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와 작품

서울 시립미술관에서 빈센트 반 고흐전이 열리고 있다.

백합사랑 2008. 1. 5. 09:39

 빈센트 반 고흐 , 괴팍해 보이는 그의  초상화나  흔들리는 듯한 그의 그림을 보며  어릴 때 별로 좋아하지 않던  화가였다.

그런 그였으나 그의 생애를 보며 그림보다 그의 인생에 감동되고 아니 그보다 그의 동생의 형제애에 더욱 반하게 된다.  

---헬렌 크뢸러 뭘러 --도  " 반 고흐의 가치는 그의 표현 방식이나 기술 때문이 아니라. 그의 위대하고도 새로운 인류애에 있다." 고 말하기도 했다.

 

고흐는 37년 간의 생애에서 1,900여점이 넘는 그림을 그렸지만 가난과 병, 그리고 외로움에  시달리다 생을 마감했다.

 

 

 1853 . 3. 30일 벨기에 접정지역 근처 브라반트 지방의 준데르트  목사인 테오도루스 반 고흐(1822-1855)와 안나 코르넬리아 반 고흐 카르벤투스 (1819 -1907)의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는데 , 고흐라는 이름은 1년 전 그가 태어난 날과 같은  날 죽은 형의 이름과 같다.

 

    19세 때의 반고호

 

 

 '반 고흐의 자화상' ,1887.8.9 , 마분지에 유화, 40.9x32.9cm, 반 고흐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재단), 암스테르담

 

 '화가의 자화상 ', 1888  , 반 고흐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재단), 암스테르담

 

  1857년 5월 고흐가 가장 좋아했던 동생이자 그의 화상이며 그의 후원자였던 테오 반 고흐가 태어났다.

 반 고흐의 동생 테오 반 고흐

 

반 고흐는 1861-1868년 사이 준데르트 공립학교에 다니다  그 후 지벤바겐의 기숙학교에 입학하여 영어와 불어, 독일어를 배우다 심한 향수병으로 1866년 틸뷔르그의 중학교로 옮긴다.

 1869 15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삼촌이 설립한 헤이그에 위치한 미술상이자 출판사인 구필화랑에 수습으로 취직, 1871년 목사인 아버지도 헤르보이트 교구목사로 임명되어 가족이 함께 이주 .

 

 반 고흐의 어머니와 아버지

 

 반 고흐의 여동생들

 반 고흐의 여동생과 남동생

 

 

 

농가

1890. 5-6 ,  캔바스에 유화  38x45cm,  반 고흐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재단), 암스테르담

 

 

 

 아이리스

 1890 .5   캔바스에 유화 , 92x74cm ,반 고흐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재단), 암스테르담

 

 

프로방스의 시골길 야경 (사이프러스와 별이 있는 길)

1890 .5   캔바스에 유화 , 90.6x72cm , 크뢸러 뮐러 미술관, 오텔로

 

위의' 아이리스'와 '프로방스의 시골길 야경'은 고흐가 정신병원에서 병세가 조금 회복 되었을때 그린 많은  작품들 중에 두 작품인데   당시 파리의  전시회에서 호평을 받았던 수작이다.

 

 

 몽마주르에서 바라본 라크로

1888 , 반 고흐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재단), 암스테르담

 

 뉴욕 소더비에서 두번째로 높은 가격을 받은  '의사 가세의 초상'

 

 

 

 

 

 

 오베르의 교회

1890 , 캔바스에 유채 , 94x74cm , 파리 오르세미술관

 

 

 해바라기

1888 ,  반 고흐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재단), 암스테르담

 

 하얀과수원 ,

 1888,    반 고흐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재단), 암스테르담

 

 

 

 추수 ,

 1888,    반 고흐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재단), 암스테르담

 

 몽마르트의 채소밭,

  1887 , 반 고흐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재단), 암스테르담

 

 

 양털 깎는  사람들(밀레 모작) 

 반 고흐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재단), 암스테르담

 

 감자먹는 사람들 ,

1885,   반 고흐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재단), 암스테르담

 

 

 브라반트의 회상,

 1890,    반 고흐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재단), 암스테르담

 

 

 빈센트 반 고흐 (1853-1890) ,'아를의 반 고흐의 방 '

1889년 캔바스에 유채

이그림과 똑같은 그림을 3점 그렸다고 한다 한점은 동생에게 그리고 한점은 친구에게 그리고 이곳에 있는 이그림은 똑같은 세점 중에도 제일 잘 그려진 것으로 어머니에게 보내졌던 그림이라 함 .

 

 

 슬픔  , 석판화 ,

 38.5 x29cm , , 1888,    반 고흐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재단), 암스테르담

 

 식탁 앞의 남자  ,

 1885, 캔바스에 유화 , 44.3x32.5cm , 크뢸러 뮐러 미술관, 오텔로

 

  노란 집(거리)

1888.9  캔바스에 유화 , 72x91.5cm ,,    반 고흐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재단), 암스테르담

 

 베틀과 방직공 ,

1884 6-7 , 캔바스에 유화  61x 93cm ,  크뢸러 뮐러 미술관, 오텔로

 

 감자 캐는 여인들 ,

1885.8   31.5x42.5cm , 크뢸러 뮐러 미술관, 오텔로

 

마을 뒤 편 집들  ,

캔바스에 유화 , 43.7x33.7  , 반 고흐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재단), 암스테르담

 

 셍트마리드라메르의 풍경,

1888. 6 , 캔바스에 유화 , 64.2x53cm , 크뢸러 뮐러 미술관, 오텔로

 

 

 셍트마리드라메르의 바다풍경,

 1888. 6 , 캔바스에 유화 , 51.x 64cm ,  반 고흐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재단), 암스테르담

 

 수레국화 , 데이지, 양귀비, 카네이션이 담긴 화병

1886.6-7 , 캔바스에 유화, 80 x67cm ,  트리튼재단 , 네덜란드

 

 

 압생트가 담긴 잔과 물병

 1887.2-3 , 캔바스에 유화 , 46.3x33.2cm   반 고흐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재단), 암스테르담

 

 밤의 카페 테라스(부분)

1888  , 크뢸러 뮐러 미술관, 오텔로

 

 

 

 셍레미 병원의 정원

캔바스에 유화 , 91.5x72cm  , 크뢸러 뮐러 미술관, 오텔로

 

 산이 있는 밀밭

1889.11-12 , 캔바스에 유화 , 73.5x92cm  , 크뢸러 뮐러 미술관, 오텔로

 

 

 비탄에 잠긴 노인(영원의 문에서)

1890.5  캔바스에 유화 , 81.8x65.6cm  , 크뢸러 뮐러 미술관, 오텔로

 

 

 

 

 감자 깎는 여인

1881 . 10 . 11 , 종이에 검정 초크, 펜, 잉크, 수채, 59.5x47.6cm , 크뢸러 뮐러 미술관, 오텔로

 

반고호 <자화상> , 1889년 캔바스에 유채 57.2x43.1cm

뉴욕, 존  혜이 휘트니 부인 컬렉션

 

 뉴욕 메트로 폴리탄 미술관에 있는 '해바라기'

 

 반 고호 ,  <폐르 탕기의 초상> ,

 1887년 캔바스에 유채 , 64x50cm ,  개인 소장

 

반 고호  <밤의 카페 > , 1888년 , 캔바스에 유채 , 69x 88cm

코네티컷 , 뉴헤본 예일 대학 , 대학미술관

 

 

 

 오베르 공동묘지에 안치된  반 고흐와 테오의 무덤

테오 반 고흐는 죽어서도 형 빈센트 반 고흐를 지켜주려 그의 곁으로 간것 같다

  

 

1872년 헤이그에서 함께 휴가를 보낸 뒤 동생  테오와 편지를 교환하기 시작하여 거의 18년간 지속한다.

 1873년 6월 새로 설립된 구필화랑의 런던지잠으로 발령나 런던으로 옮겨가는 도중 파리를 여행하면서 루브르박물관과 뤽상부르박물관을 방문하고, 런던에서 그는 바르비종파와 헤이그파의 작품을 복제한 그림 사이에서 수 많은 예술작품을 비교하는 일에 재미를 느꼈고, 런던에 갤러리와 박물관을 방문하며 런던의 예술가들을 평가하기 시작한다. 그해 11월 동생 테오가 구필화랑의 헤이그지점에서 일하게 된다.

 1874년 하숙집 딸 유진 로이어에게 사랑을 고백하였으나 그녀의 거절로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깊은 절망에 빠져 점차 종교에 관심을 갖게된다.

 그후 점점 더 종교에 심취하며,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매일 저녁 성서를 읽으며 보낸다고 썼다.   파리로 전임한 일과 예술품 판매하는 일에 불만을 갖게되고  직무에 점점 소홀해지기 시작하면서 상사와 손님들과 갈등을 겪는다. 계속 박물관을 찾지만 , 그의 편지는 매우 우울해진다. 이런 여러 요인들로  

 1876년 결국 구필화랑에서 해고된다.  그해 4월 영국의 램스게이트에서  보조교사로 일하다  7월부터 런던 근교의 아일리쉬에서  보조 전도사로 일하며, 신앙심이 커진다.

 1877년 1월 크리스마스를 보내려고 고향에 돌아간 뒤 영국으로 되돌아가지 않을 것을 결심하고 네덜란드로 돌아와 부모의 도움으로 도르트레히트에 있는 브루세 앤 반브람 서점에서 일하지만 행복해지지 않아,  동생 테오에게 복음 전도에 대한 그의 희망을 밝히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선교사역에 관심을 가지고 집착하게 되어  그의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사가 될 결심을 하며, 신학교 입학을 위해 암스테르담으로 가서 독서를 많이 하고 그림을 많이 그린다. 네덜란드 국립미술관 전신인 트리페뉘스를 방문하고  그곳에서 램브란트의 유화와 판화를 본다. . 신학교 입학을 위한 공부가 너무 어렵다고 느끼고

 1878년 7월 준비했던 신학대학교에 낙방한 뒤 신학 공부를 포기하고 브뤼셀의 라켄으로 가서 전도사가 되기 위해 교육받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역시 맞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가 12월 다시 자신의 소명을 따르기 위해 벨기에의 탄광촌 보리나주로 가서 가나한 광부들에게 복음을 전파한다.

 1879년 급여를 받는 임시 전도사로 일하게 되었는데 고흐는 그들의 열악한 환경을 보고 충격을 받아 온 힘을 다해 그들을 도우려 하는데 장로들은 고흐의 이런 처신에 신경을 써 그가 광신적이라는 핑계로 재계약을 하지 않는다.

 1880년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불안한 미래에 대해 고백한다.  테오는 그의 월급 중 일부를 반 고흐에게 매달 지급하기 시작한다.  이는 반 고흐의 생을 마칠

때까지  계속 되엇다.      그해 8월 선교사역을 포기하고, 광부들의 삶을 스케치하는 데 전념 , 동생 테오의 의견을 받아들여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1881년 화가로서의 네덜란드 시기가 시작 되었다.  12월 부모와 사이가 점점 나빠져 헤이그로 떠났다.

1882년 1월 마우베에게 데생 및 회화수업을 듣는다.  그해 3월에 시엔 호르닉이라는 임신한 매춘부를 만나 그녀는 그의 단골 모델이 된다.

그의 삼촌 코르넬리우스로부터 헤이그의 풍경을 그린 18점의 드로잉을 첫번째 주문 받았다. 헤이그에 머므는 동안 그는 인물 연구작과 풍경 및 도시 경관을 그리기에 집중한다.  모델은 주로 평범한 사람들이었는데 양로원의 노인들이다.

1883년 9월 시엔과 헤어진다. 그후 드렌테로 떠나 그곳에서 뉘우- 암스테르담과 호게빈에 머물다.  동생 테오가 그를 후원하고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주변 풍경을 그렸다. 드렌테와 농부들의 자연스런 아름다움에 만족하지만 좋지 않은 날씨와 고독, 작업실의 부재등으로 힘들어 하다 12월에 부모의 집인 뉘넨으로 돌아간다.

 1884년  1-2월 밀레의 영향을 받아 농민의 삶을 그리는 화가가 되기 위한 일환으로 방직공장에 대한 많은 유화와 수채화를 그린다.

3-4월 동생 테오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것 때문에  모욕 당한다.

 1885년 3월에 아버지 테오도루스 반 고흐가 갑자기 사망한다.  <감자먹는 사람들>을 그리기 위해 인물의 머리와 손에 관한 무수한 연구작을 남긴다.

 

 1886년 2개월간의 인물 회화 및 데생 수업과 석고상 수업을 받는다.

 3월에 파리 몽마르트에서 동생 테오와 함께 작업실이  딸린 곳에서 산다.

동생 테오는 구필화랑에 속한 발라동화랑을 운영하며 바르비종파와 인상파의 작품을 판매한다. 이때 고흐는 페르낭 코르몽의 문하생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에밀베르나르와 뜰루즈 로트랙 , 존 러셀을 만나며 , 동생 테오가 많은 인상파 화가들에게 소개해준다. 그는 돈이 되는 작품을 그리기 위해 꽃을 주로 그린다.

 1888년 대도시 생활의 바쁜 생활과 긴장으로 인해 심신의 피곤함을 느끼고 그는 프랑스  남부 아를르로 가서  노란 집의 방 몇개를 빌린다. 그곳에서 화가 공동체를  실현하고자 해서 . 고갱과  10월에 합류한다.그들은 두 달간 풍경과 초상을 그리고 작품에 관해 의논하며 매우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한다.

그러나 12월쯤 고갱과의 관계가 악화된다.

고흐는 이때부터 정신병 초기 증세를 보이며 , 고갱과 예술에 관한 논쟁을 벌인 끝에  자신의 오른쪽 귀 일부를 잘라낸다. 이튿날 경찰은 침대 위에서 거의 죽은 듯이 보이는 반 고흐를 발견하고. 정신병원으로 후송한다.

고갱이 이사실은 동생 테오에게 전해, 테오가 병원에 왔다. 이튿날 고갱은 테오와 함께 파리를 돌아온다.

 1889년 1월 7일 병원에서 퇴원했으나 다시 또 병원에 들어가게 된다. 고흐는 다시 아르르를 떠나 셍레미에 있는 셍폴드모졸 정신병원에 스스로 입원한다. 점점 심해지는 발작을 괴로워하며 그림을 그린다. 그해 12월 발작이 너무 심해져서 물감을 삼킬 위험이 있다고  그림 그리는 것을 금지시킨다.

 1890년 브뤼셀에서 열린 '제 7회 20세기 그룹전'에 작품 6점을 전시한다.다시 '앵데팡당전'에 작품 10점을 전시한다.

이해 3월 29일 반 고흐의 37번째 생일을 맞아 동생 테오가 " 오베르의 의사 가쉐에 대해 반 고흐를 돌울 수 있을 유능한  사람이라고 편지를 보낸다.

 정신 병원이 싫어진 고흐는 병원에서 나와 파리에 동생 테오를 만나고 , 파리 북서쪽에 올베르 쉬르 우아즈에 라브 여인숙에 거처를 정하고 의사이자 작품 수집가인 가쉐의 보호아래 그림을 그리며, 기록적으로 많은 수의 작품을 남긴다. 두어달후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로 느껴진다고 말한다.

며칠후 오베르 근처의 밀밭에서 스스로 가슴에 총을 쏜다. 3일후인 7월 29일   동생  테오가 지켜보는 가운데 " 인생의 고통이란 살아있는  그 자체다 " 라는 말을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

고흐는  일생동안 1900점이 넘는

그해 10월 동생 테오는 몸과 마음이 극도로 쇠약해져 파리에서 병원에 입원한다.

1891년 동생 테오가 유드레히드에 있는 정신병원에서 사망하여 유트레히트에 안치한다. 

 1894년 동생 테오의 시신이 오베르  공동묘지에 있는 반 고흐의 무덤 옆으로 이장 된다.

테오는 살아서도 그토록 형 곁에서 늘 힘이 되어주더니 죽어서도 곁에서 지켜주는 듯하다.   정말 아름다운 형제애의 정을 보았다

 

 

 

 출처 / 불멸의 화가 반 고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