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아산 현충사 (충무공 이순신이 살던 집과 사당이 있는 곳)

백합사랑 2012. 11. 2. 17:29

예전엔 입장료를 받았었는데 지금은 무료입장 할 수 있는 충무공이순신장군의 현충사

현충사(顯忠祠)

아산 사적 제 155호

이충무공 유허

이곳 백암리 방화산 기슭은 충무공 이순신장군(1545~1598)이 혼인하여 살던 옛집과 공을 기리는 사당이 있는 곳이다.

충무공은 이곳에서 10년 간 무예를 연마하여 서른두 살 되던 해(1576년, 선조9년)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충무공이 순국하신지 108년이 지난 1706년 (숙종 32년), 이곳에 공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사당을 세웠으며 1707년  숙종 임금이 현충사(顯忠祠)라 사액하였다.

 그 뒤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사당이 훼철되었으나 일제 시대인 1932년 온 겨레의 정성으로 사당을 다시 세웠다.

1945년 광복 후에는 매년 4월 28일에 온 국민의 뜻으로 탄신제전을 올려 공을 추모하여 왔으며 1966년부터 1975년까지 고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의한 성역화사업으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일생을 충의에 살고 나라를 구한 공의 높은 덕을 더욱 많은 이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2008년부터 2011년까지  현충사 유적정비사업에 따라  충무공이순신기념관을 건립하였다.

몇 년전에 갔을때 공사중이던 곳이 완성된 기념관

 

거북선

충무공이 전라좌수사로 있을 때 일본의 침략을 대비하여 만든 조선 수군의 돌격선이다. 1592년 5월 29일 사천해전에서 첫 선을 보인 후 수많은 일본함대를 격파하고 제해권을 장악하는 데 큰 공적을 올렸다.

일본인의 군선

 

임진장초 국보 제 76호 (조선.복제)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조정에 올린 장계(狀啓)들을 다른 사람이 따로 옮겨 적은 책이다.  전란 당시의 출전 경과 일본군의 정황,  군사상 건의 사항  진중의 경비 상황 등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어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사료의 하나로 꼽힌다.

 

 

 

조선과 일본의 군선 모습

 

 

 

 

 

 

충무공이순신 (忠武公李舜臣)  영정

충무공이순신은 임진왜란 중 전라좌수사와 삼도수군통제사로 조선 수군을 이끌고 일본 수군을 무찔러 나라를 구한 우리 민족의 성웅이다

32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시작한 이래 늘 맡은 바 책임을 다하여 주위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일찍이 일본의 침략을 내다보고 거북선을 만들었으며,임진왜란 중에는 출전하는 싸움마다 승리하였다.    그러나 퇴각하는 일본군을 노량 앞바다에서 마지막까지 추격하여 싸우다가 1598년 11월 19일 새벽,   일본군의 총탄에 쓰러졌다.   선조 때 선무 1등 공신에 녹훈되고,  인조 때 '충무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정조 때 영의정에 증직되고  이순신에 대한 기록을 집대성한  [이충무공전서]가 간행되었다.

이순신의 연표

1545년(인종원년) 서울 건천동(서울 중구 인현동)에서 나다(음 3월 8일)

1565년(명종 20) 전 보성군수 방진의 딸과 혼인(21세)

 

장인의 권유로 무예 연마(22세)

1572년(선조5) 훈련원 별과에 응시했으나 낙방(28세)

 

 

1576년(선조9) 병과  식년무과 급제(32세) 제4인 (2월)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32세) 종9품 12월 관직생활 

1580년(선조13)- - 발포수군만호 종4품( 7월)(36세)

1583년 (선조 16)- 함경도 남병사 군관(7월) (39세)   - 부친 별세(39세)

1586년 (선조 19) 조산만호 겸  녹둔도둔전관(종4 품)(43세)

 

1587년 (선조20) - 녹둔도 둔전과나 겸임(8월)   여진족 침입으로 백의종군(10월) (43세)

1588년 (선조21)- 시전부락 전투에서 공을 세워 백의종군에서 사면됨 (44세)

1589년(선조22)- 정읍현감 종6품 (12월) (45세)

1591년(선조 24) 2월 전라 좌도수군절도사 (정3품)임명(2월)(47세)

ㄷ- 전란에 대비,  거북선 건조

1592년(선조25) 4월 임진왜란 발발.  옥포 합포 적진포해전(5월)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해전(6월)

한산대첩(7월)  부산포해전(9월),  4차례출전하여 10번 싸워 승리(48세)

   - 가선, 자헌, 정헌대부로 승자

1593년(선조26)- 2월 웅천해전   - 7월 한산도 진을 옮김

1593년 8월 삼도수군통제사 임명 (49세)

1594.9(선조 27) 명일간 강화교섭으로 휴전 .  한산도 진중 무과 (1594 4월 1596 윤 6월)- 장문포 수륙합동작전 (9월)

1595년 8월 병사들에게 잔치를 베품

1596년(선조29) 5월  - 전염병으로 죽은 병사를 위해 제사

1597년(선조 30) - 조정의 출전 명령 거부로 2월 투옥  백의종군(4월)(53세)

7월 삼도수군통제사 재임명

9월 16일 명량대첩(해전)

1598년(선조31년)  고금도엥 진을 옮김(2월) 명나라 수군과 연합(7월) - 

 노량해전 11월 19일 전사(54세)   '나의 죽음을 말하지 말라!'

 

 

 

 

 

보물제 1564-9호

이순신장군의 처 상주방씨 정경부인 교지

 

보물 제 1564-7호  장군의 무과급제교지

충무공이 1576년 식년무과(式年武科)에 병과 제4인으로 급제하고 받은 교지이다

문무과의 최종 급제자에게 내리는 합격증 서인 이 교지는 붉은 바탕의 종이를 썼다 하여 홍패(紅牌) 라고도 한다

 

 

 

 

보물 제 1564의 4호 사부유서(임창용 기증)

충무공이 1591년 전라좌수사로 임명될 때 받은 유서(諭書)이다   유서란 조선 시대 임금이 군사권을 가진 관원에게 내렸던 명령서로 이 유서를 내릴 때 왕은 발병부를 함께 내려주었다.

 

 

국보 제 76호 서간첩

 

국보 제 76호 난중일기(亂中日記)

충무공이 임진왜란 7년 동안 전장에서 치른 많은 전투와 그속에서 겪은 숱한 일과 사람들에 대해 솔직하게 적어 내려간 일기이다.  원래 임진, 계사 등 해를 나타내는 간지(干支)만 적혀 있을 뿐인데 정조 때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면서 [난중일기]라 이름 붙여서 지금까지 전해오게 되었다.

 

 

 

 

 

 

요대(腰帶) 보물 제 326호(중국 명나라 장수로부터 받은 선물일다)

 

 

복숭아 모양 술잔(桃盃)   보물 제 326호   (중국 명나라 장수로부터 받은 선물일다)

 

 

옥로(玉鷺 - 갓머리에 다는 장신구로 옥으로 해오라기(鷺) 모양으로 만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보물 제 326호 (조선)

 

충무공 장검 보물 제 326호

三尺誓天 山河動色 (석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가 떨고)

一揮掃蕩血染山河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인다)

충무공이 오랜 전란 속에서 왜적을 몰아내고자 하는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만든 칼이다.   칼날에 "三尺誓天 山河動色  一揮掃蕩血染山河"라는 친필 검명(劍銘)이 새겨져  있고 칼자루 속에  甲午四月日造太貴連李茂生(갑오년 4월에 태귀련과 이무생이 만들었다)" 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어 1594년에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정조 어제 신도비 탁본

 

 

정조 어제 신도비문 탁본

 

 

일본 무기   조총

 

 

조선의 화포

 

 

조선의 무기와 전술

 

 

일본의 무기와 전술

 

 

 

타루비 복제품 보물 제 1288호

 

연못에 잉어들이 많기도 하지만 크기도 어찌나 큰지 저 하얀 잉어는 입을 벌릴때마다 어찌나 큰지 작은 물고기는 입속으로 딸려들어갈 것만 같습니다

 

 

 

 

충무공 옛집과 활터

충무공이 혼인하여 장인으로부터 물려받아 살았던 옛집이다.

집 뒷편에 있는 가묘(家廟)에 충무공 신위가 모셔져 있고 지금도 해마다 이곳에서 기제사를 모시고 있다.  활터는 충무공이 활쏘기를 하던 곳이다.

 

활터

 

이순신 장군이 사랑한 3째 아들 이면의 묘가 있는 곳

 

 

 

 

 

 

 

 

본전 -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영정을 모신 곳  입구 충의문

 

충무공 영정이 모셔진 본전 - 현충사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형식의 콘크리트 한옥으로 1967년에 세워졌다.

 

 

 

 

본전 현충사에서 보이는 전망

 

구본전은 공사중

구본전은 1932년 중건되었을 당시의 현충사 본전이다.  현재 본전이 신축되면서 그 이듬해인 1968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의 목조 한옥집이다.

 

 

화살나무에도 열매가 이쁘게 달린 것을 처음 봅니다

 

 

 

외진곳에 있는 칼국수 집임에도 맛이 좋은 칼국수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