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한국의 고승 大覺國師 義天

백합사랑 2009. 4. 24. 21:40

 寧波 누각식 塔 많아

 大覺國師 義天은 天台山 佛籠의 智者大師塔앞에서 고려에 天台敎觀을 전할것을 서원함으로써  일단 渡宋여행의 목적을 이루었다.

 그는 곧 귀국길에 올라 明州(지금의 寧波)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天台縣에서 明州까지의 거리는  1백 30여 km, 의천은 다시 몇날 몇달에 걸쳐 걸어서 明州에 도착한 것은  5월 10일경이었다. 明州에 도착한 그는 고려로 출발하는 배를 기다리면서 인근의 사찰을 찾고 승려를 만나보는 예의 求法활동을 계속하였다.   義天의 여행길을 추적하는 우리 답사팀도 天台縣박물관의 관람을 끝으로 寧波를 향하여 북쪽으로 길을 재촉하였다. 한창 공업화를 서둘고 있는 寧波를 지나면서 산이 적어지더니 , 蔣介石의 고향인 奉化를 지나자 다시 일망무제의 평야지대로 들어섰다. 도로는 확장공사로  먼지투성이였으며, 논에서는 막 수확하고 난 그 자리에 다시 모심기를 하고 있었다..  11월 10일 寧波의 날씨는 12도c~21도c로 온화하였다

 

 인도 아쇼카왕이 만든 佛頂眞身舍利를 모신 阿育王寺- 梁武帝가 아쇼카왕의 사리봉안을 기념해 阿育王寺라는 이름을 내렸다.

 

  天台縣을 출발한지 4시간만에 寧波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점심식사 후 곧바로 근교의 天童寺와 阿育王

寺를  찾아 나섰다.  奉化江을 건너 寧芽 公路를 따라 가는 길은 포장이 잘되어 있었고, 차창 밖의 풍경이 한국의 그것과 유사하였다.   도중 寧波로부터 동쪽으로 35km지점의  鐵蛇關이라는 고갯마루에 서있는 백색의 전탑인 五佛鎭계塔을 지나쳤다. 중국의 탑은 대부분이 벽돌을 이용한 고층누각식인 데다가, 언덕꼭대기나 고갯마루와 같은 곳에 세워졌기 때문에, 여행객들에게는 등대처럼 길잡이 역할을 하였다. 또한 대개는 내부 계단을 통하여 위로 오라갈 수있기 때문에 훌륭한 전망대 구실을 하였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석탑과 크게 다른 점이다. 이 五佛鎭계塔의 아래에는 損讓亭이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宏智선사와  大慧선사가 이곳에서 만났을 때 서로 자리를 양보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한다. 이 고개부터 天童寺까지의 거리는 4km이다.  天童寺는 승려 70여명이 상주하는 제법 큰 사찰에 속한다.   울창한 대밭을 지나 萬工池라는 이름의 放生池를 돌아가면 하얀색의 照壁이 나타나는데, 거기에 [萬法祖宗]이라는 글씨가 큼지막하게 씌어있다.   天童寺는 宋代 禪宗五山의 하나로서 일찍이 曹東宗이 성행하여 외국에까지 영향을 미쳤던 사찰이다.  한국에서는 臨濟宗만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曹東宗은 전래되지 않았으나 일본불교계에는 道元이 이곳에서 曹東宗을 전수받고 돌아가 日本曹東宗을 개창하여 선종의 중심종파가 되었기 때문에 지금도 해마다 일본 조동종의 승려와 신자들의 참배가 끊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도 50~60명의 일본인 승려와 신도들이 예불을 올리고 있었다.

 

道元의 眞影 봉안돼

  또 雲彩堂에는 道元의 기념비와 진영이 봉안되어 있었으며,  대웅전의 오른쪽에 우뚝 솟은 鐘樓는 중국특유의 龍모양의 치미로 장식되어 있으면서도 채색은 일본풍이 완연하였다.    1980년대 이후 불교 소생과 함께 문화혁명 기간에 파괴되었던 사찰을 중건하였는데,  여기에 일본불교계의 자금이 많이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면서 일본 승려가 다녀갔던 곳이면, 그를 기념하는 비석과 탑을 세워놓았다.

우리가 직접 목격한 것만 하더라도 赤山 法華院, 梡州 淨慈寺, 天台山의 國淸寺와 智者塔院, 그리고 이곳 天童寺가 그러하였다.  여기에 비해 한국승려들과 관계된 사찰이나 유적에 대해서는 아직 학술조사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있다. 寧波에서는  동쪽으로 20km 지점에는 阿育王寺가 자리잡고 있다.  405년에 처음 창건되었으며, 이 절에는 印度의 아쇼카왕이 만든 8만4천 석가모니의 佛頂眞身舍利를 모셨다고 하며 522년 梁武帝가 阿育王寺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 절은 오늘날도 80여명의 승려가 상주하는 상당히 큰 규모의 사찰로 중국의 禪宗史에서 유명한 승려들이 많이 거쳐갔으며, 특히 송대에는 인근의

天童寺와 함께 禪宗五山의  하나로 손꼽히기도 하였다.  義天은 귀국하는 배를 기다리던중  이 阿育王寺를 찾아 大覺懷璉(1009~1090)이라는 명승을 만났다.   懷璉은 雲內宗의 승려로서 戒行에 뛰어났으며, 宋 仁宗황제의 후원하에 開封 최초의 선종사찰인 十方淨因禪院에 머물면서 황제를 비롯한 蘇軾등의 士大夫들과 교유하였다.  1085년에 은퇴하여 남쪽지방으로 내려오다가  四明郡守의 요청으로 阿育王寺에 머물러 만년을 보내고 있었다.   懷璉은 義天을 송별하면서 뱃길의 안녕을 기구하며 준 시가 大覺國師文集(外集)에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에익 쯔쯔

상하 동서의 네 귀퉁이를 끊어버리니,

들은 자 그 누가 삶을 귀중하게 여기랴.

오직 이 소식 얻은 이는 계림의 祐世僧統으로

해동 고려국의 큰 보배자리를 아끼지 않고,

머리와 수염을 깎고 가사를 입었도다.

하늘과 땅을 가리키며 법의 경계에 들어 희롱하니,

하하하

동해바다에  큰 배 띄워 파도에도 평안하도다.

 

우리 일행이 阿育王寺에 닿은 때는 오후 4시 30분경,  서산에 해가 기울고 있었다.   높다란  下塔이 석양에 붉게 물들고 있었다.  八吉祥地라는 현판이 걸린 天王殿을 지나서 대웅보전 앞에 닿으니, 그곳에는 막 차려놓은 듯한 4인분의 음식상이 차려져 있었다. 숙주, 두부, 맨밥, 튀긴 밥, 물(白酒), 콩, 해조류,  토마토, 그리고 이름모를 나물반찬 사이로 [面然大士鬼王之位]라고 쓰인 위패가 놓여 있었다.   대웅보전 뒤에는 석가모니의 頂骨 진신사리를 모신 舍利殿이 있었는데, 아쉽게도 개관 시간이 지나서 내부에 봉인된 사리탑을 볼 수 없었다. 문헌기록 의하면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는 阿育王塔 속에 안치되어 있는데, 이 탑은 인도의 阿育王(아쇼카왕)이 조성한 8만 4천개의 탑중 하나라고 하며, 오늘날 중국에 남아있는 것으로는 유일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明代에 편찬된 [明州阿育王山志]에 의하면, 唐 宣宗代(846~859)에 신라 승려가 이 진신사리탑을 반출하려다가 미수에 그쳤다고 한다.

 

 蘇軾이 글짓고 글씨

   舍利殿 뒤에는 懷璉이 황제와 주고 받은 詩文을 보관하기 위해 지은  宸(집신)奎閣이 있지만,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宸奎閣碑와 阿育王寺 常住田碑,  그리고 妙喜泉碑銘 등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여야 하였다.  그 중 宸奎閣碑는 懷璉의  德行과 宋仁宗과의 관계 등을 기술한  것인데, 蘇軾이 글을 짓고 글씨를 쓴 것으로 더욱 유명하다.     그러나 현존하는 것은 明萬曆년간에 重刻한 것이다. 그리고 常住田碑는 唐代인 833년 萬齊融이 짓고, 范的이 글씨를 쓴 것인데, 書法上의  佳作으로 평가되어 왔다. 또한 妙喜泉碑銘은 南宋 때인 1157년  張九成이 짓고 쓴 것으로  위 2개의 비석과 함께 阿育王寺에서 수장하고 있는  名碑의 하나이다.

 

글/ 최병헌 <서울대교수 한국학>

출처/ 1995년 문화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