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온주아문 및 동헌

백합사랑 2016. 2. 3. 20:20

아산에서 이모네 집을 가려면 늘 차속에서만 보았던 온주아문을 드디어 오늘 일부러 찾아가 보았습니다

온주아문 및 동헌 (溫州 衙門 .  東軒)

지정별: 유형문화재 제 16호

지정년월일  : 1973 . 12 . 24

위치 : 충남 아산시 읍내동 159

수량 : 2동

소유 : 아산시

규모 : 아문 - 정면 3칸 , 측면 2칸

규모 :동헌 : 정면 - 6칸, 측면 2칸

시대 : 조선시대

조선시대 온양군(溫陽郡)의 관아 건물이었던  문 위의 누각을 만든 문루(門樓) 건물과 동헌(東軒)이다.   아문은 1871년 (고종 8년)에 고쳐지어진 건물이고,  동헌은 여러차례 변형 되었으나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아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누각 건물이다.  기초석 위로 1,5m의  주춧돌을 배열하고 그 위에 둥근 기둥을 세워 누마루를 설치하였다.  아문의 정문에는 '온주 아문(溫州 衙門) ' 이라는 현판이 있는데,  이는 663년(신라 문무왕 3년)에 이곳을 '온주(溫州)'라고 한데서 유래한 듯하다.

동헌은 정면 6칸,  측면 2칸의  건물이다. 길게 다듬은 받침돌을  한 벌 쌓아  기단을 마련하고, 다듬지 않은  주춧돌을 두고 그 위에 네모난 기둥을 세운 홑처마 팔작 지붕이다.

조선시대 온양현의 동헌으로 쓰였다가 일제의 주재소, 해방 후에는 파출소, 1986년부터 1988년까지 온양시 온주 동사무소로 사용되었다.    1993년 수리 .  복원되었다.

동헌 東軒


아문 옆에 있는 비석들

읍내동 온주아문 비석군(邑內洞 溫州 衙門  碑石群)

온주아문은 조선시대 온양군의 관아건물의 일부로 이곳에서 재임하던 군수들과 충청도관찰사들의 선정을 기념하고 공덕을 칭송하기 위해 세운 송덕비로 흔히 관아의 입구나 도로변에 세워진 것들을 한자리에 옮겨 모아 비석군을 조성하였다.

좌로부터 온양군수를 역임했던 윤지대(尹志大)선정비와   박홍(朴泓) 선정비,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했던  박제관(朴齊寬) 영세불망비,  온양군수를 역임했던 이병교(李秉敎) 불망비, 비문의 탈락으로 인해 비석의  주인공을 가늠할 수 없는 선정비 1기와, 온양군수를 역임했던 홍우룡(洪祐龍) 선정비와  이만추(李萬樞) 선정비, 그리고 충청도 관찰사를 역임했던 조득림(趙得林) 영세불망비이다.  또한 2008년 관내에 산재해 있는 금석문을 이곳으로 이전하여 함께 모아두었는데, 비면의 마모로 인해 정확한  내용을 확인 할 수 없는 애민 선정비와 홍석주(洪奭周) 선정비,  김영식(金榮植) 송덕비이다.

아문 옆쪽에 연륜이 보이는 오래된 집이 아름다와서


아산 읍내동 당간지주

보물 제 537호



읍내 마을의 역사를 기록한 석판인데 어두어서 잘 안보이는 것이 조금 안타깝다

한 번 읽어보려니 너무 힘들어 옮겨보지만, 아마도 가끔은 틀린 것도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읍내 마을의 역사

온양시 읍내동

온양시의 동남부에 위치한 읍내 마을을 설화산(雪華山)의 정기를 받고 연산을 배경으로 한 마을로 유구한 역사 속에 백제시대에는 탕정군 고려시대에는 온수군(溫水郡)이었다가 조선시대에는 세종대왕의 온양 행차 이후 선초(鮮初)의  온수현에서  온양군으로 승격되면서 군청 소재지로 발전하였고, 1914년 이후 아산군에 통합되었다가  1986년 온양시 승격과 동시에 읍내동으로 개칭되었으며 온양시가지가  온천수 중심지로 이동되기 전까지 온양의 중심가로 발전하여 왔으며, 오늘날까지  구온양이라 불려지고 있다.

이 마을에는 선조의 보배로운 문화유산이 전승되고 있으니 고려시대 유명사찰 앞에 세워 졌던 보물 537호 당간지주 조선시대 온양군 청사였던 문화재 16호인 온주아문 및 동헌이 옛 모습 동헌 10칸 아사 23칸  객사 37칸  무학당 3칸 향청 12칸 그대로는 아니라 해도 동헌 1동과  온주아문이 현재까지 남아 있으며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 온양지방의 교육을 담당했던 문화재 자료 223호인 온양향교가 위치하고 있다.  또 연산에는 토성으로 된 성터가  약 400m 정도 남아 있으며 서편에는 일 월 성 신(日.月. 星. 神)과 자연에게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했던  사직단(社稷壇)터가  그리고 남서쪽의 언덕에는 일찌기 빙고(氷庫)로 사용하였던 핑곳재의 잔흔이 남아 있고, 현  온양국민학교 터에는  온천동으로 시장이 옮겨 가지 전까지 장터가 있어  인근 주민들의  시장기능을 담당하였다 한다.

역사적 사건으로는 고려 고종 23년(1236)에 몽고군의  3차 침입시 몽고군이 온수군을 공략 하므로 온수군의 아전인  현려가 출전하여 적병 200여 명을 죽이고 많은 병기를 빼앗았는데 고종은 이 싸움에서 승리 하게 된 것은 연산에 있는 성황당의 도움이라 하여 성황당을 000000(글씨 너무 않보임 ㅎㅎ) 봉하였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