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청계천과 청계천 문화관

백합사랑 2006. 11. 16. 21:34

 

 

 

 

 

 

 

 

 옛청계천  옆에 판잣집들 --

 

  

 그옛날 어려운 이웃들이 살던 집들

 

 청계천 복개공사후의 다리밑의 모습 -모형을 해놓았다

 

--- 희망의 떡잎--

[청계천 어둠 속 그 지하 가느다란 한 줄기 햇빛 속에 힘겹게 자라난 떡잎 하나

희망이라고 불러 봅니다.]    ----위에 쓰여진 글을 보기 좋게 하기 위해 옮겨 적었음

 

 

 

 

 

 

 

 

 

 

 

 

 

 

수표교(水標橋)

1420(세종 2년) 다리를 놓고 마전교라고 하였으나, 1441년(세종23년) 개천의 수위를 측정하기 위한 수표석(수표석)을 설치한 후부터 수표교라고 불렀다.    1768년(영조44년) 한 차례 증축되었으며,  1887년(고종 24년) 난간이 설치되었다.

천계천 복개가 시작되면서 1969년에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수표교는 광통교와 함께 청계천의 대표적인 다리로서 다리밟기 연랄리기 등 민속놀이가 행해진 ㄴ곳으로 유명하다.

 

조선후기의 수표(수표) - 복제 모형

1833년 순조 33년

보물 제838호로 현재 세종대왕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화강석으로 된 돌기둥인데 위에는 연꽃무늬의 머릿돌이 놓여 있고 밑은 모가 난 초석으로 땅 속에 박혀 있다.

돌기둥 양면에는 주척( 周尺)1척마다 눈금을 1척에서 10척까지 새겼고 3척. 6척. 9척이 되는 곳에는 ㅇ표를 파서 각각 갈수
渴水  . 평수(平水) . 대수 (大水) 등을 측정하는 표지로 삼았다.   6척 안팎으로 물이 흐르는 것이 보통의 수위였으며 9척 이상이 되면 위험수위로 개천의  범람을 예고하게 된다. 이 수표는 세종대의 것과 비교할 때 촌 .  푼 까지 정확히 측정할 수는 없지만  갈수와 위험수위를 분명히 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발전적인 것으로, 하천 양수표의 전통을 이은 유일한 유물이라는 점에서 기상학사적 가치가 높다



 

 

 

살곶이다리

현존하는 조선시대의 다리로서는 가장 규모가 크며, 도성에서 동쪽으로는 강릉, 남쪽으로는 충주 등 지방ㅇ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1420년(세종 2년) 다리공사에 착수하였으나 당시 도성안 개천 정비 등으로 여력이 부족하여 중단되었다가 1483년(성종 14년) 완성하였다

살곶이벌에 있었다고 하여 살곶이다리 또는 箭串橋(전곶교)라고 불렸으며, 성종 때 다리가 완성되어 다리 이름을 정할 때 다리가 평지를 밟는 것과 같았다고 하여 제반교(濟盤橋)라고도 하였다.

1920년  집중호우로 다리 일부가 유실되었던 것을 1972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청계천 다리밑에서 염색하던 모습

 

 

 

 

 3.1고가도로를 만들기 위한 복개 공사 작업현장을 .......

 

 3.1고가도로와 그 주변의 모형

 

 

 문화관 안에 연못 인공 고기가 뛰어논다.ㅎㅎㅎㅎㅎ

 

사진을 찍으면 직석에서 엽서로 만들어 준다하여 기념 사진 한 장

 

 

 청계천 문화관 안에서 찍은 사진을 즉석으로 빼어준다.

 

 

 

 

 

 

 

 

 

 

 

 내 뒤에 적혀진 이름들은 청계천을 만드는데 공헌한 사람들의 이름들이다.

 

 

 

 

 

 

 담쟁이 넝쿨이 너무 이뻐서

 

 

 청계천 문화관 유리 청소

 서울시청에서 제공해준 버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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