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수원에 있는 화성행궁! (정조대왕이 은퇴후 살기위해 만든곳)

백합사랑 2007. 9. 30. 07:10

화성행궁!

 화성행궁은 1789년 수원 신읍치 조성 이후 건립하기 시작하여 1790년에 340칸이  완성되고 1796년 화성성역이 완성되면서 576칸으로 조성되었다. 사도세자의 현륭원 참배의 목적 외에 정조대왕이 1804년 양위 후 장차 화성에 내려와 노후를 보낼 시설이었으므로 그 어떤 행궁보다도 대규모로 건설되었으며 팔달산 동쪽 기슭 화성의 중앙부에 자리 잡았다 . 화성행궁은 1795년 윤2월 혜경궁 홍씨 회갑연 등의 다양한 공연 예술 및 백성들에게 쌀을 내려주는 양로연을 베푸는 위민행사가 치러진 중심 무대였으나,  일제강점기에 의도적으로 파괴되었다.  이후 1996년부터 복원사업을 시작하여 2002년 1단계로 전체 576칸 중 482칸을 복원하고 2003년 개관하였다.

 화성행궁 앞에서는 무예시연을 하고 있다

행궁 주변엔 아름답고 멋진 나무들이 참으로 많이 있다. 앞에 보이는 세그루의 나무도 보호수 들이다

 화성행궁 앞에서는 무예시연을 하고 있다

 거중기 --실학자 정약용은 화성을 쌓는 전체적인 계획과 방법을 연구한 뒤 거중기 등 새로운 기기를 이용 1794년 화성을 쌓기 시작하여 2년만인 1796년 9월에 완성하였다. 그 결과 화성은 우리나라 성곽 중에 가장 발달된 양식을 갖추었으며, 다른 성에 비하여 적은 비용으로 축성 되었고 사람들의 노력도 훨씬 적게 들었다.  정약용이 고안한 이 거중기는 몇개의 도르레를 연결하여 만든 것으로 당시에는 1만 2천근 (약 7.2톤)의 무게를 들어올리는 획기적인 기기였다.

 느티나무 ---화성행궁의 느티나무는 600년 이상된 노거수로 화성성역이전부터 수원을 지켜온 신령스런 나무이다 영목(營木), 신목(神木), 규목(槻木)이라 고 불려왔으며 옛부터 잎이나 가지를 꺽으면  木神의 노여움을 사 어려움이 닥친다고 하였다.  또한 이 느티나무에 손을 대고 기도하면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서려있다 . 높이는 30m, 둘레는 6m에 이르며, 1982년 경기도 보호수 5-3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화재로 인해 훼손되어 수원시는 2003년 5월에 대대적인 나무살리기를 하여 고목의 위용을 보여주고 있다.

 

*나무 아래쪽에 하얗게 띄가 보이는 것은 사람들의 소원을 닮은 소원성취  발원이 적힌 쪽지들이 매달린 것이다.

 이곳에 가서 알게 된 것인데 대장금의 촬여을 했던 곳이다.곳곳에 촬영 했던 장면들과 장소에 그?의 장면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행궁 넓이는 경복궁보다 좁지만 그 궁의 규모는 거의 궁과 같다.  물론 아직 완벽한 복원은 되지 않았고 현재 진행중인 것 같지만  .....

 

 이곳엔 궁중 악기들을 모아놓은 곳도 있었다

 뒤주---쌀을 보관하는 용기로,  쌀벌레가 생기지 않는 회화나무로 만들어 쌀을 보관했으며 , 특히 양반집 중에는 부를 상징하는 70가마니의 쌀을 넣을 수 있는 크기의 뒤주도 있었다.  왕실에서는 소주방(수라간)에서 보관하였다.

 

이곳에 있는 뒤주들은 뒤주체험을 하기 위한 뒤주들이다.

정조대왕의 아버님이신 사도세자는 1762(영조38)년 윤5월 13일부터 21일까지 뒤주에 갇혀있다 돌아가셨습니다,   영조대왕은 장차 왕위를 이을 사도세자가 정신 질환에 걸려 나라를 다스릴 수가 없다고 판단 하여 뒤주에 가두었습니다,  사도세자는 이뒤주에 갇혀 아무 음식도 먹지 못하고 고통으로 신음하다 돌아가셨습니다,

이뒤주는 가슴 아프게 돌아가신 사도세자의 옛 일을 체험하기 위해 만들어 놓았습니다, 아울러 사도세자께 효도를 다했던 정조대왕의 효심을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이곳엔 왕비를 체험하는 곳도 있다 ㅎㅎㅎ

 

 

 복내당은 행궁의 내당으로 1789년(정조13)에 건립 되었으며, 1794년에 증축되었다.평상시에는 화성 유수의 가족들이 거처하던 곳이다.  이곳의 현판은 정조가 직접 썼다는 기록이 있으나, 현판은 남아 있지 않으며  1997년에 복원된 것이다.         --정조14년(1790) 수원부 신읍치소의 내아(內衙)로 사용하기 위해 건립된 건물이다.

 

 

 

복내당의 의미:  '복은 안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라는 뜻이다. 상량문(집을 짓거나, 고칠 때 공사의 간략한 정보 혹은 앞으로  좋은 일이 있기를 바라는 내용을 적어 보관하는 문서)에는 '.....마루가 봉수당과 마주보니 만년의 술을 들어 헌수하는 정서를 붙이겠고, 문이 장락당과 가까우니 .... 규모와 법도는 거의  연침(燕寢:왕이 휴식하거나 잠자는 공간)을 본땄고 경시는 대체로 부아와 비슷하구나...' 라고 복내당을 설명하였다.

 

 복내당의 부엌으로 당시의 부엌 살림들이 연출되어있어  수원부 유수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장락당은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의 회갑연과 순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어머니를 모시고 수원에서 머물 때를 위해 1794년(순조18) 화성 축조시 새로 지은 건물이다.  이 건물은 장락당과 복수당의 두 건물을 서로 통하게 만들었는데 이는 조선시대 다른 건물에서 찾아 보기 어려운 독특한 구조이며 1795(정조19)년 을묘원행때에는 혜경궁 홍씨가  이곳에 머물렀다.

장락당 의미 : 혜경궁이 만수무강하기를  기원하였던 정조는 중국 한나라  태후의 거처였던 장락궁에서 이름을 따왔다.  장락은 " 오래도록 즐긴다" 라는 의미로 정조의 어머니에 대한 효심을 느낄 수 있다.  장락당의 현판은 정조의 친필이다.

 

 침소에 들기전 혜경궁 홍씨  장락당이 지어진 다음해 1795년(정조19) 을묘원행 때 혜경궁 홍씨가  실제로 이곳에서 머물렀다.  침소가 차려진 혜경궁 홍씨 방을 연출한 공간이다.

 

혜경궁 홍씨 진찬상

1795년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진찬연이 화성행궁 봉수당 앞마당에서  열렸습니다. 혜경궁 홍씨를 위한 진찬상에는 70종의 음식과  42개의 상화床花를 올렸는데 음식은 고임을 높게 올리고 42개의 상화를 꽂아서 장식했습니다.

 

화성 행궁의 정전 봉수당 : 봉수당은 임금 행차시 정전(正展)으로 쓰인 건물로 중심 4칸을 왕권을 상징하는 편전공간으로 연출하였다.

 

 

 지난번에 갔을때는 정조대왕이 책을 보았는데

오늘은 꼿꼿하게 앉아 계신다 ㅎㅎ

 

봉수당에서의 진찬연 : 혜경궁 홍씨의 진찬연을 부분 연출한 것이며 여관이 보좌하고 있다

 

정조대왕이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게 진찬연에서 예를 드리고 있는 장면

 

 

 외정리소 : 외정리소는 정조를 비롯한 역대 임금이 행차시 화성행궁의 행사를 담당하는 관청이다.   정리사가,  행사의 준비를 위해 행사 기물을 기록하고 정리하는 장면을 연출하는 공간이다.

 

 봉수당과 장락당 뒤편의 행각에 위치한 공간으로  환관이 책을 보고 있는 장면과  환관이 채비를 서두르고 있는 장면들이 연출되어 있고.

 

또 한편엔 단장하고 있는 상궁의 모습과 바느질을 하고 있는 나인의 모습을 그들의 처소와 함께 연출해 놓았다.

 

 

 노래당  의미 : 노래란 말은 "늙은 것은 운명에 맡기고 편안히 거처하면 그 곳이 고향이다." 라는 백거이(당나라 시인)의 시에서 따온 것이다. 1797년 원행 때에 정조가 지은 시 "노래당구점" 에서 주나라의 노래자가  나이 70이 넘어서도 어버이에게  재롱을 부렸다는 고사를 인용하였는데, 이 역시 정조가 장차 화성에 내려와 혜경궁을 극진히 모시겠다는 뜻을 잘 표현 하였던 것이다.

 

 이 현판은 아래 건물에  붙어 있는 것으로 이건물 옆엔 초등학교가 바로 곁에 있다 아마도 지금 있는  학교자리는 행궁자리가 아닌가 싶다. ......

향 나무인듯한  참으로 아름다운 나무가 있는데 설명도 없고 보호 지정도 되어있지 않았다  아직 진행중이라서 일수도 있겠고 이곳엔 아름답고 보호수가 너무 많다보니 그런지????

 동판과 타일?로  그려진 을묘원행길 1795년 8일간의 화성행차도 벽에 전시 되어있다.

 타일?로 그려진 화성행차도

 화령전(華寧展)  : 화령전은 1800년 6월 28일 정조대왕께서 돌아가시고 난 이후 정조대왕의 어진(초상화)을 봉안하기 위해 만든 어진봉안각으로

정조대왕의 초상화는 평생 세차례 그려졌는데 화령전에는 융복(군복) 입은 초상화를 모셨고 , 화령전은 화성에서 화자를 따고, 사서삼경의 하나인 [시경]에서 '돌아가 부모에게 문안하리라  귀령부모(歸寧父母)'에서 '령寧'자를 따서 붙인 것입니다.

곧 화령전은 국왕 순조가 화성에 묻힌 선왕 정조를 찾아가 문안을 여쭙는 전각이었던 것입니다,   정조의 사당인 이곳에서는 역대 국왕이 현륭원과 건릉을 다녀갈 때마다 제향을 올렸으며 현재의 초상화는 2005년에 새로 제작한 것입니다,

 

화령전을 구성하는 주요 건물은 정조의 어진을 봉안한 정전, 화재나 홍수등 만약의 사태가 났을 때 정조의 어진을 옮겨 모시는 이안청, 그리고 국왕 및 제사를 모시기 위해 화령전에 온 관리들이  몸을 깨끗이 하고 대기하는 재실, 화령전 제사를 담당하는 관리들이 업무를 보는 전사청 등이 있습니다.

 

 화령전에 있는 제정 : 제례에 사용될 정화수를 뜨는 우물로 어정(御井)이라고 한다.

화성의 제정은 물이 풍부하고 현재도 46개 품목을 모두 통과하는 가장 좋은 물로 판명되었다.

 운한각 : 정조대왕의 초상화가  모셔진곳

 

정조대왕의 초상화 : 초상화는 2005년에 새로 제작한 것

신연神輦

신연이란 국왕의 장례시에 신백神帛을 모시고 가는 연이다. 화령전의 신연은 사도세자가 묻혀계신 현릉원 재실에 봉안되었던  정조의 어진(초상화)을 이곳으로 옮겨오기 위해 특별히 제작된 연이다.

수원시는 일제강점기에 사라진 신연을 고증을 통해 2008년 복원하여 원래의  위치에 설치하였다.

 

 

 운한각 옆에는 아름다운 소나무 한그루가 있다.

 

이 사진은 2015년 12월 6일

운한각 전경

 

 화성행궁 전경

 화성행궁 뒷편 화성에서 내려다 보이는 미로한정(未老閒亭),    행궁전경과 수원시내

 

 

 어연 : 임금의 거동에 타는 가마

 가교 : 가교는 가마의 양끝을 말의 안장에  연결하여 두 마리의 말이 앞뒤에서 끌도록 힌 것을 말한다.

이가교는 을묘원행때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한양에서 화성(지금의 수원)까지 모시기 위해 정조의 전교에 의해 특별히 만든 것으로 무려 29분야의 장인 120명이 제작에 참여했다고 [원행을묘정리의궤]에 기록 되어있다.

 

 

 

화성행궁의 주변  맨위 오른쪽 대나무사진은 여자 화장실 창으로 보이는  멋진 풍경이라서 ㅎㅎ

 중간 왼쪽에 대문은 무예24기 생들이 무예를 연마하는 곳이고 ,

중간 오른쪽은 수원의 화성 남문인 팔달문 !

 

아래 왼쪽의 사진은 교회사진이 왠지 정겹게 보여서  그옆에 오른쪽에 한정식식당안에 정조대왕 초상화가 모셔져 있어서 .....

 

 

앞으로 이어질 행궁의 이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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