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향원정과 건청궁

백합사랑 2009. 3. 6. 08:23

 

 향원정

함화당과 집경당 북쪽 후원 영역에는 향원지라는 네모난 연못이 조성돼 있고, 그 가운데  향원정이 있다.  경회루가 웅장하고 남성적이라면 향원정은 아늑하고 여성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원래는 북쪽 건청궁으로 이어지는 다리가 있었으나 한국전쟁 때 파괴된 후 지금처럼 남쪽으로 놓았다.  향원정은 세조 때 세운 취로정 터에 건청궁을 지으며 조성한 것이다. 

 

 

  향원정과 오른쪽 건물들은 민속박물관(금산사 미륵전과 법주사 팔상전을 본떠 만든 건물)

 

향원정 뒷편엔 '한국의 전기 발상지'라는 표지석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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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상진원샘

이 샘은 경복궁 창건(1395년) 당시부터 있던 왕궁의 샘으로 옛날부터 물이 맑고 차서 음료수로 이용하였다.   글을 새긴 우물 뚜껑은 경복궁 중건(1868) 때 만든 것이다. 샘에서 솟아난 물이 두 번 직각으로 꺾여서 연못으로 잔잔히 흘러들도록 만들었는데 이것은 향원지(香遠池)에 드리워진 정자와 꽃나무의 그림자가 물결에 흔들리지 않고 고요히 비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꺾어지는 수로(水路)는 둥근 돌로 통로를 만들어 흐르는 물이 더욱 생기를 띠게 한다.

 

 

 

 건청궁

건청궁은 향원정 북쪽  경복궁 가장 깊숙한 뒤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고종내외가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간섭에서 정치적으로 자립하기 위해  1873년(고종 10)에 건청궁을 궁궐 안 북쪽에 별도로 조성했다.  침전인  곤녕함,  옥호루와 왕의 사랑채인  장안당 , 서재인 관문각으로 이루어 졌으며,  곤녕함은 1895년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가 시해된 비극의 장소이기도 하다.  1909년에 헐린 후 1939년에는 이 자리에 미술관이 들어섰고, 해방 이후 민속박물관으로 쓰이다가 헐렸다.    2007년에 관문각을 제외한 전각들을 복원했다.

 

명성황후의 비극: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본격적으로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을 시작한다. 이에 친러정책을 구사하며 일제에 정면으로 맞섰던 명성황후는 건청궁에서 참혹한 죽음을 당하게 돈다.   1895년 8월 20일(음력), 일본공사관 직원, 일본군, 일본 자객들이 건청궁에 난입하여 왕후를 찔러 죽이고 그 시신마져도 녹산에서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것이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른바 을미사변이다.

 

 

건천궁에서의 마지막 밤과 아관파천 : 경복궁 전각들 중 '궁'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은 건청궁이 유일하다. 건청궁은 고종을 위한  궁궐 안의 궁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고종이 건청궁에 기거한 것은 10년 남짓한 세월뿐이다.  을미사변 후 고종은 늘 신변의 위험을 느끼며 살아야 했다.    일본이 장악하고 있는 경복궁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국공사관으로 옮겨 가려다 실패하고, 1896년  2월 11일 새벽에 고종은 변복을 한 채 황태자만 데리고 신무문으로 빠져나가  러시아공사관으로 갔다.  이를 '아관파천'이라한다.  '아관파천' 이후 조선  왕조는 다시는 경복궁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왕의 처소인 장안당

 

 

 건청궁 서 문쪽

 

 

  집옥재(集玉齋) 일원

집옥재는 청나라풍과 조선풍의 조화를 이룬 1876년 경복궁에 큰 불이 나자 고종은 창덕궁으로 옮겼다가 1885년에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와 주로 건청궁에 기거했다.   이때 창덕궁 함녕전의 별당이었던 집옥재와 협길당(協吉堂) 등을 1891년 건청궁 서편으로 옮겨 와 서재와 외국 사신 접견소로 사용했다.  집옥재는 양옆 벽을 벽돌로 쌓아 만든 청나라풍 건물로, 밖에서 보면 단층으로 보이나 내부는 중2층으로 되어 있다.  팔우정(八隅亭)은 팔각 누각으로 기둥 상부에 청나라풍의 화려한 낙양각을 달았다.   반면 협길당은 고유한 조선식 건물로 온돌방을 두어 휴식 장소로 사용했다. 세 건물은 복도를 통해 연결되며, 각각의 특색을 지니면서도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팔우정(八隅亭): 청나라 풍의 팔각 누각

 

 

 

 신무문

경복궁 쪽에서 본 신무문 

 

 경복궁 쪽에서 본 신무문 (1896년  2월 11일 새벽에 고종은 변복을 한 채 황태자만 데리고  경복궁을 빠져나가 러시아 공관으로 간 신무문- 이를 '아관파천'이라한다. ) 

 

 

 북악산과 청와대

신무문 북쪽 경복궁 후원 영역에는 융문당, 융무당과 옥련정, 경농재와 왕이 직접 농사를 지어 보던 내농포(內農圃), 왕이 군사훈련을 점검할 수 있는 경무대 등 여러 건물들이 있었다.   그런데 일제는 광화문 앞에 조선총독부를 지으면서 이 후원 영역에 총독관저를 짓기 위해 건물들을 모두 헐어 버렸다.  경복궁 후원 영역이 경복궁에서 떨어져 나간 시점이다. 총독관저는 미군정기에는 군정장관의 관저로 , 그 이후에는 대통령 관저로 사용하다가 1960년에  '청와대' 라 개칭하였다.

 

 

청와대쪽에서 본 신무문 

담장아래  관람객 쉴 수 있는 낮은 의자가 인상적임  

 

 청와대앞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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