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여행

세계 최대의 낙산 대불 !

백합사랑 2008. 5. 5. 10:30

드디어 나도 낙산 대불 곁에 왔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낙산 대불 !

"불상이 하나의 산이요, 산이 하나의 불상이다 (佛是一座山, 山是一尊佛)"라는 낙산대불.

세계에서 가장 큰 고대 석조 불상인 낙산대불은 당조(唐朝: 618-907)에 새긴 마애불(磨崖佛)이다.  사천성 남쪽의 민강, 대도하, 청의강 의 합류지점인 능운산 서벽에 조각되어 있따.  이 석조 불상은 발 아래로 흐르는 강들을 사이에 두고 아미산을 바라보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균형을 잃지 않고, 있다. 대불은 곧은 자세로 의자에 앉은 형태이며 지그시 내려보는 시선이 나를 쳐다 보아주는 것 같고 손톱의 정교함도 우리네 손톱을 보는것 같다. 돌로 빚은 불상 같지가 않고 ㅎㅎ.

대불을 처음 만들 때 낙산은 비가 많이 오고, 겨울에는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짙은 안개가 끼는 일이 많아 악천후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13층의 누각을 조성하여 대불의 얼굴만 보이도록 하였지만 .  이 누각은 송대(宋代)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전신을 다 함께 잘 보여주시려고 그러셨나보다 ㅎㅎㅎ

 

대불을 조성한 시기는 지금부터 1300여 년 전인 713년에 해통화상(海通和尙)에 의해 시작되어 해통 생전에 낙산대불 공사는 절반밖에 끝내지 못했고 ,  그의 두 제자가 공사를 지속했다.   절도사 장구겸경(章仇兼琼)과 위고(韋皐)를 거쳐 90년이 흐른 뒤 803년에야 완성되었다.  이곳은 원래 3개의  강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당시  주요한 수상 교통로였다.  하지만 세  강이 합류하는 곳에서 일어나는 사나운 물살의 소용돌이로 배가 침몰하여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따랐다.  해통스님은 불력으로 이것을 막겠다고 소원하였고,  이 대불이 완공된 뒤부터 배가 침몰되지 않았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거대한 공사의 결과 수많은 돌들이 절벽에서 떼어져  강 아래로  퇴적되었고 이 것들이 사나운 물살을 진정시켜 배들의 통행이 안전해졌다고 한다.

* 해통스님에 관해 전하는 이야기는 해통 스님은 낙산대불 불사를 위하여 전국을 돌며 20년 동안 기부금을 모았다. 어느 날 한 지방  탐관오리가 보시 받은 재물을 탐내  그  일부를 뇌물로 요구하자, 그때 스님은 "내 눈에 칼이 들어가도 보시 받은 불재(佛財)는  내줄 수  없다"고 하니, 화가 난 관리는 당장 '시험해 보자'고 위협한다.

이에 스님은 바로 두 눈을 뽑아 그릇에 담아 그에게 주었다. 놀란 관리는 스님 앞에서 참회하고 불상을 세우는 것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고, 그 소문을 들은 백성들도 스님의 정성에 감동하여 모두들 자기 일처럼 도왔다고 한다.

이 대불 뒤편의 능운사에는 해통 스님이 수련했다는 동굴과 그의  소상이 자리하고 있다. 그 소상 밑에는 "자목가 불재란득(自目可佛財難得: 내 눈은 줄 수 있지만 부처님을 섬기는 재물을 얻기는 어렵다 )"는  글이 써 있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신빈성을 더해주고 있다.

높이 71m의 낙산대불은 손을 무릎에 얹고 앉아 있는 미륵(彌勒菩薩: Maitreya)을 표현한 것이다.  머리의 쪽은 1021개로 말린 모양이고, 어깨 넓이는 28m,  손의 길이는 3m, 발등의 길이는 8m이며 발톱한개에도 한 가족이 모이기에 충분하다.  양쪽 귀의 크기는 7m인데,  나무로 만들어서 겉에 흙을 발랐다.  1200년 전의 장인들에게 석조 머리에 귀를 부착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많은 강우량을 대비하여 나선형의 모발 부분에 배수구를 내어  귀의 뒷면으로 물이 흐르도록 하였고, 또 대불의 정면 가슴 우측에도 배수구를 내어 물이    몸에 흘러드는 것을 막고 있다.  배수로는 숨겨진 홈통과 통로인데, 머리와 팔에 흩어져 있고,  귀 뒤쪽과 옷 속에 감추어져 있다. 이런 배수체계는 빗물을 배수하고 내부를 건조하게 유지하여, 낙산대불의 보호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지방의 속담에는 " 능운산이 부처고 부처가 능운산이다."  라고 한다. 이는 낙산대불이 조각된 능운산 지역이 강 쪽에서 보면 잠자는 부처의 모양 같고 낙산대불이 조각된   곳은 심장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낙산대불은 지역의 개발이  진행되면서 오염에 희생되고 있다. 1994년 아미산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을 지정된 이래 UNESCO의 전문가들의 교육하에 보호를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클릭하면 더욱 자세히 보임!

 

 아래글은 이범수 선생님께서 한국전통예술학회 홈피에 올려주신 글을 옮겨온 글임니다.

2008년 4월 17일 (목요일)

한국전통예술학회의 제14차 세계문화유적답사단의 일원으로 17일부터 23일까지, 7일간 중국四川省의 성도와 중경 일원의

불교유적을 답사한다.

저녁 8시, 아시아나 OZ232편으로 인천공항을 출발해, 현지 밤 11시(한국 시간 밤 12시) 중국 成都공항에 도착했다.

늦은 시간임에도 공항에 상해 동방항공의 박은옥씨와 현지 가이드 갈춘걸씨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일행은 홍윤식, 조명렬, 구종서, 김정자, 황창현, 구해순, 신정식, 송규정 강금용, 홍점석, 김성호, 손상길, 서상기, 김치중, 이진호

정창옥, 한영숙, 양순향, 백여경, 장정일, 강형석, 이범수등 22명.

四川(쓰촨)이라는 지명은 양쯔장, 민장, 퉈장, 자링등 4개의 강이 흐르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것으로 고도로 발달된

古蜀 三星堆 문명이 찬란했던 지역이며 광동, 호남, 산동요리와 함께 중국 4대 요리 중의 하나인 사천요리의 고장이기도 하다.

술도 중국 10대 명주로 지정된 것 중, 5종이 이곳 술이란다.

주요 도시로 청두, 난충, 완현, 도구, 네이장, 루저우, 이빈, 다현, 러산, 메이산등이 있고

주요 관광지로 삼성퇴 유적지는 물론 아미산, 낙산대불, 대족석각, 청성산, 도강언, 구체구, 황룡, 팬더 서식지등이 있다.

重慶(총칭)도 본래는 사천성에 속해 있었으나 1997년 8월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분리돼 나갔다.

성도는 전국시대부터 있어 온 2,000년 역사의 문화도시로, 춘추전국시대에는 蜀의 도읍지였고

삼국시대 때는 촉한을 통일한 劉備가 수도로 삼았던 곳이며, 唐의 玄宗이 안녹산의 난을 피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수당시대는 長安, 揚州, 敦煌과 더불어 중화 4대 도시 중의 하나였던 고도다.

또 성도는 우리나라와도 인연이 깊은 곳인데, 김수로왕의 왕비인 許왕후의 고향이 바로 이곳 성도 동쪽에 있는 보주라는 곳으로

지금도 許왕후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단다.

성도 도착 후, 바로 FULO Hotel에 투숙

Add: 23, 2nd Ring Road,2nd South Section, Chengdu P.C

Tel: 86+28+8648+0484

Web: http://www.fulohotel.com


2008년 4월 18일 (금요일)

하루 종일 구름이 많고 흐렸다.

이곳의 날씨는 4계절 연평균 기온이 섭씨 16.3도로 혹한과 혹서는 없지만, 1년의 200일 이상 구름이 많아 햇빛을 보기가 힘들다고 한다.

오전에 金沙박물관과 都江堰을 둘러보았다.

1. 金沙博物館

금사유적지는 商나라 말기부터 西周시기까지 古蜀國의 도읍지로서, 그 면적은 약 5평방Km 정도인데, 유적지 현장에 세워진 금사박물관에는 이 유적지에서 발굴된 太陽神鳥를 비롯해 황금가면, 금관, 금띠. 象牙, 玉器등 1,500여점의 귀중한 문화재들이 수장, 전시돼 있다.

금사(金沙)박물관은 그 건축면적이 16,200평방미터 정도인데, 원고가원(遠古家圓)관, 왕국전영(王國剪影)관, 천지부절(天地不絶)관, 천년절창(千年絶唱)관, 해독금사(解讀金沙)관등 5개의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이곳에서 출토된 태양신조의 금장식 문양은 중국 문화유산의 상징문양이기도 하다.

이 문양을 보면 둥근 圓의 한 가운데 태양을 상징하는 불꽃문양이 있고, 가장자리에는 飛翔하고 있는 새(鳥)들이 있는데

그 새들의 발톱들이 세 개다.

마치 고구려 쌍영총, 각저총, 덕흥리 1·2호 고분, 개마총, 강서중묘, 천왕지신총, 장천 1호분, 무용총, 약수리 벽화고분 등의 벽화에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는 三足烏가 연상되는 문양이다.

이 두 문양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은 아닌지 연구해 볼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의 문헌에도 먼 옛날 중국대륙은 원래 동이(東夷)와 지나(枝那)의 결투장이라고 했다.

“동이가 중원을 차지할 때는 지나가 변방에 머물렀고, 지나가 중원을 차지하면 동이가 변방으로 나갔다.

그래서 중원의 주인이 한번은 동이, 한번은 지나로 뒤바뀌면서 역사가 흘렀는데 결국은 지나가 중원의 주인이 되면서

동이는 변방으로 후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의 동이가 우리의 조상들이고 이는 고구려 벽화에 등장하는 三足烏 문양과 금사유적지에서 출토된 太陽神鳥, 요녕성 조양(朝陽)지구 원태자벽화묘(袁台子壁畵墓)의 발 달린 검은새가 모두 그 뿌리가 같은 것으로 보고,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주장한다면 너무 비약일가?

그 외 이곳의 祭祀區는 중국에서 발굴된 고대유적 중 제일 오래된 것이고 그 보존 상태가 가장 양호하며 수많은 제기들이 발굴된 곳이기도 하다.

이 금사유적은 한 부동산 업자가 지하수를 개발하다 우연히 발견했단다.

금사박물관을 관람한 다음에는 이곳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도강언으로 갔다.

2. 都江堰

전국시대 秦나라의 관개시설로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다.

혹자는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축조물은 만리장성이 아니라, 민강의 이 도강언이라고 한다.

2,250년 전에 만들었지만 현재까지도 그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풍요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어느 나라의 수리시설도 500년 이상을 견딘 것이 없단다.

기원전 251년, 이곳 촉군의 태수로 부임한 이 빙의 작품이다.

사천성 성도 지역은 넓은 분지다.

구채구가 있는 송판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민강은 경사가 급하며 폭이 좁은 관계로 빠른 물살 때문에 자주 수해가 발생하였다.

이 빙은 이를 방지하기 위해 강 한 가운데 분수어취(分水魚嘴)라는 인공 섬을 만들어 물길을 둘로 나눈 후, 한 줄기는 外江으로

원래대로 흐르게 하고, 다른 한쪽인 內江 물은 옥루산을 뚫어 성도 평야로 돌린다.

이 두 江 하류 쪽의 물살 급한 곳 역시 또 나눠 흐르게 하는 식으로 물의 흐름을 편하게 한 것이다.

성도지역이 중국에서 가장 자연재해가 적고 식량이 풍족한 고장이 된 것이 바로 이 빙이 기획하고 완성한 이 도강언의

수리시설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곳을 방문한 등소평도 경내에 "萬代福造"라는 친필 휘호를 남긴다.

당시 이 빙이 이 수리사업을 위해 연구해 완성한 三字經과 八字眞言은 지금까지도 수리사업의 표준이 되고 있단다.

또 이 빙은 鹽井도 개발해 주민들의 소금문제까지 해결했다고 한다.

이 도강언 내에는 神 으로 추앙된 이 빙과 그의 아들을 기리는 二王廟가 있다.

점심식사 후 도강언에서 15km 거리에 있는 靑城山으로 갔다.

3. 靑城山

해발 1,600m.

道敎의 발원지이며 성지로 역시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다.

洞天福地, 人間仙境, 靑城 天下幽라고 불리는 곳이다.

2세기 동한의 순제 원년, 장도릉(張道陵 - 張天師)이라는 도인이 이청성산에서 처음 도를 닦은 후 노자를 교주로 삼고 도덕경을

기본경전으로 도교를 창시했다.

이 장도릉은 원래 유학자로 이름이 높았으나 장생불사의 신묘를 깨우치기 위해 청성산에 들어가 수련을 했는데, 후에 道를 得했다는

소문을 듣고 후학들이 가르침을 받기위해, 또는 무위자연을 꿈꾸는 도인들이 모여들어 도관이나 동굴을 파 거주하고 장생불사, 연단술, 무술 등을 연마하면서 도교의 성지가 된 곳이다.

김 영의 무협소설에 나오는 무림 9대 문파 중의 하나인 청성파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건청궁, 천사동, 조양동, 조사전, 상청궁 등의 문화재가 있고, 월성벽파, 청성비폭, 천연도화, 삼도기봉, 요아천기로 불리는

빼어난 경관들이 산재해 있다.

해발 1,600m 청성산 정상의 상청궁에 올라가려면 月城湖라는 조그마한 호수를 도선으로 건넌 후 리프트를 타야한다.

상청궁 앞에서 우리 회원 한분이 이른바 검은 두건의 한 도사를 촬영하려다가 큰 봉변을 당할 뻔 했다.

원래 사진을 찍을 수 없게 돼 있는지 험악한 얼굴로 크게 화를 내며 덤비는데, 도덕경을 한참 더 읽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미리 신청하면 이 상청궁에서 숙박도 할 수 있단다.

다시 성도로 귀환하여 시내에서 저녁식사로 중국의 4대 요리 중의 하나라는 사천요리 화꿔(일종의 샤브샤브)를 먹었는데

얼마나 매운지 모두들 혼이 났다.

상상을 초월할 만큼 정말 매웠다. 우리나라 고추는 달착지근 하면서 매운데 이곳 고추는 매우면서 매웠다.

다시 FULO Hotel에 투숙. 


2008년 4월 19일 (토요일)

오래간 만에 햇빛이 났다.

이런 날은 성도시민들이 하던 일을 중지하고 모두 일광욕을 나온 단다.

성도는 영국의 런던과 자매관계를 맺고 있는데, 두 도시가 모두 늘 안개가 많이 끼기 때문이라나?

자매관계를 맺는 이유도 참 여러 가지로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오전 성도시내의 杜甫草堂, 靑羊宮, 大慈寺, 文殊院, 武侯祠를 차례로 둘러 봤다.

1. 두보초당

成都초당이라고도 부르고, 浣花溪 부근에 있다하여 완화계라고도 부른다.

BC759년 겨울, 안녹산의 난을 피해 이곳으로 피난 온 玄宗을 따라 와 두보가 가족들과 함께 3년간 가난에 찌든 생활을 하면서도

200여 편의 주옥같은 名詩를 남긴 곳이다.

초당 안에는 두보草家 외에 중국을 대표하는 12명 시인들의 조각상이 전시된 大雅堂 (대아당의 별실에는 이곳에 왔던 각국 저명인사들의 사진도 전시돼 있는데, 우리나라 노태우, 김영삼 대통령, 박근혜의원, 등소평과 함께 온 김일성의 사진도 있다. 청자를 이어붙여 쓴 草堂이라는 글씨 앞에 뒷짐을 지고 서서 망연히 글씨를 감상하고 있는 모택동의 뒷모습 사진도 인상적이다), 각국에서 발행된 두보의 시집과 연구서가 진열된 詩史堂, 工部祠, 小陵碑亭, 靑瓷 草堂壁 등이 기화요초 핀 정원, 각양의 두보 석상들과 잘 어우러져 있다.

2. 청양궁

BC666년 당나라때 창건됐고  老子를 기리는 道敎사원이다.

노자가 도성의 태수에게 秘書를 한권 주면서 "이 책을 다 읽은 후 나를 찾아오라 "고 해 모두 읽은 후 찾아갔더니

노자는 없고 어린 아이 하나가 푸른 羊을 데리고 있었단다.

태수는 이를 노자의 환생이라 생각하고 그 자리에 사원을 지은 후 청양궁이라고 했단다.

노자가 살았던 춘추전국시대는 중국 역사상 가장 혼란했던 시기였는데, 노자는 이 혼란의 이유를 인간들의 쓸데없는 욕심에서 비롯됐다고 봤다.

인간은 모두 착하게 태어났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자연의 이치 즉 道에 따라 잘 살 수 있는데 어릴 때부터 쓸데없는 교육과 가르침으로 욕심과 탐욕, 경쟁심이 생겨 서로 갈등이 일고 혼란이 생긴다는 것이다.

無爲自然, 즉 타고난 본성대로 그대로 놔두라는 것이다. 노자사상의 핵심이다.

청양궁 입구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흰색과 검은색의 太極紋樣 현판이 보이는데

태극문양 가장자리로 노자의 도덕경 한 토막이 쓰여 있다.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으며, 셋은 만물을 낳는다)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사람은 땅을 따르고, 땅은 하늘을 따르고, 하늘은 도를 따르고, 도는 스스로 그러함을 따른다)

청양궁의 분위기는 대체로 검고 어두웠으며, 도사들의 복장도  단정치 못했다.

경내에는 銅으로 만든 羊 조각상이 하나 있는데 그 구조가 매우 특이하다.

전체적인 모양은 羊이지만 귀는 쥐, 코는 소, 발은 범, 등은 토끼, 뿔은 용, 꼬리는 뱀, 입은 말, 수염은 양, 목은 원숭이, 눈은 닭, 배는 개, 엉덩이는 돼지, 즉 12지상을 모두 갖춘 형상이다.

宋代의 유물인데 청나라 때, 한 학자가 북경에서 가지고 와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쓰다듬으면 좋은 運을 준다는 속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만져서 반들반들하다.

3. 大慈寺

성도시내에서 그 지명도가 文殊院이나 昭覺寺 만큼은 안 되지만 우리나라 사람은 꼭 한번 들려야 하는 사찰이다.

신라 성덕대왕의 3남 이던 金和尙(648~762) 無相禪師가 20여년을 수도하면서 중국 禪宗의 하나인 淨衆禪을 세운 곳이다.

무상선사는 頭陀行의 실천자로도 유명하며 티베트에 알려진 최초의 선승이다.

대자사는 안녹산의 난으로 이곳에 피신해 와 있던 唐의 현종이 무상선사를 만나 직접 하사한 사찰이고, 무상선사가 79세 때 앉은 채로

入寂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대자사의 정문에는 西蜀禪源이라는 현판이 걸려있고 경내 天王殿에 무상선사의 존영이 걸려있다.

2005년도에 우리나라 조계종이 세운 무상선사의 공덕비도 볼 수 있다.

4. 文殊院

사천성의 불교협회가 있는 큰 사찰이다.

특히 이 문수원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는데 강희대제의 친필인 "空林"이라는 횡서체 글씨, 三藏法師의 두개골 사리

나무 잎 위에 피로 썼다는 血葉經등이 그것이다.

우리가 갔을 때 공림이라는 글씨 외에 두개골 사리와 혈엽경은 장경각에 보관하고 공개하지 않아 볼 수 없었다.

본래 수계도량이었는데  현장법사도 이곳에서 계를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5. 武侯祠

무후사는 촉한의 황제였던 劉備의 참모였으며 전설의 전략가였던 제갈공명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사당이다.

그래서 이름도 제갈량의 시호인 忠武候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이 무후사는 중국에서 유일하게 제갈량 외에 황제와 다른 신하들도 같이 모신 특이한 곳이다.

경내에는 유비와 손부인의 합장묘인 惠陵외에 유비전과 제갈량전은 물론  별도의 사당에 관우, 장비, 조자룡, 황충등

촉한의 문무대신 28위의 동상도 같이 모셔져 있다.

유비전에는 유비의 동상이 모셔져 있는데 그 크기가 3m나 된다.

이곳에서 재미있는 것은 유비전 안에 유비의 손자인 유심의 흉상은 있는데, 아들로 유비의 대를 이어 황재에 오른 유선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촉이 위나라의 조조에게 망하기 전, 손자 유심은 끝까지 싸우기를 주장했지만 아들 유선은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을 했기 때문.

처음에는 유선의 좌상도 같이 있었는데 누군가가 밤에 몰래 자꾸 갔다 버려 할 수 없이 아주 치워 버렸다고 한다.

중국에는 조조의 묘가 88개나 되지만 모두 도굴됐다는데, 이곳 유비 묘는 가장 작고 소박하지만 단 한 차례도 도굴된 적이 없다고 한다.

내가 묘 둘레를 한번 걸어서 돌아봤는데 180보쯤 이였다.

높이 12m, 둘레가 100m 남짓한 작은 규모다.

제갈량이 이곳에 직접 모셨다는 설도 있다.

西安의 진시황 묘에 비하면 이 혜릉은 정말 너무 작았다.

두보초당, 청양궁, 대자사, 문수원, 무후사가 모두 성도 시내 二環路의 안 밖에 있어서 쉽게 돌아 볼 수 있다.

성도시내에서 북경 동인당이 운영한다는 欽善齊에서 藥選料理 점심을 먹고 樂山행.

성도에서 낙산까지는 162Km로 약 2시간이 걸렸다.

6. 樂山大佛

이 낙산의 민강, 청의강, 대도하등 세 강이 합류하는 능운산 석벽에 세계에서 제일 큰 미륵보살 좌상이 있다.

원래는 세계에서 두 번째 큰 것이었지만 제일 큰 아프가니스탄의 大佛이 수년전 탈레반에 의해 파괴되면서 1위 자리에 올라선 대불이다.

높이 71m, 어깨넓이 28m, 손의 길이 3m, 귀의 크기 7m, 발등의 길이는 8m.

이 대불의 발톱 한개 위에 한 가족 5명이 앉아 놀기에도 충분 할 만큼 어마어마하다.

여하튼 상상을 초월한다.

佛是一座山, 山是一尊佛.

불상이 하나의 산이요, 산이 하나의 불상이라는 미륵좌상이다.

능운산으로 올라가 옆 절벽을 타고 내려가면 직접 불상에 접근할 수 도 있는데 그러려면 꼬박 하루를 소비해야 하고, 또 접근해 봐야

규모가 하도 커서 일부만 볼뿐 전채를 다 볼 수 없다고 해, 우리 답사단은 배를 빌려 타고 그 앞을 흐르는 강으로 나가

전체를 자세히 조망할 수 있었다.

지금으로 부터 1,300년 전인 713년 海通和尙에 의해 조성이 시작했으나 그의 생전에는 절반 밖에 끝내지 못했고, 그의 두 제자에 의해

90년 후인 803년에 완성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이 대불을 보호하는 13층 누각도 있었으나 宋代에 화재로 소실됐다고 한다.

이 대불의 뒤편에 있는 능운사에는 해통화상이 수련했다는 동굴과 塑像이 있다는데 올라가지 않았기 때문에 직접 보지는 못했다.

이곳은 세 곳의 강물이 합류, 교차하는 지점으로 수상교통의 요지인데 늘 合水지점에서 일어나는 사나운 물살의 소용돌이로 배가

침몰하고 인명 피해도 자주 일어나, 이를 안타까이 여긴 해통화상이 부처님의 힘으로 막아보겠다는 염원을 세우고 불상조성을

시작했다는데 그래서 그런지 이 대불이 완성된 후는 배가 침몰하는 등의 불상사가  없어졌다고 전해진다.

낙산대불 답사 후, 다시 전용버스를 타고 峨眉山으로 출발.

오후 6시, 아미산 영수원호텔에 투숙했다. 온천으로 유명한 호텔이란다.


4월 20일 (일요일)

하루 종일 峨眉山을 돌아봤다.

이 사천성 아미현의 아미산은 문수보살의 오대산(산서성), 관음보살의 보타,낙가산(절강성), 지장보살의 구화산(안휘성)과 함께

중국 4대 불교 성지의 한 곳으로 보현보살의 원을 세우는 산이다.

불교에서는 光明山, 도교에서는 허령동천이라고도 부른다.

중국의 詩聖 李白은 이 아미산을 유람한 후 "촉국에 명산이 많으나 아미에 필적할 만한 것이 없다" "아미는 천하에서 가장 秀麗하다"

"아미를 돌아보지 않고는 사천을 유람했다고 하지 말라"고 극찬했는가 하면

아미산의 달을 87가지나 되는 美辭麗句로 표현하기도 했다니 이백이 이 아미산의 매력에 얼마나 깊이 빠졌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이 아미산에는 金頂의 화장사, 만년사, 보국사 외에도 홍춘평, 청음각, 복호사, 세상지, 선봉사, 백룡사, 뇌음사, 우선사등의 수많은

명찰들이 산재해 있으나 우리 일행은  일정상 金頂의 四面十方 普賢金像과 화장사, 萬年寺, 報國寺등 세 곳만 참배할 수 있었다.

아미산 입구에서 정상 금정까지는 거리가 60Km로 아미산을 다니는 전용버스를 타고 올라가다 다시 곤돌라로 갈아타야 하는데

2시간 이상이 소요됐다.

1. 金頂

금정의 4면십방 보현금상은 정말 크고 화려했다.

또 우리가 갔을 때 雲霧 속에 숨었다가 나타나고 잠간 나타났는가 하면 다시 구름 속으로 몸을 감추는 광경이 반복되는 것을 보며

일종의 신비감마저 느꼈다.

華藏寺는 4면십방 보현금상 바로 뒤에 있는데 정중앙에 보현보살이 모셔져 있고 좌우로 만불상이 늘어서 있다.

이 금정의 보현보살을 조성하는데 순금이 58Kg나 들어갔고 조성비가 3,000억 원이나 투입됐다는데

모두 홍콩의 한 재벌이 施主한 것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일행 한분을 기다리던 중, 우담선생으로부터 유머 한마디를 배웠다.

우리나라에 3대 바보가 있는데

첫째는 몽고반점을 중국요리집이라고 우기는 사람

둘째는 복상사를 우리나라에 있는, 절 이름이라고 우기는 사람

셋째는 盧ㅁㅎ씨가 우리나라 대통령했다고 우기는 사람이란다. ㅎㅎㅎ

2. 萬年寺

만년사는 아미산 주봉의 동쪽 산자락, 해발 1,020m 지점에 있다.

금정에서 내려오다 들렸다.

이 만년사의 無念殿은 1635년 화재로 일대의 사찰이 모두 불타 없어질 때도 다행히 벽돌로 지었기 때문에 남은 건물이다.

높이 16m, 正方型으로 4변의 길이가 16.5m이다.

지붕 꼭대기가 첨탑 형이어서 마치 몽고의 파오를 연상케 하는데, 지붕에 다섯 개의 백탑과 네 개의 동물상이 세워져 있다.

무념전 내에는 보현보살이 6개의 이빨을 가진 흰 코끼리를 타고 앉아 있다.

높이 7.3m, 무개가 무려 62톤이나 되는데, 중국의 國寶다

경내에 원숭이가 돌아다닌다.

3. 報國寺

해발 550m, 아미산 제일 아래에 있는 사찰이다.

산문이 亭子 식으로 문 위에 강희대제가 내린 "報國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明나라 만왕시기(1573~1620)에 세워진 사찰이다.

산문 외에 미륵전, 대웅보전, 칠불전, 장경루 등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칠불전이 장관이다.

이 보국사에는 明代에 주조됐다는 7m 높이의 화엄탑과 채색 陶器 불상이 있는 것으로 알았는데, 화엄탑은 인근의 伏虎寺로 옮겨갔고

도기 불상도 다른 곳으로 옮겼다고 해서 볼 수가 없었다.

화엄탑에는 4,700여존의 작은 불상과 화엄경 경문이 조각돼 있을 뿐 아니라, 중국 고대 정자건축의 특징도 살필 수 있어

중국의 불교사, 조각사, 건축사를 한눈에 가늠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여서 국가 급 중점 보호문물로 지정된 것이라는데...

하도 아쉬워서 그 곳에 거주하는 스님에게 왜 옮겼느냐고 물으니 "너는 왜 여기에 있느냐?" 라는 禪문답을 듣기도 했다.

즉 네가 한국에 있지 않고 이곳 중국 아미산에 와 있는 것과 같이, 이것들도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대답이리라.


이 아미산도 역시 유네스코 지정 세계자연문화유산 보호지역이며 중국 정부가 정한 AAAAA급 풍경특구다.

해발 3,099m로 산 정상부근에서는 약간의 고산증세를 느끼기도 하는 높은 산이다.

저녁 6시, 다시 중경으로 귀환해 아리랑이라는 한국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또 FURO호텔에 투숙.


2008년 4월 21일 (월요일)

아침 8시 성도를 출발해 오후 12시30분 大足에 도착했다.

도착하니 비가 내리고 있다.

大足이란 大豊大滿足, 즉 늘 풍년이 들어 살기에 대 만족인 곳이라는 의미란다.

이 대족지방의 불교 마애석각은 크게 다섯 구역, 즉 龍崗山(北山), 寶頂山, 廣華山(南山), 石篆山, 石門山으로 분포돼 있는데

우리 답사단이 들린 곳은 보정산이다.

이곳의 석각이 가장 그 규모가 크고 또 소재도 다양하기 때문이다.

唐 말기부터 淸代에 이르기 까지 조성된 6만 여기의 아름다운 석각들이 10여 군데에 흩어져 있는데, 예로부터 중국의 북쪽에는

돈황이 있고, 남쪽에는 대족이 있다고 했단다.

돈황에 비견할 만큼 대족석각의 가치를 높이 평가한 것이다.

방대한 규모, 정교하고 섬세한 조각, 불교 예술사적 가치 등이 높이 평가돼, 이곳도 199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대족 석각군중에서도 이 보정산의 석각 군이 압권인데 다푸완(大佛灣)을 중심으로 2Km에 걸쳐 모두 15,000여기의 석각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南宋代의 승려 趙智鳳이 불교를 통해 만민이 고통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佛國土를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70여년에 걸쳐 조성한 것들이다.

모두가 감탄을 금할 수 없는 작품들이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孔雀明王變相, 觀無量壽佛經變相, 地獄變相  六道轉回圖, 千手千眼觀音, 華嚴三聖像, 十代明王像, 父母恩重經變相 등이 더 흥미로웠다.

십대명왕상 같은 것은 아직 미완성 이였고, 천수천안관음상은 그 손이 본래는 1,014개로 14개의 손에는 당시 작업도구들이 들려

있었는데 조지봉스님의 아버지를 못살게 굴어 결국 죽게 한 그곳의 지주가 7개를 잘라버려 지금은 1,007개만 남았다고 한다.

또 화엄삼성상은 가운데 毗盧舍那佛을 두고 좌우에 文殊와 普賢을 세웠는데, 그 손바닥 위에 얹혀진 塔의 무개가 무려 300Kg이나 된다고 하니 그저 어안이 벙벙해 질뿐이었다.

대족석각 답사 후

오후4시, 대족을 출발해 오후 6시 重慶에 도착했다.


2008년 4월 22일 (화요일)

오늘도 예외 없이 날씨가 흐리고 또 간간히 비를 뿌렸다.

인구 3,400만 명으로 세계 제일의 도시(?)라는 重慶.

北京, 天津, 上海와 더불어 중국 4대 직할시의 하나로서 중국 內陸의 홍콩이라 불리는 도시다.

여름의 최고 기온이 섭씨 43.8도까지 올라가 武漢, 南京과 함께 중국 3대 火爐로 꼽히는 도시이기도 하다.

또 중경은 언덕이 많아서 자전거를 이용하기가 어려운 도시라고 한다.

그래서 직장인들이 아침에 출근을 하다 자전거를 보면 재수 있는 날이라 하여 회사로 출근하지 않고 바로 福券 파는 곳으로 뛴다나?

우리를 안내하는 갈춘걸군의 이야기다.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 말을 듣고 차창을 내다보며 자전거를 찾아 봤지만 정말 단 한대도 볼 수 없었다.

오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 인민대례당, 삼협박물관을 둘러 봤다.

1. 臨時政府 廳舍

중경시 유중구 칠성강 연화지 38호에 있다.

1919년 4월13일, 상해에서 수립된 우리나라 임시정부는 1932년 4월19일 윤봉길의사의 상해 홍구공원 의거를 계기로 일본의 압박이

거세지자 이를 피해 항주->가흥->진강->장사->광주->유주->기강등지를 거쳐 1940년 이곳 중경에 도착했는데, 중경에 와서도

재정적 형편이 어려워 양릉가, 석판가, 오사야항 등을 전전하다 장개석총통 등의 배려로 이곳에 정착했다고 한다.

현재의 청사 모습은 1995년 8월11일, 우리나라 독립기년관이 중경직할시의 지원 하에 복원된 것.

상해 임시정부 청사 보다는 규모도 훨씬 크고 깨끗하며, 관리도 아주 잘 되고 있었다.

김 구주석이 집무하던 사무실은 물론 국무회의실, 외빈 접견실, 외무부, 내무부등의 정부조직 사무실까지 갖춰져 있다.

이 청사 옆에는 임정요인들의 숙소도 별도로 마련돼 있다.

2. 人民大禮堂

인민대례당은 중국이 유사시에 제2의 정부청사로 쓰려고 지은 건물인데 출입이 통제돼 들어가 보지 못했지만 겉에서 보기에는

굉장히 화려하고 웅장했다.

중국의 10대 건물群 중 2위에 드는 건축물인데 "나라가 번성하고 백성이 편안하라"는 의미가 담겨있는 北京의 天壇을 모델로 하여

지었다고 한다.

3. 삼협박물관

삼협박물관은 인민광장을 사이에 두고 인민대례당과 마주 서 있다.

중국 역사상 만리장성의 축성에 비견될 만큼 야심작인 삼협댐은 1992년 착공, 2009년 완공을 목표로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인데

양자강 중상류인 湖北省 宜昌의 취탕협, 우협, 시링협등 三峽을 잇고 막는 세계 최대의 댐이다.

西氣東輸(신강지역의 천연가스를 가스관을 건설해 상해 등으로 이동 시키는 일), 西電東送(서쪽의 전기를 동쪽으로 끌어 오는 일)과

함께 南水北調 즉 남쪽 장강의 물을 북쪽으로 끌어오는 수리 공정으로 중국의 지도가 바뀌는 대역사인 것이다.

댐의 높이가 185m, 너비 135m, 길이가 2,309m 이며, 최대 저수량이 390억 톤이나 된다.

이 저수량 390억 톤은 일본 전체의 담수 량과 맞먹는 양이며, 27억 톤인 우리나라 소양호의 13배가 넘는 규모다.

1일 전기 생산량 1,800만kw, 북경 등 장강 이북의 식수난 해결, 상해에서 중경까지 1만 톤급의 선박이 운항됨으로서 고속도로 4~6개에 버금가는 물류혁명이 일어나고, 10년 주기로 찾아오는 양자강의 홍수가 100년 단위로 늦춰지는 등 많은 경제적 이익이 있다고 하나

반면 기후와 생태계의 심각한 변화는 물론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문화재와 민속, 생활자료들이 모두 수몰되는 것이다.

삼협댐 중 지금까지 重慶 地域에서만 조사된 1,087건(지상 364건, 지하 723건)의 문화재 가운데 이전되거나 현지에 보존되는 287건을

제외한 모든 문화재가 수몰되는 것을 감안한다면 삼협댐 수몰지역 전체에서 사라지는 문화재의 양은 그 숫자조차 가늠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삼협박물관에는 바로 삼협댐으로 수몰되는 곳 중 중경지역에서 이전 또는 보존되는 287건의 문화재와 이 지역을 떠나는 소수민족들의 민속자료 등이 전시되고 있는데, 아직 자리가 잡히지 않아서 그런지 박물관 규모에 비하여 전시물의 질이나 내용이 어딘가 모르게

좀 허술하고 빈약하다는하다는 낌이 들었다.

중경시내에서 점심을 먹고 2시40분, 중경공항에서 국내선 3U8973편을 타고 상해로 이동.

중경에서 상해까지는 2시간이 소요됐다.


2008년 4월 23일 (수요일)

오전, 상해 근교에 있는 水鄕都市 - 朱家角이라는 민속마을을 구경했다.

상해에는 전에도 몇 번 와 봤지만 처음 가 본 곳이다.

물 위의 도시라 불릴 정도로 시내 9개의 거리가 모두 강변을 끼고 있으며, 그 위에는 고풍스러운 예쁜 돌다리가 36개나 있다.

국무원 지정 중국유명문화도시 중의 하나.

2001년에는 APEC정상회담에 참석했던 각국의 정상들과 그 부인들이 중국정부의 안내를 받아  방문했던 곳이기도 하다. 

800여 년 전, 明,淸代 주민들의 생활상과 徽派建築의 주거형태가 문화혁명 홍위병들의 난동도 피한 체 깨끗히 보존돼 있었다.

중국의 작은 베네치아다.

마을의 한 가운데를 흐르는 강을 따라 水上巴士라는 예쁜 유람선도 운항되는데 요금을 지불하면 누구나 탈 수 있다.

실크의 명산지로 옛날 실크로드를 통해 외국으로 나가던 중국 비단의 상당부분이 이곳에서 생산된 것 들이였다 한다.

만산재라고 돼지 뒷다리로 만든 우리 족발 비슷한 음식이 관광객들의 인기란다.

상해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꼭 한번 가보기를 추천하고 싶은 곳이다.


상해시내 임비곰비라는 한식집에서 점심을 먹고 바로 虹橋공항으로 이동 해,

저녁 7시 출발하는 아시아나 OZ3625편을 타고, 밤 8시50분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떠나기 전, 무릅관절과 통풍 때문에 걱정했는데 다행히 별일 없었고 또 다른 일행들도 모두 건강한 가운데

계획했던 일정을 무사히 마치고 귀국할 수 있어 감사했다.


이 일기를 쓰면서 “물(水)은 어떻게 다루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까”를 계속 생각했다.

이 빙은 물을 順하게 흘려보내는 방법으로 다스렸고, 반대로 요즘 삼협댐은 흐르는 물을막아서 다스리려 하고

海通和尙은 이도 저도 아닌 오직 佛心으로 다스렸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의 大運河를계획하고 있는 사람들은 과연 어떤 방법으로 이를 추진하려는지 궁금하고 자못 흥미롭기 까지 하다.


*내용상에 혹 누락이나 오류가 있으면 지적해 주세요.

 

이범수 선생님 감사합니다, 나무사랑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