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

국립박물관에서는[ 발굴에서 전시]의 기획전이 열리고 있다.

백합사랑 2007. 6. 13. 20:14

 

국립박물관에서는 최근 몇년간 발굴했던 유적들을 특별 기획전으로 전시하고 있습니다.

모처럼 시간을 내서 갔지만 기획전만 몇가지 보고 또 다음을 기약하면서 .......

 

 

실상사에서 발굴된 유물

 

 실상사는 신라 흥덕왕 3년에 홍척국사가 창건한 최초의 선종가람이다.  고려 . 조선시대에 대대적인 중창으로 오랜 세월 사세를 지켜져 왔다. 그러나 고종 19년에 유생들의 방화사건으로 인하여 크게 축소되었다가 이후 월송대사가 재건하여 지금까지 법등을 전하고 있다.

8차에 걸친 발굴조사로 통일 신라시대의 창건기 가람은 자연적인 지형에 맞추어 가람배치를  시도하였고,  이후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사역 전체가 오른쪽으로 공간이 확장되었고 이곳에 실상사 최대 번영기를 보여주는 7x7 간의 고려 목탑을 비롯한 많은 건물이 조성되었음이 밝혀졌다.

기록에 보이는 실상사의 역사성과 가람배치의 변천  내용을 실제 자료와 비교 . 검증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학술연구 및 복원 정비자료가 확보되었다. 

 

 실상사 유물

 

 실상사 유물

 

 

  실상사 유물

 

 

 

  

실상사 탑 모형도

 

 

낙산사에서 발굴된 유물

 오른쪽 아래의 기와에는 "낙산사"가 새겨졌다함

 

 

 경복궁 안에서 발굴된 유물들

경복궁은 태조 4년에 창건된 궁궐로 도성의 북쪽에 있다고 해서 북궐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고종 4년에 중건하였으나, 일제 강점기에 많이 훼손되었다. 이에 경복궁의 원형을 되살리기 위한 기초 고증자료를 확보하고자 소주방지 흥복전지를 비롯한 함화당 . 집경당  행각지에 대한 발굴조사를 지속적으로 실시하였다. 현재는 광화문권역(2006~2009년 예정)에 대한 조사를 진행 중이며,

결과를 기초로 복원사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발굴조사에서 문헌기록에 보이는 건물지의 정확한 위치와 규모가

 파악되었으며, 기록과의 차이점도 확인되었다. 또한 고종연간 이전의 유구들도 확인되어 기록에 보이지 않는 경복궁의 옛 모습에 대한 자료도 축적하게 되었다.

 이 龍은 경복궁 경회루 연못에 있던 구리로 만든 용  

 

조선기와

 

 경복궁 안에서 발굴된 물건들

 

 경회루는 본래 연못에 세운 작은 누각에서 비롯 되었으나 태종 12년에 연못을 넓히고 건물을 새로 지어 경회라 이름 지었다. 이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고종 4년(1867) 경복궁을 중창하면서 재건하였다.   경복궁은 창건이후 잦은 화재로 많은 건물이 소실된 역사를 가지고 있었기에

 경회루가 물의 상징이 되어 궁궐 내에서 물의 기운을 상승 시키고 화재를 억제하는 역할을 하게 하도록 건축하였다.

연못 속에 구리로 만든 용 2마리를 넣었다고 적혀 있는데 ,이는 물의 기운을 한층 더하고 불의 기운을 억누르기 위한 것이다 .

 

 저 구리용은 경회루 연못 속에 있던 것임

 

 경주에서  발굴된 유물

팔부중상

경주 전 인용사지

팔부중은 석가모니의 설법에 감화를 받은 여러 무리 중 하나이다. 이들은 본래 불교가 성립되기 이전부터 인도의 신화에 등장하는 신적 존재나 강력한 힘을 지닌 존재였으나. 점차 불법을 수호하는 신장으로 발전 변모했다.

동쪽과 서쪽에 같은 구조와 형식으로 조성한 쌍탑 형식의 전(傳) 인용사지 석탑은 대부분이 유실되었고  동탑에서 팔부중이 조각된 기단면석 1매가 발견 되었다,  출토된 좌우의 팔부중상 가운데 왼쪽의  형상은 갑옷을 입고 구름 위에서 발바닥을 마주하고 앉았으며,  오른손에는 칼을 들고 왼손에는 보주를 들었다. 입의 모양이 새의 부리와 같은 형태인 것으로 가루라의 상으로 추정된다.

오른쪽의 형상은 갑옷을 입고 구름 위에서 왼쪽 다리를 오른쪽 다리 위에 포갠 가부좌를 했으며, 왼손에는 보주를 들었으나  오른손은 명확하지 않다.

 

분황사는 신라 선덕여왕  3년 630에 창건되어 7~8세기에는 자장, 원효를 비롯한 고승들이 주석하면서 전성기를 구가하며 지금까지 법등을 이어오는 고대 가람이다. 분황사 석탑(국보 제 30호) 북쪽에 '品'자형 삼금당을 배치한 일탑삼금당(一塔三金堂) 형태의 창건 가람을 비롯하여, 이후 최소 세 차례의 변천을 겪으며 일탑일금당으로 축소되는 과정이 발굴로 확인되었다.

특히 분황사 동쪽 외곽에서는 안압지의 1/15 규모인 통일신라시대 원지(苑沚 유적이 조사되었다.  2개의 인공 섬과 호안석축을 갖춘 연못과 배수로, 담장 등의 부대시설이 조사되었다. 그 남쪽에서는 연못을 조망하는 누정을 비롯한 건물지 및 관련 시설들이 확인되었다.

 

 

분황사 발굴  된  청동 거울

 

 

 분황사 발굴

 

 

분황사 발굴

 

 

  신라,  경주 분황사 발굴

 

호자 -경주 분황사에서 나온 호자

호랑이 등의 동물모양을 본 따 만든 용기이다. 변기로 사용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나, 주기(酒器) 다구(茶具), 명기(明器) 등의 목적으로 제작된 특수 용기라는 의견도 있다. 개성지역에서 출토 된 것으로 전하는 청자호자는 중국에서 수입된 것으로 보이며, 남자용 소변기로 보이는 부여 군수리 출토, 호자는 중국 호자에서 변형된 모습이다. 이러한

 예에서 중국과의 교류에서 받아들인 문화를 독창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백제 문화의 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호자와 변기형 토기는 주로 백제의 사비기 유적에서 출토되고 있다.

 

 짐승 얼굴무늬 기와 --경주 왕경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고 새로운 국가에 어울리는 도성을 대대적으로 정비하였으며, 이때 월성의 궁궐을 중수하면서 해자를 개축하고 대형 전각 건물을 조섯한 사실이 발굴결과로 밝혀 졌다. 1980년대 후반에 월성의 북서면에 대형 적심 건물군이 배치된 사실이 확인되었고 , 추가 발굴이 이루어져 유적의 전체적인 윤곽을 확인하였다.

북쪽 중앙의 건물을 중심으로 좌우에 10칸에 이르는 긴 대형 건물이 3동씩 늘어서 있고, 그 남쪽에는 중층 누각으로 건물 2동이 있다. 남쪽 출입구에는 담장형태의 석렬유구가 있고 그 앞에 5개의 지진구가  뭍혀 있는 독특한 구조이다. 또한 서편 건물지에서는  고체화된 황칠액 안료가 담겨있는 합이 출토되어 이 유적이 제의와 관련된 시설로 추정된다.

 

 

 황칠이 담긴 도장 무늬함

지진구

지진구(地鎭具)란 건물이나 탑을 새로이 짓고 수리할 때 땅의 기운을 눌러 불이나 큰 재앙을 막는 벽사와 기원의 뜻을 담아 땅 속에 묻어두는 물건을 말한다.   주로 옥, 금속제품, 각종 그릇 등을 사용하며,  7세기 후반 이후 경주를 중심으로 한 신라권역내의 황룡사지, 구황동 원지, 전 인용사지 등 주요 절터나  건물지 등에서 다수 발견 되고 있다.

 

 불상들이 너무 작아서  흔들려서 죄송  .....핑계!

불상   

 유적조사에서 확인된 금동제 불교조각품은 출토지가 확실한 자료의 소개라는 가치를 지닌다. 또한 함께 발견된 유물과 불교조각품이 유적 전체의 맥락 속에서 이들이 지녔던 종교적 성격과 신앙적 의미를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대에 많은 도움을 준다.

경주의 왕경유적, 구황동 원지, 황룡사지 , 분황사, 전 인용사지에서 발굴된 금동불상들은 통일 신라 초기부터 말기에 해당하는 것이다.   특히 왕경 유적과 황룡사지에서 발견된 금동 불입상들은 통일 신라 불입상에 존재했던 착의 형식의 종류와 시기에 따른 조각의 양식적 변천과정을 잘 보여준다.

한편 구황동 원지와 황룡사지에서 수습된 금동판불편중에는 안압지 출토 금동판불과 유사한 것들이  포함되어 있어 이들을 통해 당시 유행했던 불교 도상과 신앙의 특징을 알 수 있다. 전 인용사지 출토 금동불입상과  같은 소형 불상들은 출토 당시의 상황으로 미우어 볼때 , 석탑내에 봉안했던 사리구의 일부였던 것으로 추정되어 불사리 신앙 연구에서도 주목할 만한 자료이다.

 

 

 토기와 토기 생산도구

경주 손곡동

많은 양의 토기를 가마에 넣고 소성할 때 이들이 열기에 녹아 엉기어 붙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다양한 받침 도구와 재료가 사용되었다., 이러한 받침 도구는 토기가 가마 바닥이나 아래 위로 쌓은 토기에 붙지 않고, 넘어지지 않으며, 열기가 골고루 전해질 수 있도록 하였다.

경주 손곡동 . 물천리 유적은 신라시대 토기가마가 밀집되어 있는 대규모 생산유적이다. 토기가마, 채토장, 공방지, 건물지 등의 시설과 함께 토기받침, 내박자 ,등 다양한 생산도구가 확인되어 신라 토기의 생산 공정 등 요업기술사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구릉부에 밀집 분포하는 55기의 토기가마는 중복관계를 통해 시기차를 두고 변해가는 가마의 구조적 변화상을 보여준다. 

 

이 유적은신라 왕경으로 공급하던 토기생산 활동의 전체 과정을 복원하고 , 더불어 생산 집단의 생활사 등을 종합적으로 밝혀낼 수 있는 유구 . 유물이 확인되었다는 점에서 그 학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

 

 

 

 토기생산 도구들

 오른쪽에서 두번째는 손잡이 달린 완

 

 

 

가야

 

 

 

송현동고분군은 비화가야의 고도로 추정되는 창녕 지역을 대표하는 고분군이다. 발굴조사가 완료된 6 .7호분은 시기적으로 큰차이가 나지 않는 2기가 연접한 표형분으로 6호분이 먼저 축조된 후 7호분이 덧붙여 조성되었다. 

 국내 최초의 '구유형 목관' 이 출토된 7호분은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 사이에 축조된 것으로 , 출토된 토기나 무덤 축조 방식 등에서 신라의 전통이 강하다.  7호분과 나란히 봉분이 조성된 6호분은 돌을 쌓아 만든 돌방(石室) 안쪽 면에 온통 붉은 물감이 칠해져 있음이 확인 되었다.목관 북쪽 무덤방 입구에는 사람 턱뼈와 두개골 등 두 사람으로 추정되는 순장자의 유골과 금 귀걸이 한쌍, 목항아리등 토기와 칠기 그릇이 별층에 그대로 노출돼  있고 흩 뿌려져 있느 밤톨이와 참외씨 등은 장례행위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부분의 유물들은 7호분에서 출토되었으며 목관을 중심으로 사방에서 유물들이 확인되었다.  이 목관은 동남아시아의 서식하는 녹나무로 통나무의 한 쪽 내부를 파내어 제작한 배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가야-송현동

 

 

 

  가야 성산산성

성산산성이 위치하는 함안은 가야의 옛 지역으로 주변지역에 수장급의 대형 고분군이 있어 아라가야의 정치 및 군사적 주요거점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와 같은 역사의 중요성으로 인해 산성의 구조와 성격을 파악하기 위한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6세기대 신라와 관련이 있는 산성임을 밝혔다. 중첩된 형태의 저수지 내부에서는 고대 문서행정의 단면을 보여주는 목간, 제첨축 등의 목제 유물 및 유기물들이 확인되

었다 .

특히 다양한 형태의 방망이 및 빗자루 등의  생활용품과 연꽃무늬 막새, 토수기와 등의 기와류와

  지진구를 비롯한 각종 토기류 복숭아씨 , 살구씨 , 밤껍질  등의 견과류 복골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자라뼈 , 머리카락 등의 각종 동식물 유기체도 출토되어 당시 생활모습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자라뼈  

 

 

 

 나무그릇과 나무 방망이

 

 

 

 

 

 

 

 

 

백제의  풍납토성

풍납토성은

한강변에 위치한 백제 한성기의 대규모 평지토성이다. 1925년 대홍수로 성 내부의 백제문화츰이 노출되는 과정에서 중국제(청) 초두4,  허리티 꾸미개 등 중요 유물이 발견되면서  주목 받기 시작하였다.  1900년대 본격적인 발굴조사로 풍납토성의 규모와 판촉기법이 밝혀졌고,呂'자형의 특수 건물터와 제사관련

된 수혈유구를 비롯한 갖가지 유구가 확인되었다.

이와 함께 '大夫' 명 토기를 비롯한 방대한 양의 초기 백제 유물이 출토되면서 백제의 초기 수도인 하남위례성이 풍납토성이었을 가능성이 한층 높아지고 있다. 최근 조사지역에서는 남한지역  최고 도로용구, 추정 내성벽, 주거지, 생산시설 등 당시 생활상을 발혀 줄 수 있는 다양한 유구가 확인되었다.

 

토성 축조기법

풍납토성은 판촉법이라는 기술을 사용하여 축조된 평지 토성이다. 판촉법은 땅을 평평하게 고르고 일정한 구간마다 나무판자를 세워 기둥으로 고정시킨 후 일정한 두개씩 층을 이루도록 점질토와 사질토를 교차로 다져 쌓아 올리는 것으로 , 이때 나무 막대기로 홀을 일일이 두드려 다졌다.

 

토루의 최하층에는 뻘이나 점성이 강한 진흙을 깔아 성벽의 기초부에서 유동성을 확보하여 붕괴를 막고 측면이나 하부에서 물이 침투되는 것을 방지하였다.  또한 뻘 사이에 나뭇잎이나 껍질,  볏집과 같은 식물유기체를 섞어 겹겹이 깔았는데 이러한 방식은 중요한 고대 축성법의 하나이다. 중심 토루를 중심으로 내벽과 외벽 석렬이거의 같은 자리에 축조되어 있는데 , 이는 당시의 계획된 축성의도를 엿볼 수 있으면 이러한 계획을 뒷받침 할 수 있는 정교한 측량술이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백제 사비기-- 부소산성

 부소산에 축조된 산성으로 궁궐의 방어를 위한 군사적 요충지이며. 도성의 방어를 위한 나성과 더불어 내 . 외성을 이루어 백제 사비기의 독특한 도성구조 및 운용체제, 역사적 환경을  밝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사비성, 소부리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성왕의 천도를 전후한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정확한 축조시기와 성격을 밝히기 위한 조사를 실시한 결과 백제시대 사비기에 운용된 포곡식 산성과 통일신라시대 축조된 테모식 산성, 조선시대 축조된 성벽  구간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확인하였다.  산성 및 산성 내부  주요 관련 시설로 동문지, 남문지, 북문지 등과 백제시대 수혈  주거지 및 신라시대 건물지,  조선시대 군창지, 건물지 등 여러 시기의 ㅇ구들이  조사되어  부소산성이 백제시대는 물론 통일 신라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산성의 기능을 유지하고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백제부소산성

 

왼쪽의 것은 그릇 받침  백제부소산성

 

 백제 부소산성에서 출토

 

  백제 부소산성에서 출토

 

 鉢(발우)  , 오른쪽 끝에 것은  뚜껑 있는 대발이라고 함

 

 

관북리 유적  

부여 관복리는 백제의 마지막 도읍인 사비의 도성으로 추정하는 곳이다. 수차례의 발굴조사결과, 도로망의 흔적 대형전각 건물터 , 왕실수공업 공방과 저장 시설, 정원과 같은 조경시설 등 도성과 관련된 많은 유구가 확인되었다. 백제가 사비로 도읍을 옮기면서 이 일대는 왕궁에 부속된 생산 및 저장 시설이 밀집한 곳으로서 각종 식료와 수공업품을 공급하는 왕실의 경제적 배후 지역의 성격을 갖는다. 이후 왕궁 확장을 위한 대대적인 성토대지 공사가 벌어지고 , 이 위에 정비된 동서-남북의 도로, 축대와 배수로 ,  상수도 시설 , 기와로 쌓은 기단 을 갖춘 다수의 기와집과 연못과 같은 조경시설 등의 계획성 있게 배치되고, 대형 전각과 같은 새로운 정치 . 행정 공공건물들이 들어서며 왕궁으로 변모하여 간 것으로 볼 수있다.

 

 

 관북리유적

 

백제 사비왕궁터

지하 곳간

백제 사비왕궁의 고위귀족들이 먹을 각종 식료품을 주로 저장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로 나무덧널곳간[목곽 창고]에서는 참외, 복숭아, 살구 따위와 같은 다양한 과일 씨앗과 고수 씨앗이 다량 출토하였다.

상수도시설

목과수조에 사면위로부터 흘러든 물이 고이게 한 다음, 불순물이 바닥에 가라앉고 물이 차오르면 기와로 만든 수로를 따라 필요한 곳에 이르도록 고안한 것이다.

 

 

백제 연못

대충 깨어서 다듬은 돌들을 쌓아 만든 백제의 연못으로 바닥에서 연꽃 잎과 줄기 . 뿌리 등이 발견 되었다.

대형전각건물터

지붕이 연꽃무늬수막새가 장신된 2층의 기와집으로 사비궁 중수 기록이나 태자궁 수리기록과  관련된 건물터로 추정된다.

 

 왕궁리 유적

왕궁리 유적은 7세기대 조성된 백제의 궁성유적으로 미륵사지 인근에 위치한다. 백제 말기 축조 당시에는 궁성관련 시설로 이용되다가 1탑 1금당의 배치구조를  한 사찰관련시설로 변화된 것으로 보인다. 부여 지역에서 보이는 와적기단 건물지, 전각 건물로 추정되는 대형건물지 그리고 백제의 조경기술을 엿볼 수 있는 정원 등 새로운 궁성관련 시설이 발견되었다. 그 외 담장 및 배수로, 대형 화장실, 공방과 같은 각종 부대시설도 궁성시설과 함께 조성된 사실이 밝혀졌다. 또한 백제시대의 궁성 관련 유구 외에도 왕궁리 5층석탑과 관련된 금당지와 강당지가  1열로 배치된 통일 신라의 가람 구조도 확인되었다.

 

 백제시대유물

 

 

 

 

 목간 --종이가 없을 때 기록하던 나무

목간은 나무를 깎아 그위에 먹으로 글씨를 쓰거나 새겨 넣은 것을 말하는데 종이가 발명되고 보편적으로 이용되기 전까지 종이의 역할을 하였다 . 대체로 한 개의 목간에 완결된 내용을 담도록 이용되었기 때문에 앞면에 이어 뒷면으로 내용이 이어지는 경우도 많으며 나무 막대의 각 면에 글자를 써 넣기도 하였다.  목간의 주된 내용은 물품의 "꼬리표"나 신분을 증명하는 통행증 등 사람의 이동과 관련된 기록이다. 지금까지 목간은 약 14 유적350여점이 출토되었고 이들 중 글자가 확인된  것은 250여점 정도이다.

 

백제의 목간은 부여 관목리 , 능산리, 궁남지, 등 주로 사비도성에서 발견 되었다.

 신라의 경우는 도성은 물론 지방의 산성에서도 많이 출토 되었다 . 이는 산성이 지방 행정기관의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함안 성산산성은 지금까지 가장 많은 목간이 출토된 곳이며, 그 안에는 두루마리 모양의 종이 문서에 꽂았던 색인의 기능을 한 제첨축도 포함 되어 있다.

제첨축은 관청에서 작성 . 보관하던 문서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한국고대사회의 문자생활과 문서행정의 실체를 보여주는 중요한 근거이다

 

백제의  목제 우물 4세기말 5세기 초에 만들어진 백제의 가장 이른시기 목제 우물이다.

 

 

 백제왕궁리유물

 

 백제왕궁리유물

 

 

 

백제에 대형화장실 --익산 왕궁리 유적  

 

 고려 강도시대(江都時代 1232~1270)

고려 왕실은 고종 19년 (1232)에 몽골의 침입을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고 항전을 계획한다.  강화도는 개성에서 가까울 뿐 아니라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서 해전에 익숙하지 않은 몽골군을  맞아 싸우기에 적합한 요새로 보았다.  이후 원종 11년(1270)에 개경으로 환도하기까지 39년간 고려의 도읍이 강화도에 머물었던 이 시기를 강도시대라 한다.  이 시기 동안 고려는 대장도감을 설치하고 팔만대장경의

판각 불사를 계속하였으며, 선원사 등의 사찰을 세우기도 하였다.  현재 강화도에는 고려궁궐과 관아건물, 희종(1237년) 석릉,  고종 홍릉 등의 왕릉과 왕릉급 무덤들이 당시의 역사를 전해주고 있다.

 

 

 

 강화고려 왕릉 석인상

 

 강화 고려왕릉

 

 

 고려기와

 

 고려기와에다 짐승의 눈알을 표시한 것이라함

 

 고려청자

 

 고려유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