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해인사

백합사랑 2009. 9. 12. 13:06

 동생한테서  함께 여행을 하자고 평택으로 내려오라는  전화가 왔다. 대전 동생도 올것이라고 ~

사촌동생들이지만 친형제가 없는 나에겐 친형제와 똑 같은 동생들이다.

 

 창밖으로 처음보는 멋진 산들의 풍경이 펼쳐집니다. 이곳이 무슨 고속도로인지?       차도 많지않고  참 조용하고 좋습니다.

 

 

 

 드디어 해인사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우리 일행 중엔 가야산으로 오를  사람도 있고 나머지는 해인사 관람을 하던지 자기 힘에 맞는대로 등산을 하고 돌아오라 했습니다. 가야산에 오르는 사람도 시간상 정상(1432)까진 힘들다고 서장대(11159)까지만 오르고 내려오라는 회장님의 당부가 있었고. 난 남들보다 산에 잘 못오르니까 해인사와  마애불까지만 올랐다 내려오려했는데 날이 워낙 덥다고 동생들이 그냥 계곡에서 놀다 가자고 합니다.

마애불까지 오르고도 싶었지만 동생들과의 만남도 소중했고 나역시 덥고 힘든다는 생각이 들어서 우린 해인사를 돌아보고 적당한 곳으로 쉴곳을 찾았습니다.

해인사 계곡은 보호를 위해 들어가지 못하도록 되어있어서 산에 오르지 못한 사람들은 길가 그늘을 찾아 대강 앉아 쉬기로 하였습니다.  부지런한 동생들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고 떨어진 도토리 주우러 나무밑을 뒤집니다.  

 

 

 

 

 

 역시 계곡물은 맑고 투명합니다  이렇게 맑은 계곡으로 남을 수 있는 것은 역시 '출입금지' 덕인것 같습니다.

가야산은 우리나라의 불교 전통이 가꿔온 성지로서 예로부터 이름난 명산이자 靈山이다 가야산의 '가야(gaya)'는 '최상의'라는 뜻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성도하신 붓다가야에서 따왔다고도 하고, 옛날 가야국이 있던 곳의 산이라는 데서 유래하였다고도 한다.  가야산은 서남쪽 자락에 해인사를 품고 있으며 곳곳에 암자와 석물, 옛 사찰터와 고적을 보유하고 있다.

중국 남조시대의 지공(誌公)스님(418~514)은 해동의 가야산에 대가람이 세워져 불법이 번창하리라는 예언을 했다고 전한다 그로부터 약 300년 후인 서기 802년에 해인사가 창건되었다.홍류동 계곡은 가야산 주봉인 상왕봉과 남산 제일봉(일명 매화산) 사이를 굽이쳐 흐르면서 주변의 기암괴석, 송림 등과 어울려 사시사철 절경을 이룬다.

 

 

 

 

 

'경비실' 이라는 문패가 붙었습니다  

집이 너무 이뻐서 나도 경비하고 싶습니다 ㅎㅎ

 

 

 

 

 

  다래나무 덩굴이 이렇게 굵은 것은 처음 봅니다.

 

 

 

 절 입구  비석거리 부도전

해인사 입구 비석거리에는 해인사 사적비를 비롯한 20여기의 공덕비들이 안치되어 있다.비석거리 뒤편 언덕에는 해인사의 禪風을 크게 일으킨 慈雲(1911~1992), 성철(1912~1993), 혜암(1920~200?), 日陀(1929~1999) 스님의 행적비와 사리탑을 모셔 놓은 부도전이 있다.

 

 

 

 

 비석거리 부도전 앞에 나무다리

 

 

 

 

           왼쪽엔 원표석이        가야산 해인사      오른쪽에 당간지주 .

해인사는 서기802년(신라 애장왕3년)에 순응, 이정 두 스님이 창건하였다. 해인사의 이름은 화엄경의 '해인삼매'에 기초하였다고 전해진다.   해인삼매는 바다에 풍랑이 그치면 모든 형상이 온전히 비치듯이 법계의 실상을 본래 모습 그대로 자각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해인사는 창건 이래 우리나라 화엄종의 근본 도량이었으며 현재는 대한불교 조계종이 지정한 최초의 총림(선원, 강원, 율원을 모두 포함한 종합수행도량)으로 운영 되고있다.  특히 고려팔만대장경판을  봉안하고 있어 불법의 큰 보배가 현전하는 법보 종찰로 유명하다.  유네스코(UNESCO)는 해인사에 보관된 고려팔만대장경의 고유한 역사 . 문화적 가치를 인정하여 1995년 장경판전을 세계문화유산으로, 2007년 대장경 경판을 비롯한 해인사의 모든 경판을 세계기록 유산으로 등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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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고승 원경왕사(1045~1114)를 기리고자 인종 3년(1125)에 세운 비다. 가야면 야천리 반야사 터에 있던 것을 1961년 해인사 경내로 옮겨왔다. 거북받침돌, 비몸, 지붕돌을 갖추었고 각 부분이 얇은 것이 특징이다. 비문에 의하면, 원경왕사는  대각국사를 따라 송나라에 갔다가 귀국하여 숙종 1년(1104)에 승통이 되었다.  예종 때 왕사가 된 후, 귀법사에 머물다 입적하였다.

 

 

 

 

 일주문 앞에 있는 용도가 무엇인지?  모르는 특이한 것

 

 

 

 일주문을 지나면 양옆으로 고목들이 울창하고 고목들 속엔 고사목이 우아하게 자리하고 있네요.

오른쪽 고사목은 신라 제 40대 애장왕 3년(서기 802) 순응과  이정 두 스님의 기도로 애장왕후의 난치병이 완치되자 왕이 이 은덕에 보답코자 법당과 승료등 많은 가람을 헌공하여 해인사를 창건하였고, 이를 기념하여 식수한 나무라고 전해지고 있으며

 이 느티나무는 1,200여년의 장구한 세월동안 해인사와 더불어 성장하여 오다가 1945년에 수령을 다해 고사(枯死)하고, 지금은 등치만 남아 해인사의 장구한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 옮긴글 -

 

 

 

  봉황문!

 

 

 

 

 

 

 

 봉황문에 들어가면 국사단이 보입니다.

國司壇은 국사大神을 모신 壇으로서 국사대신은 도량이 위치한 山局을 관장하는 [司] 산신과 토지가람신을 가리킨다.  가야산신(山神)인 정견모주(正見母主=깨달음의 어머니)는 하늘의 신 이비가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다.  큰 아들 이진아시왕은 대가야국을 , 작은 아들 수로왕은 금관 가야국을 각각 건국하였다 한다.  국사대신은 인간세상을 손바닥 보듯이 하면서, 신비스런 현풍(玄風)을 떨쳐 해인사에 재앙을 없애고 복을 내린다.   가람을 수호하는 신을 모셨기 때문에 도량 입구에 배치되어 있다.]

- 옮긴글 -

 

 

 

 

 

 구광루엔  부처님 사리 전시를 하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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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인범종각과  해인도

 

 

 

 

 

 

 

 해인사 대적광전과 비로탑

 

 

 

 

 해인사 대적광전 불상

 

 

 

 

궁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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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부전,  응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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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팔만대장경이 있는 경내에선 사진금지로 되어 있어서 경내 모습을 그곳에 있는 안내판을 대신 보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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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대장경이 있는 곳 

 

 

 

 

 

 예전엔 장경각에 들어가서 기념 사진도 찍을 수 있었는데 유네스코에 등재된 이후로는 카메라사용금지라고 되어 있어서 계단 아래서만 찍을뿐 장경각 안에서는 사진을 찍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사람들이 없을 틈이 없어서 ~

 

대장경의 역사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제자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으로 남겨야 할 절실한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그리하여 만들기 시작한 최초의 기록이 나뭇잎에 가르침을 새긴 패엽경(貝葉經)이다. 대장경이란 ' 세 개의 광주리' 뜻의 산스 크리트어 '트리피타가(tripitaka)'를 번역한  것으로 경(經) . 률(律) . 논(論) 등 삼장(三藏)의 불교경전을 총칭하는 것으로 일체경(一切經)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대장경은 크게 세 분류로 나뉜다.

가장 먼저 이루어진 대장경은 '팔리어 삼장' 이다.

이것은 초기 불교의 성전인데, 붓다가 설한 가르침인 경장(經藏)과 계율과 교단의 규칙인 률장(律藏)과 제자들이 교법을 연구한 논장(論藏)을 포함하고 있다.

그 다음으로 티베트어로 번역된 '티베트 대장경' 과 오늘날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한역대장경이 있다.

한역대장경에는 북송칙판대장경을 시작으로 초조대장견, 거란대장경, 고려속장경, 신수대장경, 남전대장경 등 세계적으로 주요한 20여 종의 대장경이 있는데, 교정이 철저하여 정확도가 높고 완성도 면에서도 다른 대장경이 따라올 수 없는 완벽한 대장경으로 고려 팔만대장경 꼽고 있다.

 

 

 

 

 

장경각에서 나오면 대비로전 

비로자나불을 모신 법당을 비로전이라고 한다.  비로자나불은 왼손 집게 손가락을 오른손으로 감싸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는 중생과 부처, 번뇌와 깨달음이 본래 하나라는 것을 상징한다.   해인사 대비로전에는 9세기에 조성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동형쌍불 비롤자나불이 모셔져 있다.  비로자나불 내부에서 나온 묵서명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씌여져 있다.   " 서원합니다. 대각간님의 비로자나부처님이시여!  오른쪽 부처님은 비(妃)님의 부처님 입니다. 중화 3년(서기 883년)계묘년 여름 부처님을 금을 입혀 이루었습니다.

 

_옮긴글_

 

 

 

 

 

 

  독성각 앞에 공사로 들어가보질 못하고 먼발치에서 ~

 

 

 

 학사대

학사대는 신라 말기의 문장가이자 학자였던 고운 최치원(857~?)이 만년에 가야산에 은거하여 시서(詩書)에 몰입하던 곳이다.  그가 이곳에서 가야금을 연주할 때 수많은  학이 날아와 경청했다고 한다.    당시 거꾸로 꽂아 두었다고 전해지는 전나무 지팡이가 지금까지 살아있으며,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가지가 아래로 쳐져 거꾸로 자라는 것처럼 보인다.

 

 - 옮긴글 -

 

 

 

 

 

 해인도

 

 

 

 법성계

 

해인도 따라 돌기 

화엄경을 요약한 210자의 법성게 글자 하나하나는 선재동자가 만난 53선지식을 대신합니다. 그러므로 해인도를 따라 도는 과정은 업장을 소멸하고 진리를 깨달아 가는 여정입니다.  자신의 발원을 소원지에 적어 해인도를 돌면 소원이 성취됨은 물론이며, 참회내용을 소원지에 적어서  해인도를 따라돌면 사후에까지 큰 공덕이 있습니다.

1 . 소원지에 자신의 이름과 소원 내지 참회의 내용을 적은 후 해인도 앞에 서서 합장 반배하고 화살표 방향을 따라 입구로 들어섭니다.

 

2 . 발원한 내용을 마음에 새기고 소원지 뒤에 적힌 법성게를 외우며 명상하듯 천천히 걷습니다

 

3 .해인도를 전체 한 바퀴를  돌면 다시 처음 출발했던 정중탑 앞에 서게 됩니다.  이는 처음 출발했던 그 자리이자 번뇌 망상을 벗어난 반야지혜의 자리입니다.   . 제불보살님들의 가피로 죄업이 소멸하여 새로이 깨끗하게 태어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4 . 회향하는 마음으로 정중탑에 합장 반배를 하고  다시 열린 길을 따라 나오면서 들고 있던 소원지를 소원함에 넣어주세요.

- 옮긴글-

 

 

 

 

 

 해인사 사천왕은 탱화로

 

 

 고로쇠 나무 - 단풍잎을 닮은

 

 

 

계곡 들어가면 안된다하여 우린 인도에서 쉬었는데 ? 

 

 

 

 

 

여행을 하다보면 좋은 계곡 놔두고 관광버스 옆에 밥을 펴고 먹는 것을 보며 의아해 했었는데

바로 내가 그런 상황이 되었다.  그래도 준비해오신 분들의 정성이 담겨서인지?

너무 맛난 점심이었다  

 

 

 

 

 

 

 돌아오는 길목 서산에 해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