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여행

두보초당 , 신라왕자의 대자사(무상선사) , 유비의묘 무후사 ,낙산대불

백합사랑 2008. 4. 25. 10:03

 

 두보초당 (杜甫草堂)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시인 중 하나로 "詩聖"이라 불리는 두보가 성도에 잠시 있을때 기거하던 곳으로 성도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평생 정치에 대한 뜻을 두었음에도 그 뜻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던 두보가 759년 겨울, 안사의 난(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이 정권찬탈을 위해 일으켰던 반란) 을 피해 현종(玄宗)을 따라 촉으로 피난을 왔을때,   친구 엄무(嚴武)의 도움으로 서쪽 교외의 경치 아름다운 호숫가에 초가집을 짓고 살수 있었다.  피난 이듬 해 봄에 초가집이 완공되자 사람들은 이곳을 성도초당(成都草堂)이라고 불렀다.   또 완화계(浣花溪) 근처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완화초당이라고도 한다.

원래는 북송 때 지어진 사찰인 범안사(梵安寺) 였는데 두보가 머물 당시는 작은 규모였지만, 명 . 청나라 때의 확장공사를 거쳐서 현재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두보는 이 곳에서 4년여 동안 살았는데 , 이 때 지은 시중에서 현재까지 전해지는 시는 240여 수가 넘는다.

현재 보존되고 있는 초당은 1500년과 1811년 두 차레의 확장공사로 인해 넓이가 20ha가 조금 넘으며 경내에는 대해(大懈), 시사당(詩史堂), 공부사(工部祠), 사능초당(沙陵草堂)의 석비 등 건축과 다른 많은 문화재가 있다. 정문에 들어서면 시사당과 두보의 소상(塑像)이 있고, 양쪽의 진열실에는 두보의 시집과 연구서 등이 전시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복거(卜居), 충야희우(春夜喜雨), 강촌(江村) 등의 시는 초당에서 지내던 그의 시름없는 한가로운 심경을 읽을 수 있다.

< 강촌(江村) >

맑은 강 한 굽이 마을을 감싸고 흐르는데

기나긴 여름 강촌은 만사가 한가롭다

제비는 마음대로 처마를 들고나고

수중의 갈매기는 가까이 가도 날아갈 줄 모른다.

늙은 아내는 종이에 바둑판을 그리고

어린 아들은 바늘을 두드려 낚시바늘을 만드는구나

다병한 몸에 필요한 것이란 오직 약물뿐

미천한 이내 몸이 달리 또 무엇을 바라리오

 

당나라 때  유명한  시인으로 두보와 이백 두분이 있는데 두보의 시는 서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득 담은 시를 썼고 이백은 낭만적인 시를 썼는데  이백의 시보다 두보의 시를 더 존중하고 사랑한다 하며 시성이라는 칭호까지 주었다함

이백과 두보는 사천성에서 두번 만났다하네요.

 

 첫번째 문을  들어서면 경내는 나무와 새가 반긴다

 

 두번째 문에 있는 두보상

 

 두번째 문에 있는 두보의 상

 

 

  천(川)을 건너는 다리가  있고 주변엔 대나무로 아름다움이 마치 선경이다

 

 

 

 다리를 건너면 두보의 상을 모셔 놓은 곳

 

 두보의 상

 


두보초당 안에는 두보 기념관?이 있는데 그  안에는  두보의 시를 적은 많은 책이 진열되어 있음

 

 

 

 

 

 

이곳이 두보가 살던 초당

 

 

두보초당에 객실

 

 

부엌

 

부억 

 

서재

 

침실

 

 당나라 때 유적지와 그곳에서 나온 유물들이 있는 박물관

 

 

 

 사진은 모택동이 두보초당을 방문 했을때 찍힌 사진으로 관광거리가 된다함

 

 

  나도 모택동의 모습으로 한장 .....

 

 

 

 

 초당 앞에서

 

 당나라 ? 유명한 사람들을 ......만들어 놓은 기념관

 

 이곳은 현. 근대에 다녀간  세계에 유명한 인물들의 사진을 전시해 놓은 전시관 그중에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김영삼 전 대통령과 박근혜씨의 사진이 있어서 ......

 

 두보초당앞에는 두보공원이 있는데 아침이라 운동을 하고 있는 모습

 

또 발길을 부지런히 재촉하여 도교의 성지 청양궁을 찾았다.

청양궁은 노자를 기리는 역사가 오래된 도교 사당이다.  청양궁(靑羊宮)은 당나라 때인 666년에 창건되고 청나라때 재건된 도교사원이며, 이름의 유래는 도교의 노자가 한권의 책을 지어 도성의 관리자에 주면서 말하길, " 책을 다 읽은 후에 날 찾아오라" . 그 관리자가 책을 다 읽은 후 찾아 갔을 때는 노자는 이미 없고, 그곳에 아이 하나가 양 두마리를 데리고 있었다. 관리자는 그 양이 노자의 환생이라고 생각하여 그곳에 도교사원을 짓고 청양궁이란 이름을 지었다." 고 한다.

노자와 공자 이 두사람이  살았던 춘주전국시대는 가장 혼란했던 시기중에 하나로, 근 700여년간 끊임없는 전쟁으로 얼룩졌던 시기이다. 이때 무수한 사람들이 전쟁과 기근으로 죽고, 전염병과 자연재해로 죽으며, 부모 자식, 집과 논밭을 잃고 유랑을 하다가 죽기도 했다.

 공자는 혼란한 중국의 원인을 질서가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결론짓고, 이를 타파하기 위해서 강력한 질서의 회복을 주장한다.

  유교에서 말하는 질서란 일군만민, , 즉 강력한 왕이 하나 있고, 그 밑에서 만 백성들이 복종하고 따라야만 질서가 회복된다고 하였다.  아무리 성왕이라도, 모든 백성과 모든 지역을 다스릴수는 없기 때문에 왕의 일을 덜어줄 사람들이 필요한데 그 사람들이 사대부 라는 것입니다.  즉, 성군이 왕좌에 오르고, 교육을 통해 충과효 인과의를 갖춘 선비들이 그 왕을 보좌하며, 그외 모든 백성들이 이들을 믿고 절대 복종한다면, 당시와 같은 전쟁이 일어날 필요도 없고, 또 평화로운 시기가 도래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성군과 어진 선비, 어진 백성들은 그냥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라 , 끊임없는 교육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것이니, 이들을 가르치고 교육할 수 있는 것은 옛 시기의 경전과 역사라고 보고 , 이를 중심으로한  교육체계를 확립한다.  이것이 바로 유교라는 학문이 형성된 배경이다.

   반면에 노자는 당시 중국의 혼란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사람들이 쓸데없는 욕심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즉, 사람은 누구나 착하고 어질게 태어나 우리 눈에는 보이지않는  자연이 이치, 소위 도 라는 것에따라 잘 살 수 있는데. 어려서 부터 쓸데없는 가르침과 교육을 접하게 되면서, 서로 욕심과 탐욕을 가지게 되어 세상이 이렇듯 혼란해 진 것이라고 본 것이다. 

  따라서, 무위자연, 즉, 타고난 천성데로 그냥 살게 놔두면 된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 먹기 위해선 일하고, 일하다 지치면 쉬고, 본성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살게 놔두면 서로 마찰을 일으킬 필요도 없고, 싸울 필요도 없으며, 자신은 근심과 걱정없이 살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모태로 학문보다는 종교에 가깝게 발전된 것이 바로 도교이다.

유교나 도교, 그외 제자백가에 속하는 모든 학문은 혼란했던 당시의 원인을 밝히고, 그러한 시대가 다시 오지 않게끔 방지하고자 했던 노력에서 출발한 것이고, 그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의 주장을 따르는 후세의 사람들이 좀더 체계화 시키고, 현실에 반영하면서 발전한 학문이 노자사상이다.

 

도교와 유교의 차이점

유교 특히 성리학에서는 인격적으로 완성된 사람을 군자나 성인(聖人)이라고 하는데,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을 포함한 세계의 참모습에 대하여 밝게 알아야 하며(格物致知), 양심을 보존하고 본성을 함양하면서 나쁜 마음이 스며들지 않도록 잘 살혀서 단호하게 물리쳐서(存養省察), 개인의 지나친 욕망을 조절하여 중용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인간의 기질을 변화시켜 본래의 선한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유교는 도덕적 실천과 학문의 연마를 통해 자신을 수양해가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고, 도교는 인의(人爲)에 의해서는 본래의 선한 모습을 발휘할 수 없으므로 자연적 본성을 지니고 자연의 원리에 따를 것을 강조한다. 어린애와 같이 그대로의 순진한 모습과 자연의 섭리대로 살아가는 인간의 소박한 삶을 이상적 인간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처럼 인간이 인위적인 가식과 위선에서 벗어나 본래의 자기 모습대로 살아가는 것을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고

 

 청양궁 정문앞

 

 비석아래 거북 같이 생긴 동물 이름은 '비시'라 하는데,   용의 9번째 아들로  아버지의 말을 않듣고 애를 먹인관계로 얼굴은 용이고  몸은 거북 같고 다리는 돼지발? 등 하여간 여러 짐승들이 한부위씩 닮게 되었다함

 

 

 

 

 

 팔괘정

 

 팔괘정 앞에는 팔괘가 그려진 돌이  보인다

 

 삼청전 앞에 12지상에 관한 설명을 가이드가 해주고 있다.

 

삼청전 앞에  12지상 앞에서

 

 

 



 삼청전에 있는 대종? 범종?

 

 

 

 삼청전 앞에는 청동으로 주조된 銅羊이 있는데 좋은 운을 가져다 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중 한 마리는 청나라 옹정 원년에 만든 것으로 구조가 대단히  기괴한데 12지상 즉 쥐의 귀, 소의 코 , 범의 발 , 토끼의 등, 용의 뿌리, 뱀의 꼬리, 말의 입, 양의 수염, 원숭이의 목, 닭의 눈, 개의 배, 돼지의 엉덩이를 한 몸에 모아 놓았다.

  이것은 청대에 한 대학사(大學士)가 송대 재상의 유물이었던 것을 북경에서 사와 청양궁에 기증한 것이라 한다.

 전하는 말로는 이 양이 태상노군이 타던 것으로 모든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 병에 걸린 사람이 이 청양을 한번 만지면, 그 병이 곧 치료된다고 한다.ㅎㅎ

 

 궁 밖을 나오면 다시 현대가 된다 2층 버스에 많은 사람들의 발길

 

싱싱한 과일이 먹고 싶었지만 살 시간을 주지 않아서 사진만 한장  

 

 

 대자사와 무상선사(無相禪師)

대자사는 신라 성덕대왕의 3남이었던 무상선사가 말년 20년을 보내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선풍을 드날린 곳이다.  성도 시내 번화가인 춘시루에서 도보로 10여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다.

대자사 입구에 들어서면  천왕전이 있는데 가운데는  아래사진에서처럼 포대화상 모습의  불상으로 주련에는 '광박신여래'라 적혀있고  양쪽으로 사천왕이 있다.

  

 

 천왕전을 지나면 관음전이 보인다.



 관음전에 모셔진 관음보살상

 


목어

 

운판

 

 

신라고승 ' 무상선사' 1200년째 중국에서 (경향신문 베이징/ 홍인표 특파원) 추앙을  받고 있다. 2007년 02월 24일자

 신라 성덕왕 셋째아들로 출가해 당나라로 갔던  '無相禪師 (684~762)'가 1200년이 지난 지금도 중국인의 추앙을 받고 있다

무상선사가 선종에 입문한 곳은 중국 쓰촨성(四川) 네이장(內江)시 쯔중현(資中)의 寧國寺, 현 중심지에서 북쪽으로 10리쯤 떨어진 치선산에 자리잡은 이 곳은 한나라 헌제때인 서기 200년 세워진 중국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이 일대에는 아직도 무상선사와 얽힌 고사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마을 노인들은 무상선사의 속세 성인 金씨를 딴 '진허상(金和尙)'  이라는 이름으로 기억하면서 " 그는 기인으로 , 보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어 물이나 불을 피할 수 있고, 창칼도 뚫을 수 없었다" 고 전했다.

현재 영국사 대웅전에는 무상선사와 스승인 處寂선사. 그리고 처적선사의 스승이며 중국 선종의 계파(保唐禪派)를 만든 智詵선사(세수 93세로 서기 702년 입적) 등 3명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서기 728년 당나라 수도 長安 : 현재 시안 - 을 찾았던 무상선사는 이후 영국사를 찾아와 2년 동안 처적선사 곁에 머문 뒤 절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어하구(御河溝)라는 동굴에서 혼자 수행했다.

처적선사는 입적 직전 무상선사를 수제자로 인정해 선종의 법통을 잇는 '목면가사(木棉袈裟: 석가모니가 물려준 가사로 중국에는 인도의 달마대사가 들고와 선종의 수제자에게만 물려준 것으로 전해짐)' 를  물려받았다고 쯔중현 작가협회 테보웨(鐵波樂) 주석은 전했다. 현재 영국사는 주지 시칭더(釋淸德)  스님이 800만 위안의 시주를 모금해 과거 모습을 갖추기 위한 불사가 진행중이며 , 오는 6월 모두 마칠 예정이다.

무상선사는 서기 742년, 절도사의 초청을 받아 영국사를 떠나 쓰촨성 청두(成都)로 옮겼고, 당시 안사(安史)의 난으로 피난왔던 당나라 현종을 만나는 기회를 가졌다. 현종은 무상선사에게 大慈사를 하사했다.  스님은 20년 동안 선종의 일파로 염불선 위주의 정중종(淨衆宗)을 세웠다.    그는 서기 762년, 대자사에서 앉은채 입적했다.   세수 79세

  

 

 祖師堂  부근에는 祖師亭이라는 현판이 있는 곳에 무상선사에 관한 비석이 있는데 한쪽에는 한글로 쓰여있다. 

비석에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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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살 참회가 있는 기간인지?

호궤 합장을 한 모습이다!

 

  이곳은 대웅전인데 일반인은  출입을  할 수 없는지? 철 창살문으로 닫혀 있고

 

 

 

 창살문앞에 자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만져서 노랗게 반짝인다 ㅎㅎㅎ

 

 대웅전에 모셔진 석가모니불상-- 들어가지 못해서 창살문 틈으로 찍은 사진이라 ......

 

 

 

 대자사 설법당에는 3가지의 귀중한 것이 있는데 하나는 삼장법사의 ' 두 과의 사리', 또 하나는  피로 쓴 '血葉經', 그리고 또 하나는 강희황제가 쓴 친필 글씨인 사진 중간에 금으로 쓰여진 '空林'이라는 글씨라고 함. 아쉽게도 혈엽경이나  삼장법사의 사리는  수속절차가 복잡하여 친견하지 못하고   생략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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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슨 법요식이 있는지?

 법요식에 참가한 분들이 길게 줄을 서서 염불을 하며 염불당으로 들어서고 있다. 

 이곳에도 목어

 이곳은 장경각인데  행사가 있어서 그러는지?  많은 사람들로 법석이어서  들어가질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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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당앞에는 청동 사자상이 있는데 할머님이 손으로 사자의 온몸을 정성스럽게 만진다

만지면 건강장수하는지? 사자가 간지러워 웃는 듯 보인다 ㅎㅎㅎ

 

 

 관광하느라 애썼으니 중국에 유명한 동인당한의원에서 직영하는 약선음식을 맛보여준다고

 음식점안이 예사롭지 않다 ㅎㅎㅎ

 

 깔끔한 맛이  한약 냄새도 나지 않고 좋았다

 

점심을 먹었으니 다시 관광을 시작

무후사(成都 武候祠)로 발길을 재촉

무후사는 성도에 있는 제갈공명사당으로,  무후란 제갈공명이 죽은 후 시호인 충무후(忠武侯)에서 따온 것으로 6세기 초 당시에 유비를 모신 소열묘(昭烈묘 )와 나란히 세워졌다고 한다.  그 후 14세기 말에 무후사는 소열묘와 병합되어 현재의 정식 명칭은 한소열묘  이지만 주군인 유비를 능가하는 제갈량의 재덕을 기려서 지금까지도 이곳을무후사라고 부른다.   중국 역사상 유일하게 황제와 대신이 함께 한 사당에 모신 사당으로 15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촉나라(지금의 사천)의 근거지였던 사천성과 제갈량의 명성이 드높았던 운남성과 귀주성만 해도 약 80여개의 무후사가 있으나 , 이중 가장 유명한 곳이 촉의 수도였던 지금의  성도 무후사 이다.

  국보 무후사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것이 삼절(문장, 서법, 석각기술)로 이름이 높은 당비, 촉한시대에 유비를 받들던 문, 무관 28인의 소상, 제갈량이 남쪽을 정벌할 때 낮에는 밥을 짓고 밤에는 두드려 경보를 보냈다는 제갈고 , 유비의 묘인 혜능 등을 들 수 있다.

북쪽에 위치한 본당을 중심으로 남쪽을 향해 하나의 축을 이루는 구조이다.  본당 아래에 대문, 二門 ,   유비전,  과청, 제갈량전오중이 있다.   서쪽에는  유비의 묘가 있으며, 이문에서 유비전과 동서전 , 과전에서 제갈량전의 동서방향으로 각각 두 개의 결방이 붙어있는 구조로 형성되어 있다.

사당 내부에는 촉한 : 삼국의 하나로 유비가 세움)의 역사적 인물들을 상징하는 토우가 41점에 달한다.   토우들은 淸代의 조각가들이 만들었으며 촉한의 군신서열에 의하여 배치되어 있다.  이 밖에 唐碑는 사다아 내의 중요한 문화재 중 하나이다

이 비석에는 제갈량의 공덕을 칭송하는 내용이 적혀 있으며, 明代에 이르러' 三絶碑'라고 불렀다,

 

 

 

 

 

 무후사 입구에 걸린 무후사 전경 그림

 

 

 중국하면 언뜻 용의 모습이 떠오르는데 실은 중국에서도 양자강을 기준으로 양자강 북쪽은 용문화고 ,  양자강 남쪽은 새문화로 봉황이 그 대표라한다.

즉 전국의 7웅으로 제 , 초, 연, 한 , 조 , 위, 진은 새문화가 대표 된다함   

 

 유비의 소상

 

 관우의 상

 

 유비를 모신 혜능 입구

 

 유비를 모신 혜능

 유비를 모신 혜능

 

 동한시대 석관이라는 푯말

 

 정원에 커다란 나무가 이채롭다

 

 버스  창문으로 보이는 사천성의 마을들 , 어찌나 이쁜지 무릉도원이 따로 필요 없을것 같이 보였다.

 버스  창문으로 보이는 사천성의 마을들 , 어찌나 이쁜지 무릉도원이 따로 필요 없을것 같이 보였다.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보면 주변이 온통 茶 밭인데 , 그 차들을 만드는 차공장? 과 차박물관이 휴계소 곁에 있어서 쉬는 사이 뛰어가 사진한장

 

  현재 세계에서 제일 큰  불상,  낙산대불을 보기 위해 배를 타러 가는 길.....

멀리 12시 방향에 뾰죽한 것은 탑이고 낙산대불은 오른쪽에서 두번째 산 움푹 보이는 곳에 조성되어있음

 

 

 

 이 배를 타고 대불을 보러 간다 ---배에서 내리면 한 두시간 올라야 한다는데, 어르신들 어려우신지?  걷는것은 포기하고 배에서 멀리 바라만 보기로 했다.

 

 드디어 나도 낙산 대불 곁에 왔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낙산 대불 !

"불상이 하나의 산이요, 산이 하나의 불상이다 (佛是一座山, 山是一尊佛)"라는 낙산대불.

세계에서 가장 큰 고대 석조 불상인 낙산대불은 당조(唐朝: 618-907)에 새긴 마애불(磨崖佛)이다.  사천성 남쪽의 민강, 대도하, 청의강 의 합류지점인 능운산 서벽에 조각되어 있따.  이 석조 불상은 발 아래로 흐르는 강들을 사이에 두고 아미산을 바라보고 있다.  전체적으로 균형을 잃지 않고,  좌불상과는 달리 대불은 곧은 자세로 의자에 앉은 형태이다.

대불을 처음 만들 때 낙산은 비가 많이 오고, 겨울에는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짙은 안개가 끼는 일이 많아 악천후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13층의 누각을 조성하여 대불의 얼굴만 보이도록 하였는데 .  그 누각은 송대(宋代)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한다.

대불을 조성한 시기는 지금부터 1300여 년 전인 713년에 해통화상(海通和尙)에 의해 시작되어 해통 생전에 낙산대불 공사는 절반밖에 끝내지 못했고 ,  그의 두 제자가 공사를 지속했다.   절도사 장구겸경(章仇兼琼)과 위고(韋皐)를 거쳐 90년이 흐른 뒤 803년에야 완성되었다.  이곳은 원래 3개의  강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당시  주요한 수상 교통로였다.  하지만 세  강이 합류하는 곳에서 일어나는 사나운 물살의 소용돌이로 배가 침몰하여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따랐다.  해통스님은 불력으로 이것을 막겠다고 소원하였고,  이 대불이 완공된 뒤부터 배가 침몰되지 않았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거대한 공사의 결과 수많은 돌들이 절벽에서 떼어져  강 아래로  퇴적되었고 이 것들이 사나운 물살을 진정시켜 배들의 통행이 안전해졌다고 한다.

* 해통스님에 관해 전하는 이야기는 해통 스님은 낙산대불 불사를 위하여 전국을 돌며 20년 동안 기부금을 모았다. 어느 날 한 지방  탐관오리가 보시 받은 재물을 탐내  그  일부를 뇌물로 요구하자, 그때 스님은 "내 눈에 칼이 들어가도 보시 받은 불재(佛財)는  내줄 수  없다"고 하니, 화가 난 관리는 당장 '시험해 보자'고 위협한다.

이에 스님은 바로 두 눈을 뽑아 그릇에 담아 그에게 주었다. 놀란 관리는 스님 앞에서 참회하고 불상을 세우는 것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고, 그 소문을 들은 백성들도 스님의 정성에 감동하여 모두들 자기 일처럼 도왔다고 한다.

이 대불 뒤편의 능운사에는 해통 스님이 수련했다는 동굴과 그의  소상이 자리하고 있다. 그 소상 밑에는 "자목가 불재란득(自目可佛財難得: 내 눈은 줄 수 있지만 부처님을 섬기는 재물을 얻기는 어렵다 )"는  글이 써 있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신빈성을 더해주고 있다.

높이 71m의 낙산대불은 손을 무릎에 얹고 앉아 있는 미륵(彌勒菩薩: Maitreya)을 표현한 것이다.  머리의 쪽은 1021개로 말린 모양이고, 어깨 넓이는 28m,  손의 길이는 3m, 발등의 길이는 8m이며 발톱한개에도 한 가족이 모이기에 충분하다.  양쪽 귀의 크기는 7m인데,  나무로 만들어서 겉에 흙을 발랐다.  1200년 전의 장인들에게 석조 머리에 귀를 부착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많은 강우량을 대비하여 나선형의 모발 부분에 배수구를 내어  귀의 뒷면으로 물이 흐르도록 하였고, 또 대불의 정면 가슴 우측에도 배수구를 내어 물이    몸에 흘러드는 것을 막고 있다.  배수로는 숨겨진 홈통과 통로인데, 머리와 팔에 흩어져 있고,  귀 뒤쪽과 옷 속에 감추어져 있다. 이런 배수체계는 빗물을 배수하고 내부를 건조하게 유지하여, 낙산대불의 보호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지방의 속담에는 " 능운산이 부처고 부처가 능운산이다."  라고 한다. 이는 낙산대불이 조각된 능운산 지역이 강 쪽에서 보면 잠자는 부처의 모양 같고 낙산대불이 조각된   곳은 심장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낙산대불은 지역의 개발이  진행되면서 오염에 희생되고 있다. 1994년 아미산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을 지정된 이래 UNESCO의 전문가들의 교육하에 보호를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대불앞에 보이는 강과 강건너 광경 --사진에는 없지만 많은 빌딩도 보임

 

 

 홍박사님과 사모님이신 교수님과 함께

 

 차에서 만난 대불선사 --아직 개원을 하지 않고 수리중인 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