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

일본인이 몰래 가져갔던 것을 되 찾아온 지광국사 탑묘와 북관대첩비

백합사랑 2009. 3. 5. 05:37

 

클릭하면 자세히 보임!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

국보 제 101호

이 승탑은 고려시대 고승 지광국사(智光國師, 984~1067)의 묘탑(墓塔)으로 원래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사터에 있던 것인데, 1912년에 일본인이 몰래 일본으로 가져갔다가 발각이 되어 3년 후인 1915년에 되돌려 받아 경복궁에 세워지게 되었다. 탑의 바침대에 해당되는 기단부(基壇剖)에는 여러 단을 두어 꽃,상여, 신선,장막 등을 장식하고 탑의 몸체에도 페르시아 풍의 창문을 내고 드림새 장식을 하였으며 , 지붕과 꼭대기도 불보살상, 봉황, 연꽃 등의 화려한 무늬로 장식되었다.

이 승탑은 지광국사의 장례(葬禮) 때 사리(舍利)를 운반하던 화려한 외국풍의 가마를 본떠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러한 승탑은 고려시대에 들어 과거의 전통에서 벗어나 새롭게 고안된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지광국사는 고려 전기의 이름난 고승으로 현종 임금과 문종 임금으로 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았는데, 특히 문종(文宗)임금은 지광국사를 왕사(王師)로  삼았다가 훗날에는 국사(國師)로 임명하였다.

이 승탑은 선종(宣宗) 2년 (1085) 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탑의 그림을 자세히 보려고 확대 해서 찍은 것임

 

 탑의 4면  조각그림이 다 달라서 다른면을 옮겨 본 것임

 

 

  탑의또 다른 면의 그림을 자세히 보려고 확대 해서 찍은 것임

 

 

이 사진은 오래전 달력 사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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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지광국사 현묘탑은 경복궁 옆에 고궁박물관 뒷뜰에 있음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

 

 북관대첩비는 임진왜란(1592~1598) 때 북평사 정문부(鄭文孚 1565~1642) 선생이 의병을 일으켜 함경도 길주, 백탑교 등지에서 가토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왜병들을 격파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워진 승전비이다.

그러나 정문부 선생님의 업적을 모함한 무리에 의하여 혁혁한 전공은 가리워지고 오히려 선생은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돌아가셨다.  그 후 선생이 돌아가신지 43년 후에야 모든 것이 밝혀지고 선생이 돌아가신지 85년 뒤인 1708년에는 그곳에 부임했던 함경도 북평사(北評事)  최창대(崔昌大 1660~1720)가 글을 짓고 이명필(李明弼)이 글을 써서 함경북도 길주군 임명(臨溟)에 고을 주민의 뜻을 모아 마침내

 

북관대첩비를 건립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약 200년 후  러 . 일 전쟁(1904~1905)이 일어나자 이 지역에 주둔한 일본군 이케다 마사스케(池田正介) 소장이 이 비석을 읽어보고  자기네 조상들의 패전기록을 알게 되자 이 비석을 뽑아 일본으로 보내버렸다.  그 후 이 비석은 일본 황실에서 보관하다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로 옮겨졌다.   이러한 사실을 도쿄(東京)에서 활동하던 최서면 선생이 1978년에 옛 기록을 검토하다가 1909년 당시 일본 유학생이었던 조소앙(趙素昻, 1887~ 1958) 선생이 기록한 글을 읽고 처음 알게 되었으며 이 비석 또한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에 있다는 것도 확인되었다.  그 후 한국정부와 민간단체들이 수차례 비의 반환에 노력을 기울여 2005년 10월 20일에 비를 반환 받게 되었다.  이 비석은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에 관한 귀중한 역사적 자료인 동시에 남북간의 잃어버린 역사상을 회복하고 한 . 일 간의 불행했던 과거를 청산하는 증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일본으로 부터 반환된 북관대첩비는 남북협의에 따라 2006년 3월 1일 북한에 인도되어 원소재지인 함경북도 김책시에 복원되었으며, 이 비석은 원래의 비를 그대로 복원하여 2006년 4월 25일에 세운 복제비이다

-비석앞 알림판에서 옮긴글-

 국립고궁박물관 전면

 

고궁박물관 전경을 다 넣고 찍어보려니까 왼쪽 옆에 광화문 복원공사로 임시벽이 박물관 앞을 가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