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을 별러서 찾은 박물관 기획전에 갔는데 기획전이 양쪽에서 열리고 있었다 . 난 내 건강 능력을 생각해서 두개중에 한개 밖에 볼 수 없다면 어느것을 먼저 볼까 ? 망설였는데 다행히도 두개를 다 볼 수 있게 컨디션이 도와 주었다.
맨처음엔[ 류성룡전]보다 [발굴에서 전시까지]에 더 관심이 갔었던 것은 예전에 하회마을에 갔을때 류성룡 박물관엘 갔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다시 한번 보고 싶어 갔기에 혼자서 사진도 찍고 열심히 보고 있는 나에게 , 그곳에 자원봉사님이 오셨다 . 난 사진 찍는다고 혼나나 보다 하고 쑥스럽게 죄를 사해 달라는 모습으로 있었다
그런데 그분은 야단을 치시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 일일이 설명을 해주신다 . 그분께서 어찌나 설명을 잘해주시는지 정말 감동이었다.
그분께선 이렇게 말씀을 하신다 ."그냥 보기만 해선 몰라요! 설명을 들어야지 ....."
난 너무 감사해서 이렇게 인사를 드렸다 "오늘 횡재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정말 난 언제나 행운아 인것 같다.
그분의 박식하시고 정성스러운 설명 덕에 난 류성룡님의 진면목을 더욱 알게 되었고 가슴이 뭉클함을 느꼈다.
아 ~ 그옛날엔 어찌 그렇게 훌륭하신 분들이 많이 계셨을까? 왜 지금은.........
아쉽기만하다.
아래 글은 류성룡님께서 남기신 말씀인데 가슴이 뭉클하네요!
[평생 부끄러운 일 많은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권하노니 자손들아 꼭 삼가라.
충효 외에 다른 일은 없도다. ]
류성룡님이 사용했던 책상
류성룡의 스승, 퇴계 이황의 문집
류성룡의 스승, 퇴계 이황의 문집
류성룡을 호성공신에 임명하면서 선조 임금이 내린 문서
1604년ㄴ (선조37) 10월 , 보물 제 160호 , 40x 248cm , 충효당 (류영하) 소장
왕실의 계통을 바로 잡은 공로로 내린 공신 문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계통이 명나라와의
[ 대명화전]에 잘못 기재되어 왕실의 정통성에 큰 문제가 되었다. 조선은 200여 년간 지속적으로 시정을 요구 하였고 1589년 윤근수가 수정된 [대명화전]을 받아 옴으로써 일단락 되었다.
이때 공이 있는 신하들을 광국공신에 책봉하였는데 , 류성룡은 3등 공신이 되었다.
그림은 우리나라가 임진왜란으로 침략당한 모습을 그린 것이라함
영의정 벼슬을 받았으나 임진란 때 류성룡도 관직에 있었다는 이유로 대신들의 탄핵 때문에 하루만에 파직 된 영의정 !
류성룡을 도체찰사에 임명하면서 내린 교서
임진왜란으로 빼앗겼던 평양성을 탈환하는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의 그림
임진왜란으로 빼앗겼던 평양성을 탈환하는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의 그림
평양성을 탈환 할 때의 명나라의 무기 --화포
이것은 군사지도라함
류성룡이 임금에게 사직을 청하였는데 사직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선조임금이 류성룡에게 내린 문서 ---그러나 그해 가을에 파직되었다함 .
언제나 몰약하는 자들은 있었다 !
류성룡이 고향에 내려가 은둔 생활을 하고 있을 때, 류성룡에게 임금님이 호성공신 2등에 녹훈을 주었다.
류성룡은 '죄인이 무슨 상을 받느냐'(파직 당하고 고향에 내려가 은둔 생활을 할 때) 며 상을 사양하고 받지 않겠다고 하였으며 , 공훈된 사람들은 어용화가에게 초상화를 그려지는데 이때 초상화를 그리는 것도 사양하였다 . 賞자체를 거부하였으니......
이때 같이 공신에 추대되신분은 저앞에 좌 ,우에 초상화로 계신 , 홍가신님과 이원익님이시다 .
가운데 자리가 비워진 것은 그때 초상화를 안그리심을 나타낸 것이라함 (공훈은 않받으시더라도 초상화는 그리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아쉬움 남습니다.)
류성룡님이 사용하던 갓끈
보물 제 460호 16세기 --이신발 어찌나 큰지 배같음 약 300mm 쯤 될것 같음 내 개인 생각임
류성룡이 사용하던 상아 홀
홀은 관료들이 관복을 입었을 때 손에 들던 것이다.
홀은 관품에 따라서 재질이 달랐는데 , 1~4품의 관료는 상아로 만든 것을 사용했다,
서애학파
류성룡과 그 문인들의 학문 경향은 대개 성리학의 관렴적인 사유에만 머므르지 않고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측면을 중요시 하였다. 이는 조정에 오랫동안 출사하며 군사나 행정 등의 실무적인 임무를 잘 수행하였던 류성룡의 영향이 컸다 , 또한 예학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서 정경세 등에 의해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징비록- 반성의 기록
[징비록]은 류성룡이 임진왜란 중에 있었던 여러 사건을 정리한 책이다. 징비(懲毖)는 시경에 '내 그 징계하는지라, 후환을 삼갈 수 있을까,' 라는 문구에서 띠온 것이다. [징비록]은 지난 임진왜란의 참상을 반성 하고 앞으로 닥쳐올 일을 대비하기 위해 지어진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징비록 17세기 초 ,국보 제 32호 , 27.8x25.3cm , 충효당(류영하) 소장
비록 보잘 것 없지만 또한 모두 그 당시의 자취이므로 버리지 않고 두어서 이것으로써 내가 시골에 살면서도 참된 마음으로 나라에 충성하고자 하는 간절한 뜻을 나타내고 , 또 어리석은 신하로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한 죄를 기록하는 바이다. ([징비록] 서문 중에서 )
부귀도 그를 현혹시키지 못하고
빈천도 그를 움직이지 못하며
위세도 그를 굴복시키지 못하도다.
조선의 명재상 게보
클릭하면 크게 보임
이순신장군이 쓰던 2m나 되는 장칼 --그시대 어른들은 체구가 크셨던것 같다 .
류성룡님의 신발 크기도 지금 호수로 300은 될 것 같았다,
류성룡은 전쟁이 일어나기 1년 전에 이순신과 권율을 천거하여 요직에 배치되도록 하였다. 사람의 능력을 중요하게 생각한 류성룡의 인재등용관은 결과적으로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끄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인재 등용에 있어서 류성룡은 사회적 명분과 개인의 배경보다는 실리와 재능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신분이 낮은 사람이라도 재능이 있다면 천거하도록 제안했으며 , 심지어 노비도 능력이 있다면 그 신분을 해방시키고 관직에 임명하고자 하였다.,
도체찰사 류성룡이 입던 갑주
하회마을 하회탈
써비스
류성룡님과 함께 아까우신 분들 중에 .....
가신님들 중에 훌륭하신 분 일일이 손으로 꼽을 수 없으리 만큼 많지만 , 지나는 내눈에 딱 들어오신 두분이 남명 조식 선생님의 화면과
정암 조광조님의 화면이 들어왔다.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 쓰리게 가신분들 .......
비록 사약을 받으셨지만 이나라를 사랑하시어
이나라를 위하시어 다시 오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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