생각을 고요히 하여 정신을 통일한다는 수행은 불교의 어느 종파에서고 하는 일이지만 , 선종(禪宗)에서는 특히 이 [선]을 소중히 여깁니다. 

이러한  선(禪)에 관해 알고자 한다면 청허스님(서산대사님)이 지으신 선가구감이 좋은 본보기가 된다고 믿습니다.

물론 선가귀감은 청허스님 자신이 지은 <서문>과 그의 제자인 사명 스님(임진왜란 때 일본에 가셔서 불속의 방에서 얼음빙-氷-로 방을 춥게 만들으신 법력을 보이신 스님으로 유명하신 분)문에 있는 바와 같이 청허스님(서산대사님) 혼자 쓰신 창작글은 아니고 대장경과 조사(祖師)의 어록(語錄) 가운데서 요긴 한 것을 추려 모은  것으로서, 처음에는 원문만 써놓았다가 다시 원문마다 주해(註解)를 달고, 더러는 송(頌)이나 평(評)도 붙어 있습니다.

 

시간 나는대로 선가구감을 조금씩 옮겨 보려합니다.

생각만해도 기분 좋아지는 책 선가구감!

내 어릴때 한 번 읽어보고 묘한 이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마치 나도 곧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을 했었죠.

그러나 현실은 날이 갈 수록 더더욱 미해만 가고   있습니다.

오늘 문득 선가귀감이 생각났고  그 책을  읽으면 그 옛날 내가 황홀했던 그 순간을 다시 맛볼 수 있을까 ? 하는 기대감에 섯불리 책장을 넘길 수 없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음미하며 읽어나가렵니다.

 

禪家龜鑑은 1579년에 처음 원문인 한문으로 판각된 것을 비롯하여, 그 뒤 여러 곳에서 한문본과 언해본이 판각. 간행되었었는데 그 뒤 한참동안 재간  요청이 있었음에도 절판된 채 있다가  선학원 석주스님(지금은 열반 하신분)의 원력으로 법통사 문 사장님의 신심으로  다시 나오게 된 것이라고 서문에 적혀 있습니다.

 

이 책은 아주 오래전에 나무사랑이  참 좋아했던 친구에게 선물로  받은 책입니다.

 

有一物於此하니 從本以來로 昭昭靈靈하야 不曾生不曾滅이라 名不得狀不得이로다.

여기 한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하여, 난 것도 아니며 죽음도 없었다. 이름 지을길 없고 , 모양 그릴 수도 없다.

佛祖出世가 無風起浪이니라  然이나 法有多義하고 人有多機하니 不妨施設이로다.

부처님과 조사가 세상에 나오심이 마치 바람 없는 데 물결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법에도 여러가지 뜻이 있고 사람에게도 온갖 바탕이 있는 터이라, 여러가지 방편을 벌리지 않을 수 없다.

强立種種名字하야 或心或佛或衆生이라하나 不可守名而生解니 當體便是라 動念卽乖니라

억지로  여러가지 이름을 붙여서 마음이라 부처라 중생이라 하였으나, 이름에 얽매여서 알음알이 낼 것이 아니다.  다 그대로 옳은 것이다. 한 생각이라도 일으키게 되면 곧 어기어 버린다.

世尊이 三處傳心者는 爲禪旨요 一代所說者는 爲敎門이라 故로 曰, 禪是佛心이요 敎是佛語니라

세존께서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하신 것이 선지가 되고, 부처님의 일생에 말씀하신 것이 교문이 되었다. 그러므로 [선]은부처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是故로 若人이 失之於口則拈花微笑가 皆是敎迹이요 得之於心則世間추(클추)言細語가 皆是敎外別傳禪旨니라

그러므로 만약 누구나 말에서 잃어버리게 되면 꽃을 드신 것이나 빙긋이 웃은 것이 모두 교의 자취만 될 것이요. 마음에서 얻으면 세상의 온갖 잡담이라도 모두 교 밖에 따로 전한 선지가 될 것이다.

吾有一言하니 絶廬忘緣하고 兀(우뚝할올)然無事坐하니 春來草自靑이로다

내가  한 마디 말하려 한다. 생각 끊고 반연 쉬고 일없이 우두커니 앉았더니, 봄이 오매 풀이 절로 푸르구나.

敎門은 惟傳一心法하고 禪門은 惟傳見性法하니라

교문에는 오직 한 마음 법만을 전하고, 선문에는단지 견성 하는 법만을 전하였다.

然이나 諸佛說經은 先分別諸法하고 後說畢竟空하되 祖師示句는 迹絶於意地하고 理顯於心源이니라

그러나 부처님이 말씀하신 경에는 먼저 모든 법을 가려 보이시고, 나중에 빈 이치를말씀하셨으며 조사들의 가르치심은 자취가 생각에서 끊어지고 이치가 마음 근원에 드러났느니라.

諸佛은說弓하시고 祖師는 說絃하시니 佛說無碍之法은方歸一味라 拂此一味之迹하야사 方現祖師所示一心이라 故로 云.庭前栢樹子話는 龍藏所未有底라하니라

부처님은 활같이 말씀하시고, 조사들은 활줄같이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가운데 걸림없는 법이란 것이 겨우 한 맛에 돌아가는 것이요. 이 한 맛의 자취를 떨어 버려야 바야흐로 조사가 보이신 한 마음을 드러내게 되는것이다.그러므로[뜰 앞에 잣나무이니라] 한 화두는용궁의 장경에도 없는 것이라고 말한  바이다.

故로 學者는 先以如實言敎로 委辨不變隨緣二義가 是自心之性相이며 頓悟漸修兩門은 是自行之始終한 然後에 放下敎義하고  但將自心現前一念하야 參詳禪旨則必有所得하리니 所謂出身活路니라.

그러므로 학자는 먼저 부처님의 참다운 가르침으로써 변하지 않는 것과 인연 따르는 두 가지 뜻이 내 마음의 본 바탕과 형상이며. 단박 깨치고 오래 닦는 두 가지 문은 공부의 시작과 끝임을 자세히 가려 안 뒤에 , 교의 뜻을 내버리고 오로지 그 마음이 뚜렷이 드러난 한 생각으로써 참선한다면, 반드시 얻는 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뛰어나 살 길 이니라.

大低學者는 須參活句요 莫參死句어다.

대체로 배우는 이들은 산 말을참구할  것이요, 죽은 말을  참구하지 말아야 한다.

凡本參公案上에  切心做工夫하되 如鷄抱卵하며 如猫捕鼠하며 如飢思食하며 如渴思水하며 如兒憶母하면 必有透徹之期하리라

자기가  참구하는 공안에 대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공부하기를 마치 닭이 알을 안는 것과 같이 하며,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와 같이 하고, 주린 사람이 밥 생각하듯 하며 목마른 사람이 물 생각하듯 하고, 아기가 어머니 생각하듯 하면 반드시 꿰뚫을 때가 있으리라.

參禪엔 須具三要니 一은 有大信根이요 二는 有大憤志이요  三은 有大疑情이니 苟闕其一하면  如折足之鼎하야 終成廢器니라

참선하는데는 반드시 세 가지 요긴한 것이 있어야 한다. 첫째는 큰 신심이요,. 둘째는 큰 분심이요. 세째는 큰 의심이니, 만약 그 속에 하나라도 빠지면 다리 부러진 솥과 같아서 소용없이 되고 말 것이다.

日用應緣處에 只擧狗子無佛性話하야 擧來擧去하며 疑來疑去에 覺得沒理路沒義路沒滋味하야 心頭熱悶時가 便是當人放身命處며 亦是成佛作祖底基本也니라

밤낮으로 무슨 일을 하면서든지 오직 [개가 불성이 없다]고 한 화두를 들어서 생각하고 생각하여 와서, 이치의 길이 끊어지고 뜻 길이 없어져 아무 맛도 없어지고 마음이 답답할 때가, 곧 그 사람의 몸과 목숨을 내던질 곳이며. 또한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되는 대목인 것이다.

 話頭는 不得擧起處에 承當하며 不得思量卜度하며 又不得將迷待悟니 就不可思量處햐야 思量하면 心無所之가 如老鼠入牛角하야 便見倒斷也리라  又尋常에 計較安排底도 是識情이며 隨生死遷流底도 是識情이며 파(두려워할파)怖장(두려울장)惶底도  是識情이어늘 今人이 不知是病하고 只管在裡許하야 頭出頭沒하나니라

화두는 들어 일으키는 곳에서 알아 맞히려 하지도 말고, 생각으로 헤아리지도 말며, 또한 깨닫기를 기다리지도 말며, 더 생각할 수 없는 곳에까지 나아가 생각하면, 마음이 더 갈 곳이 없어서 마치 늙은 쥐가 쇠뿔에 들어가다가 꼭 잡히듯 할 것이다. 이런가저런가  따지고 맞히어 보는 것이 식정 이며. 나고 죽음에 따라 굴러다니는  것이 식정이며, 무서워하고 갈팡질팡하는 것도 또한 식정이다.  지금 사람들은 이 병통을 아지 못하고,  오직 이 속에서 빠졌다 솟았다 할뿐이로구나!

此事는 如蚊子가 上鐵牛하야 更不問如何若何하고  下嘴(부리취)不得處에  棄命一撰하야  和身透入이니라  

이 일은 마치 모기가 무쇠로 된 소에게 덤벼들듯, 덮어놓고 주둥이를 댈 수 없는 곳에 목숨을 매어놓고 한 번 뚫어 보면, 몸뚱이째 사뭇 들어갈 때가 있으리라.

工夫는 如調絃之法하야 緊緩을 得其中이니 勤則近執着이요   忘則落無明하리니 惺惺歷歷하며 密密綿綿이니라

공부는 거문고의 줄을 고루는데 팽팽하고 늦은 것이 알맞아야 하는 것 같아서, 너무 애쓰면 병나기 쉽고 잊어버리면 거두어 잡을 수 없거나 어둠 속에 빠지게 된다.   오직 생생하고 똑똑하게 하면서도 차근차근 끊임없이 하여야 한다.

工夫가 到行不知行하며 坐不知坐하면 當此之時하야 八萬四千魔軍이 在六根門頭伺候라가 隨心生起하나니  心若不起하면  爭如之何리요

공부가 걸어가면서도 걷는 줄 모르고 앉아도 앉은 줄 모르게 되면, 이 때를 당하여 팔만 사천 마군의 떼가 육근 문 앞에 지키고 있다가, 마음을 따라 온갖 꾀를 낼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무슨 상관이 있으랴.

起心은 是天魔요 不起心은 是陰魔요 或起或不起는 是煩惱魔니 然이나 我正法中엔 本無如是事니라

일어나는 마음은 천마요 일지  않는 마음은 음마요.  일기도 하고 일지 않기도 하는 것은 번뇌마다 그러나 우리 바른 법 가운데에는 본래 그런 일이 없느니라

工夫가 若打成一片則縱今生에 透不得이라도  眼光落地之時에 不爲惡業所索이니라

공부가 만일 한 조각을 이룬다면 비록 금생에 깨치지 못하더라도, 마지막 눈감을 때에 나쁜 업에 끌리지 않을  것이다.

大抵參禪者는 還知四恩이 深厚마아 還知四大醜身이 念念衰오(흙손오)마(잘마)아 還知人命이 在呼吸마아 生來値遇佛祖마아 及聞無上法하야 生希有心마아 不離僧堂하야   守節마아  不與隣單으로 雜話마아 切忌鼓扇是非마아  話頭가 十二時中에 明明不昧마아 對人接話時에 無間斷마아 見聞覺知時에 打成一片마아 返觀自己하야  捉敗佛祖마아 今生에 決定續佛慧命마아  起坐便宜時에 還思地獄苦마아 此一報身이 定脫輪廻마아 當八風境하야 心不動마아  此是參禪人의 日用中點檢底道理니라  古人云, 此身不向今生度하면 更待何生度此身이리요하니라

참선하는 이는 늘 생각하기를 네 가지 은혜가 깊고 높은 것을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는가? 네가지로 된 더러운 이 몸이 생각생각에 썩어 가는 것을 알고 있는가?  사람의 목숨이 숨 한번에 달린 것을 알고 있는가? 부처님이나 조사 같은 이를 만나고도 그대로 지나치지 않았는가?  가장 높고 거룩한 법을 듣고 기쁘고 다행한 생각을 잠시라도 잊어버리지 않았는가?   공부하는 곳을 떠나지 않고 도인다운 절개를 지키고 있는가? 곁에 있는 사람들과 잡담이나 하고 지내지 않는가?  분주하게 시비를 일으키고 있지나 않는가?   화두가 어느 때나 똑똑히 들리고 있는가? 이야기할 때에도  화두가 끊임없이 되는가?  보고 듣고 온갖 감각이 있을 때에 한 조각을 이루고 있는가?  제 공부를 돌아보아 부처와 조사를 붙잡을 만한가? 금생에 결정코 부처님의 지혜 목숨을 이을 수 있을까?  앉고 눕고 편할 때에 지옥 고생을 생각하는가?  이 한세상 이몸으로 반드시 윤회를 벗어나게 될까?  여덟 가지 바람이  불어올 때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가?  이것이 참선하는 이들의 공부하여 가면서 때때로 점검하여야 할 도리이다. 옛 어른이 말씀하기를 [이몸 이때 못 건지면 다시 언제 건져 보랴!] 하였느니라.

學語之가 說時似悟나 對境還迷하니 所謂言行이 相違者也라 

말을 배우는 무리들은 말할 때에는 깨친 듯하다가도 실지 경계를 당하게 되면 그만 아득 캄캄하게 되니, 이른바  말과 행실이 서로 틀린다는 것이다. 

 若欲敵生死인댄 須得這一念子를 爆地一破하야사 方了得生死니라 

만일 나고 죽음을 막아내려면 이 한 생각을 [탁!] 한 번 깨뜨려야만 바야흐로 나고 죽음이 아주 끊어지리라

 然이나 一念子를 爆地一破然後에 須訪明師하야  決擇正眼이니라

그러나 한 생각을 [탁!] 하고 한번 깨친 뒤에라도 반드시 밝은 스승을 찾아가서 눈알이 바른가 검사를 받아야 한다!

古德이 云, 只貴子眼正이요  不貴汝行履處라하니라

옛 어른이 말씀하기를 다만 너의 눈 바른 것만 귀하게 여길 뿐이지, 너의 행실은 보려고 하지 않노라 하였다.

願諸道者는 深信自心하야  不自屈不自高니라

바라건대 공부하는  이들은 자기의 마음을 깊이 믿어서, 스스로 굽히지도 말고 스스로 높이지도 말아야 한다.

迷心修道하면 但助無明이니라

마음을 모르고 도를 닦는다는 것은 오직 무명만 도와주는  것이다.

修行之要는 但盡凡情이언정  別無聖解니라

닦아가는 알맹이는 다만 범부의 생각이 떨어질 뿐이고, 별로 성인의 알음알이가 없는 것이다

不用捨衆生心이요  但莫染汚自性하라 求正法이 是邪니라

중생의 마음을 버릴 것 없이, 다만 제 성품을 더럽히지 말라.바른 법을 찾는 것이 곧 바르지 못한 것이니라.  

斷煩惱가 名二乘이요 煩惱不生이 名大涅槃이니라

번뇌를 끊는 것이 이승이요,  번뇌가 나지 않는 것이 큰 열반이니라

須虛懷自照하야 信一念緣起無生하며

모름지기 마음 속을 비우고 스스로 비추어 보아, 한 생각 인연 따라 일어나는 것이 나는 것 없는 줄을 믿어야 한다.

諦觀殺盜淫妄이 從一心上起하면 當處便寂이라  何須更斷이리요.

죽이는 것이나, 도둑질하는 것이나, 음난한 것, 거짓말하는 것이 다 한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자세히 살펴 보라. 그 일어나는 곳이 곧 비어 없는데 무엇을 다시 끊으랴!

知幻卽離라 不作方便이요 離幻則覺이라 亦無漸次니라

환상인 줄 알면 곧 여윈 것이라 더 방편 지을 것이 없고, 환상을 여의면 곧 깨친 것이라 또한 닦아 갈 것도 없는 것이다.

衆生이 於無生中에 妄見生死涅槃이 如見空花起滅이요

중생이 나는 것이 없는 가운데서 망녕되게 생사와 열반을 보는 것이, 마치 꽃이 허공에서 서불거림을 보는 것 같다.

菩薩이 度衆生入滅度나 又實無衆生이 得滅度니라

보살이 중생을 건져서 열반에 들게 하였다  하더라도, 실로 열반을 얻은 중생이 없느니라.

理雖頓悟나 事非頓除니라

이치는 비록 단박깨쳤으나, 버릇은 한꺼번에 가시어지지 않는다.

帶淫修禪은 如蒸沙作飯이요 帶殺修禪은 如塞耳叫聲이요 帶倫修禪은 如漏이求滿이요 帶妄修禪은 如刻糞爲香이니 腫有多智하고 皆成魔道니라

음란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모래를 쪄서 밥을 지으려는 것 같고, 살생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제 귀를 막고 소리를 지르는 것 같으며, 도둑질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새는 그릇에 물 차기를 바라는 것 같고, 거짓말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똥으로써 향을 만들려는 것과 같다.  이런 것들은 비록 많은 지혜가 있더라도 다 악마의 길을 이룰 뿐이다.

無德之人은 不依佛戒히며 不護三業하고 放逸懈怠하야  輕慢他人하며 較量是非로 而爲根本하나니

덕이 없는 사람은 부처님 계율을 내던지고  삼업을 삼가지 아니하고 함부로 놀아 게을리 지내며, 남을 우습게 보아서 따지고 시비하는 것으로만 일삼고 있다. 

若不持戒하면 尙不得疥癩野干之身이온 況淸淨菩提果를 乎아

만약 계행이 없으면 비리먹은 여우의 몸도 받지 못한다 하였거든,  하물며 깨끗한 부처의 열매를 바랄 수 있으랴

欲脫生死인댄 先斷貪欲과 及除愛渴이니라

나고 죽는 데서 벗어나려면 먼저 탐욕과 애정의 불꽃을 꺼버려야 한다.   

無碍淸淨慧가 皆因禪定生이니라

걸림없는 맑은 지혜가 다 선정에서 나온다.

心이 在定則能知世間生滅諸相하나니라

마음이 정 속에 있게 되면 , 능히 세간의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모든 일을 , 다 밝게 알게 되는 것이다.

見境心不起가 名不生이요 不生이 名無念이요 無念이 名解脫이니라

현실 경계를  당하여도 마음이 일지 않는 것을 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요, 나지 않는 것을 생각이 없다고 하는 것이며, 생각이 없는 것을 해탈이라 한다.

修道證滅이 是亦非眞也라  心法本寂이 乃眞滅也니라  故로 曰, 諸法從本來 常自寂滅相이라하니라

도를 닦아 열반을 얻는다면 이것은 참 이치가 아니다. 마음 법이 본래 고요한 것을 알아야  그것이 참 열반인 것이다. 그러므로 [온갖 것이 본래부터 늘 그대로 열반이니라]고 하신 것이다.

貧人이 來乞커든 隨分施與하라  同體大悲가 是眞布施니라

가난한 이가 와서 빌거든 분수대로 나누어 주어, 한몸같이 두루 어여삐 여기면 이것이 참 보시이니라.

有人이 來害어든 當自攝心하야 勿生瞋恨하라 一念瞋心起하면 百萬障門開니라

만약 누가 와서 해롭게 하더라도 마음을 단속하여 성내거나 원망하지 말아야 한다. 한 생각 골내는데 온갖 장애가 벌어진다.

若無忍行하면 萬行不成이니라

참는 행실이 없다면 만 가지 행실이 다 이루어지지 못하리라.

守本眞心이 第一精進이니라

본바탕 천진한 마음을 지키는 것이 첫째가는 정진이니라.

持呪者는 現業은 易制라 自行可違어니와 宿業은 難除라 必借神力이니라

진언을 외는 이유는 금생에 지은 업은 다스리기 쉬워서 나의 힘으로도 고칠 수가 있지만, 전생에 지은 업은 지워버리기가 어렵기 때문에 반드시 신비한 힘을 빌어야 하는 것이다.

禮拜者는 敬也요 伏也니 恭敬眞性하고 屈伏無明이니라

예배함은 공경하는 것이며 굴복하는 것이어서, 참다운 성품을 공경하고 무명을 굴복시키는 것이다.

念佛者는 在口曰誦이요 在心曰念이니 徒誦失念하면 於道無益이니라

염불이란 입으로 하는 것은 송불이고 마음으로 하는 것이 염불이다. 입으로만 부르고 마음으로 생각지 아니하면, 도를 닦는 데 소용이 없다.

廳經은 有經離之緣과 隨喜之福이라 幻軀는 有盡이나 實行은 不亡이니라

경을 들으면 귀를 거친 인연도 있게 되고, 따라 기뻐한 복도 짓게 되는 것이다. 물거품 같은 몸은 다할 날이 있거니와, 참다운 행실은 헛되지 않느니라.

看經은 若不向自己上자(지을자)工夫하면  雖看盡萬藏이라도  猶無益也니라

경을 보는데 자기의 마음속을 향하여 공부를 지어가지 않게 되면, 비록 만권의 대장경을 다 보았다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느니라.

學未至於道하고 衒耀見聞하야 徒以口舌辯利로 相勝者인댄 如厠屋塗丹확(좋은고기확)

공부가 도를 이루기 전에 남에게 자랑하려고, 한갖 말 재주만부려서 서로 이기려고만 하는 것은  변소에 단청하는 것과  같다.

出家人이 習外典하면  如以刀割泥하야  泥無所用이요 而刀自傷焉이니라

출가한 사람이 외전을 공부하는 것은 마치 보배 칼로 흙을 깎는 것 같아서, 흙은 아무 소용 없이   나의 칼만 상하게 될 것이다. 

出家爲僧이 豈細事乎아  非求安逸也며 非求溫飽也며 非求利名也라 爲生死也며 爲斷煩惱也며 爲續佛慧命也며 爲出三界度衆生也니라

출가하여 중이 되는 것이 어찌 작은 일이랴! 몸이 편안하려는 것도 아니며,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으려는 것도 아니며, 명예와 재물을 구하려는 것도 아니다. 나고 죽음을 면하려는 것이며, 번뇌를 끊으려는 것이고, 부처님의 지혜 목숨을 이으려는 것이며, 삼계에 뛰어나서 중생을 건지려는 때문이다.

佛云, 無常之火가 燒諸世間이라하고 又云, 衆生苦火가 四而俱焚이라하여 又云, 諸煩惱賊이 常伺殺人하나니 道人은 宜自警悟하야 如救頭燃하라하시니라

부처님께서 이르기를 [덧없는 불이 온 세계를 살라 버린다] 하셨고,또 [중생들의 고생 불이 사면으로 골고루 붙는다] 또한 [모든 번뇌의 도둑이 늘 너희들을 죽이려고 엿보고만 있다] 고도 하셨다.  도인들은 마땅히 스스로 깨우쳐서 머리에 붙는 불을 끄듯 하여야 할 것이다.

貪世浮名하면 枉(굽을왕)功勞形이요 營求世利하면 業火加薪(섶신)이니라

세상의 뜬이름을 탐하는 것은 쓸데없이 몸만 뇌롭게 하는 것이며, 잇속을 따라 허덕이는 것은 업의 불에 섶을 더 보태는 것이다.

名利衲子는 不如草衣野人이니라

이름과 재물을 따르는 납자는 풀 속에 묻힌 시골 사람만도 못하다.

佛이 云하사대 云何賊人이 假我衣服하고 稗販如來하야 造種種業하느냐하시니라

부처님께서 이르시기를 [어찌하여 도둑들이 나의 옷을 입어, 거짓으로 꾸미고 부처를 팔아서 온갖 나쁜 일을 짓는단 말이냐?]  하셨다..

戱라 佛子야 一衣一食이 莫非農夫之血이요  織女之苦어늘 道眼이 未明하고야 如何消得이리요.

아! 불자의 한 그릇 밥과 한 벌 옷이 농부들의 피가 아님이 없으며, 길쌈하는 여자들의 땀 아님이 없거늘, 도의 눈이 밝지 못하고야 어찌 삭여낼 수 있으랴!

故로 曰, 要識披毛載(일대)角底마(어조사마)아 卽今虛受信施者是니라 有人은 未飢而食하며 未寒而衣하니 是誠何心哉아 都不思目前之樂이 便是身後之苦也로다.

그러기에 말하기를 [털을 쓰고 뿔을 이고 있는 것이 무엇인 줄 아느냐?  그것이 곧 지금에 있어서 신도들이 주는 것을 공부하지 않으면서 먹는  이가 장차 그렇게 될 것이다.] 라고 하였는데, 어떤 사람들은 배고프지 않아도 또 먹고, 춥지 않은데  더 입는 것은 무슨 마음일까?  참으로 딱한 일이다.  눈 앞에 쾌락이 후생의 고통인 줄을 도무지 생각지 않는구나!

故로 曰, 寧以熱鐵로  纏(얽힐전)身이언정 不受信心人衣요 寧以洋銅灌口언정 不受信心人食이요 寧以鐵확(가마확)投身이언정 不受信心人房舍等이라하니라

그러므로 이르기를 [차라리 뜨거운 쇠를 몸에 두를지언정 신심있는 이가 주는 옷을 입지 말것이요, 차라리 쇳물을 입에 부을지언정 신심있는 이가 주는 음식을 먹지 말라.  차라리 끓는 가마속으로 뛰어들지언정 신심있는 이가 지어 주는 집을 쓰고 있지 말라]하는 것이다.

故로 曰, 道人은 進食을 如進毒하며 受施를 如受箭이니 弊厚言甘은 道人所畏니라  

그러므로 [도인은 음식 먹을 때에  독약을 먹는 것 같이 하며, 시주의 보시를 받을 때에 화살을 받는 것같이 하라 ]고 한 것이다.  두터운 대접과 달콤한 말은 도인의 두려워할 바이니라.  

故로 曰, 修道之人은 如一塊磨刀之石이니 張三也來磨하며 李四也來磨하야  磨來磨去에 別人刀는 快하고 而自家石은漸消라 然이나  有人은 更嫌(싫어할 혐)他人이 不來我石上磨하나니 實爲可惜이로다.

그러기에 말하기를 [도를 닦는 이는 한 개의 숫돌과 같아서, 장서방이 와서 갈고 이생원이 갈아 가면, 남의 칼은 잘 들게 되겠지마는 나의 돌은 점점 닳아 없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는 도리어 남들이 와서 나의 돌에 칼을 갈지 않는 것을 걱정하고 있으니 참으로 딱한 일이다.

故로 古語에 亦有之曰, 三途苦가 未是苦라 袈裟下失人身이 始是苦也라하니라

그러므로 옛말에 또한 이르기를 [삼악도의고통이 고생이 아니라, 가사를 입었다가 사람의 몸을 잃는 것이 참말 고통이다] 라고 하였다.

돌(괴이쩍을 돌)哉라! 此身이 九孔常流하고 百千癰疽(옹저)가 一片薄皮라 又云, 革(주머니낭)盛糞하야 膿血之聚가 臭穢(더러울예)可鄙(더러울비 )라 無貪惜之은 何況百年을 將養한들  一息背恩이리요

우습다  이 몸이여!아홉 구멍으로부터 더러운 것이 늘 흘러 나오니, 백 가지 천 가지의 부스럼 덩어리를 한 조각 엷은  가죽으로 싸 놓았구나. 또한 가죽 주머니에 똥을 담은 것이며 피고름 뭉치라, 냄새 나고 더러워서 아무런 아까운 것도 없는 것이다.하물며 백 년 동안 잘 길러 준대야 숨 한번에 은혜를 등지고 마는 것이 아니냐!

有罪卽懺悔하고 發業卽慙愧(부끄러울참, 괴)하면 有丈夫氣象이요  又改過自新하면 罪隨心滅이니라

허물이 있거든 곧 참회하고, 잘못한 일이 있으면 곧 부끄러워하여야 대장부의 기상이 있는 것이다. 또한 허물을 고쳐서 스스로 새롭게 하면, 그 죄업은 마음을 따라 없어지느니라.

道人은 宜應端心하야 以質直爲本하야 一瓢(박표)一衲으로 旅泊無累니라

도인은 마땅히 마음을 단정히 하여 검박하고 진실한 것으로써 근본을 삼아야 한다. 표주박 한 개와 누더기 한 벌이면 어디 가든지 걸림이 없느니라.

凡夫는 取境하고 道人은 取心이니  心境을 兩忘하야사 乃是眞法이니라

범부들은 현실 경계에만 따라가고,   도인은  마음만을 붙잡으려 한다. 그러나 마음과 경계의 두 가지를 다 내버려야 이것이 참된 법이니라.

聲聞은 宴坐林中이나 被魔王捉(착)하고 菩薩은 遊戱世間이나 外魔不覓(구할멱)이니라

성문은 숲속에 가만히 앉아서도 마왕에게 붙잡히고, 보살은 세간에서 유희하고 지내는데 외도들과 마군이 보지 못하느니라.

凡人이 臨命終時에 但觀五蘊皆空하야 四大無我하고 眞心은 無相하야 不去不來니 生時에도 性亦不生하며 死時에도 性亦不去라 湛(즐거울 담)然圓寂하야 心境이 一如라 但能如是하면 直下頓了하야 不爲三世所拘繫니 便是出世自由人也라 若見諸佛이라도 無心隨去하며 若見地獄이라도 無心怖畏니  但自無心하면 同於法界니 此卽是要節也라 然則平常은 是因이요 臨終은 是果라  道人은 須着眼看하라

누구나 임종할 때에 다만 오온이 다 빈  것이어서 이 몸에는 [나]라고 할 것이 없으며, 참마음은 모양이 모양이 없어서 가는 것도 아니며 오는 것도 아니다. 날 때에도 성품은 난  바가 없고 죽을 때에도 성품은 가는 것이 아닌 까닭에, 지극히  밝고 고요하여 마음과 환경이 둘 아닌 것으로 보아야 한다.  오직 이와 같이 단박 깨치고 보면 삼세와 인과에 얽매이거나 끌리지 않게 된 것이니 , 그런 이는 곧 세상에서 뛰어난 자유로운 사람이다. 만약 부처님을 보아도 따라갈 마음이 없고 , 지옥을 보더라도 무서운 생각이 없어야 한다. 다만 무심하게 되면 법계와 같이 될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가장 요긴한 곳이다.  그러므로 보통 때에 꽃을 가꾸어 가다가 임종할 때에 열매가 맺게 되는 것이니, 도인은 이곳에 주의하여야 한다.

凡人이 臨命終時에 若一毫毛라도 凡聖情量이 不盡하고 思慮를 未忘하면 向驢胎馬腹裡하야 托質하며 泥려(받갈려)확(가마솥확)湯中에 煮잡(데칠잡)하며  乃至依前再爲루(도루레루)의(왕개미의)蚊(모기문)맹(등에맹)이니라

사람이 임종할 때에 털끝만큼이라도 성인이라 범부라 하는 생각이 끊어지지 않게 되면, 나귀나 말의 뱃속에 끌려 들거나 지옥의 끓는 가마 속에 처박히거나. 그렇지 않으면 개미나 모기 같은 것이 되기도 할 것이다.

禪學者가 本地風光을 若未發明則孤초(가파를초)玄關을 擬(헤아릴의)從何透리요  往往에 斷滅空으로 以爲禪하며 無記空으로 以爲道하며 一切俱無로 以爲高見하나니  此는 冥然頑(완벽할완)空이라 受病幽矣니라 今天下之言禪者가 多坐在此病이니라 

참선하는 이가 만약 본 바탕 얼굴빛을 밝혀 보지 못하고서야, 높고 아득한 진리의 문을 어떻게 꿰뚫어 보랴!  어떤 이는 아주 끊어져서 없어진 빈 것으로써 참선을 삼기도 하고, 무엇이라 말할 수 없이 빈 것으로써 도를 삼기도 하며, 온갖 것이 다 없는 것으로써 높은 소견을 삼기도 하니, 이런 것들은 컴컴하게 비기만 한 것이라 병든  바가 깊다. 지금 천하에 참선을 말하는 이들이 거의이런 병에 걸려 있느니라 .

宗師도 亦有多病하니  病在耳目者는 以당(똑바로볼당)眉努目과 側耳點頭로 爲禪하며 病在口舌者는  以顚言도(거꾸러질도)語와 胡唱亂喝로 爲禪하며 病在手足者는 以進前退後와 指東書西로 爲禪하며 病在心腹者는 以窮玄究妙와  超情離見으로 爲禪하나니 據實而論하면 無非是病이니라 

종사에게도 또한 병이 많은 것이다. 병이 귀와 눈에 있는 이는 눈을 부릅뜨고 귀를 기우리며 머리를 끄덕이는 것으로써 선법을 삼으며, 병이 입과 혀에 있는 이는 횡설수설 되지 않은 말과 함부로 [할]하는 것으로써 선법을 삼고 ,병이 손발에 있는 이는 나아갔다 물러갔다 이쪽저쪽 가리키는 것으로써 선법을 삼으며, 병이 속에 있는 이는 진리를 찾아내고 오묘한 것을 뚫어 내어, 인정에 뛰어나고 소견을 여의는 것으로써 선법을 삼는다.   실상대로 말하자면 어느 것이고 병 아님이 없느니라.

本分宗師의 全提此句는 如木人唱拍하며 紅爐點雪이요  亦如石火電光이니 學者實不可擬議也니라  故로 古人이 知師恩曰, 不重先師道德이요 只重先師不爲我說破라하니라

본분 종사는 법을 온전히 들어 보이는 것이다 마치 나무 등신이 노래하고 불붙는 화로에 눈 떨어지듯 하며, 또한 번갯불이 번쩍이듯 하여 공부하는 이가 어떻다고  헤아리거나 더듬을 수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 어른이 그 스승의 은혜를 알고 말하기를 [스님의 도덕을 장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스님이 나에게 해설하여 주지 않은 것을 감격하는 바라]고 하였다.   

大抵學者는 先須詳辨宗途니 昔에 馬祖一喝也에 百丈은 耳聾하고 黃檗은 吐舌하니 這一喝은 便是拈花消息이며 亦是達摩初來低面目이라 旴라 此臨濟宗之淵源이니라

공부하는 이는 먼저 종파의 갈래부터 자세히 가리어 알아야 한다. 옛날에 마조 스님이 한 번 할하는데, 백장스님은  귀가 먹고 , 황벽 스님은 혀가 빠졌다. 이 한 할이야말로 곧 부처님께서 꽃을 드신 소식이며, 또한 달마 대사의 처음 오신 면목이다. 아 , 이것이 임제종의 근원이로구나

 臨濟喝德山棒이 證無生하야 透頂透底라 大機大用이 自在無方하야 全身出沒하며 全身荷하야  退守文殊普賢大人境界나 然이나  實而論컨댄 此二師도 亦不免倫心鬼子니라

임제의 할과 덕산의 방망이가 다 나는 것이 없는 이치를 철저하게 사무쳐서,어디까지나 훤칠한 큰 기틀과 큰 씀이 끝없이 자유자재하여 걸림없고 , 전체로 한 덩어리를 이루어서 남김없이 되어 가지고도, 물러서서 문수와 보현의 큰 어른 경계를 지키고 있다  하더라도, 실상대로 말하자면 이 두 분도 도깨비가 됨을 면하지 못하는 것이다.

大丈夫는 見佛見祖를 如寃(원통할원)家하나니  若着佛求하면 被佛縛이요  若着祖求하면 被祖縛이라 有求皆苦니 不如無事니라

대장부가 부처나 조사 보기를 원수같이 하여야 한다.  만약 부처에게 매달려 구하는 것이 있으면 부처에 얽매이는 것이고, 만약 조사에게 매달려 구하는 것이 있으면 조사에 얽매이는 것이 된다.  무엇이나 구하는 것이 있으면 모두 고통이 되고 만다. 일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니라.

神光이 不昧하야 萬古猷로다 入此門來에 莫存知解하라

거룩한 빛 어둡지 않아 천만고에 환하고나 이 문 안에 들어오려면 알음알이 두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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