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다시 찾은 맹사성고택과 맹씨 행단

백합사랑 2016. 2. 4. 09:00


아산 맹씨 행단

사적 제 109호  1963 .1 . 21 일 지정

아산시 배방읍 중리 300, 조선시대 초기

맹씨 행단은 조선  초기 청백리로 유명한  맹사성(孟思誠, 1360~ 1438)의 집안이 살던곳으로 지역 안에는 고택과 세덕사, 구괴정, 두 그루의 은행 나무가 있다.

고택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 工 " 자형 집이다 .   중앙 두 칸에 커다란 대청을  사이에 두고 왼쪽과 오른쪽에  온돌방을 둔 홑 처마의 맞배지붕 건물로  우리나라의 대표적 고민가(古民家)이다.   세덕사(世德祠)에는 고려말 두문동(杜門洞) 72현인 맹유(孟裕) .  맹희도(孟希道) .  맹사성(孟思誠)의 위패가 있다.

구괴정(九槐亭)에는  세종 때 황희(黃喜),맹사성(孟思誠)  권진(權軫) 등 3정승이 9그루의  느티나무(木)를 심었다고 전하는데, 지금은 두 그루만  남아 있다.

맹씨 행단은 맹사성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600여 년 된 은행나무가 있어 '행단(杏亶)'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또한 행단은  후학에게 글을 가르치고 공부하던 자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고택 입구,   현재 21대 손이 살고 계신 집을 거쳐 맹사성님 고택으로 들어가는 문


맹씨 행단

보호수

이 나무는 1982년 11월 1일에 우리 도 나무로 지정된 쌍행수(雙杏樹)(고유번호 : 8-91)로서 640여 년 정도 된 것으로 추정된다.  쌍행수 한 그루는 높이 40m, 둘레 5m 80cm,  다른 한 그루는 높이 45m,   둘레 8m 50cm로 ,  사적 제109호로 지정된 아산 맹씨행단과 함께 자리하고 있다.  

 이 나무는 세종대왕 때 좌의정으로 봉직하고 청백리로 유명한 맹사성이 1380여 년경에 심은 것이다.   당시 맹사성은 이 나무를 보호하기 위하여 축대를 쌓고 단을 만들었는데, 뜻있는 사람들과 강학하던  자리라는 뜻으로 이 곳을  행단이라 칭하였다. 한다.   한편 이 나무는 2~300여 년 전부터 싹이 원목 옆 사방으로 자라 지금과 같은 거목으로 자라게 된 것이며 1987년 원목의 구멍 안에 부패하여 외과 수술을 받았다.

맹사성고택

맹씨행단쪽에서 바라본 고택


맹사성님 고택


맹사성 고택 전경

현재 21대 손께서 살고 계신 집


맹사성고택에서 저 문으로 나오면 구괴정



구괴정


소나무와 느티나무에 쌓인 구괴정은 선경 같습니다

그곳에 앉아 정사를 논하면 나쁜 생각이 절대로 떠오르지 않을 것 같은 곳 !


구괴정九槐亭(삼상당(三相堂) )

이 정각(亭閣)은 조선 세종 때의 정승이었던 맹사성이 황희(黃喜),  권진(權軫)과 함께 느티나무를 세 그루씩 아홉 그루를 심었다는 데에서 구괴정(九槐亭)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600여 년 전의 이곳은 오봉산(五峰山)을 배경으로 앞에는 북풍을 막아 주는 배방산과 복부성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금곡천(金谷川)의 맑은 물이 당긴 활 모양으로 흘러내려 시인과 묵객(墨客)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명승지였다.   세 정승은 이 곳에 정각을 세워 시문(詩文)을  지어 읊으며 망중한(忙中閑)을 즐겼고, 국정을 논의하기도 하였으며, 일하는 농민을 불러 위로하며 민정도 살폈다.   600여 년이란 세월이 흘러 아홉 그루  중 일곱 그루의 느티나무는 수명을 다하였고.,  두 그루만이 허리를 굽힌 채 받침대에 의지하여  흥망성쇠하였던 500년의 역사를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한편 이곳은  삼정승이 국사를 논의하였다고 하여 삼상당(三相堂)이라고도 한다.


정자 앞에 허리를 굽힌채 받침대에 의지한 느티나무 


구괴정의 옆 모습



구괴정에서 내려다 보이는 풍경



더 자세히 맹사성님 고택 보시려면  http://blog.daum.net/hyeanj/18352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