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백봉 김기추 거사님의 일대기

백합사랑 2009. 6. 10. 11:42

몇달이나 몇년에 한 번씩 연락하고 지내는 지인에게서 아침에 안부 전화가 왔다.

며칠전에 음악회에 갔다가 문득 생각이나서 내가 전화를 했더니 처가댁 행사로 처가에 와 있다고 했다.

휴일이라 집에 있으면 내외가 함께 음악회에 오라고 전화 했다고 말하며 빨리 전화를 끊었었다.

그렇게 끊었던 일이  무슨 일이었었느냐고 묻기도 할겸,  안부전화겸 전화를 하면서 ......

백봉김기추거사님이라는 분에 관한 이야기를 해준다.

재가거사지만  한 소식을 하신 분이라고 .......

내게 이 소식을 알려준 지인도 열심히 참선을 하는 분으로

직장 퇴근을 하면 몇시간이라도 도심에 있는 선방을 찾고,   휴일이나 휴가 때는 선방을 찾아 용맹정진을 하는 그런 거사님이다.

가끔은 은근하게 내게도 용맹정진을 함께 했으면 하고 권하는 그런 지인 ~~~

날마다 허송세월 하는듯 보이는 내가 딱해보여 안쓰러워 하는  도반 ~

그가 백봉 선생님에 관해 자기의 도반에게 듣고 관심을 갖었더니 그 도반이 백봉선생님 관한 여러 자료를 보내와서 읽어보는 중 내게 전화를 했다고 한다.

아마도 공부 좀 열심히 하라고 권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나 보다.

그래서 전화기를 잡은채로 네이버에 검색을 했다 '백봉김기추'  검색을 했더니 줄줄이 그분에 관한 목록들이 나온다

그중에 '보림선원'이라는 홈페이지로 들어가서 아래 글을 읽고  백봉거사님의 일대기를 옮겨왔다. 

글을 읽으며 나의 나태한 생활을 반성하게 되고 더 열심히 정진해야겠다는 생각을 일꺠워준 지인에게 감사한다.

 

 

 

1908년 부산 영도에서 태어난 백봉 김기추 거사는 대범하고도 반항적인 기질로 암울하던 시대에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뒤늦게 56세에 불법을 만나 무자 화두로 정진하던 중 육개월만에 (1963년 1월) 활연대오(豁然大梧)한 우리시대 의 도인(道人)이다. 큰 깨달음을 이룬 뒤에도 속가(俗家)에 머물면서 거사풍(居士風) 불교를 크게 일으켰다. 많은 지식인들이 그를 찾았으며, 그의 자비심에 넘치는 열정적인 설법은 많은 사람에게 인생의 존엄성을 알게 하였고, 닫힌 마음이 열리고 눈에서 분별의 비늘이 떨어졌으며 망상을 놓아 참다운 자유와 평화로움에 이른 제자들이 적지 않았다. 1985년 8월 2일 아침 마지막 수련대회에서 해제설법을 마치고 입적하였다.  

1. 감방벽에 쓴 관세음보살

백봉 거사의 본명은 김기추(金基秋). 1908년 2월 2일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한의원을 경영하였다. 어린 시절을 전통적인 유학(儒學)의 분위기에서 성장했으며,부산 영도 초등학교를 나와 부산 상업학교 에 진학하였다. 그러나 중학교 2학년 때 교명이 부산제이상업학교로 바뀌게 되 자,조선어와 조선역사를 교과목에 넣어주길 요청하고 학교 교명을 바꾸려는 교 명반대운동을 선동하다가 주동자로 퇴학을 당한다. 그 뒤 백봉은 민족 단결과 조선 해방에 뜻을 둔 청년 동맹에 가입해서 초대 총무 로서 일제에 항거하다가, 초대 회장인 정일송이 형무소에 수감되자 제이대 회장 을 이어받아 청년운동을 계속하다가 일제의 재판을 받고 부산 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한다.

 

이 수감생활을 할 때 동생 김양추가 당시 일본어로 된 {채근담}이 나 {벽암록} 같은 책을 넣어주었는데,백봉은 {벽암록}에 붙은 부록에서 참선법에 대한 짧은 글을 읽고 무작정 면벽(面壁)을 했다. 이틀을 감방벽을 바라보고 앉아 있으니까 벽 밖에서 사람들이 오가는 것이 보이고 전깃줄에 참새가 몇마리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창문틀을 잡고 발돋움을 하여 창밖을 바라보니 정말로 사람들이 오가고 전깃줄에 참새가 앉아 있었다. 백봉은 이것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때는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당시 그는 사회운동과 민족주의 사상에 전념하던터라 불교나 기독교 등의 종교를 미신으로 치부하던 무신론자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일제하의 탄압과 해방 후의 온갖 시련을 거치면서 '사람이란 무엇인가?'라는 회의로 발전했지만,스스로 내린 결론은 '양심적으로 살다가 깨끗하게 죽으면 그만이다'는 생각이었다. 감옥을 나온 백봉은 계속해서 일제의 요시찰 인물로서 일제에 항거하는 활동을 하다가 일제의 검거를 피해 만주로 피신을 한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일제의 감시를 피하지 못하고 결국 헌병대에 잡혀가 감옥 생활을 하게 된다. 바로 이 감옥에서 그는 관세음보살과의 인연을 갖게 된다. 그의 직접적인 육성을 들어보자.

 

[그럼 여러분들 내가 공부하게 된 원인을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난 과거 일제시대에 청년운동을 좀 했습니다. 그 청년운동을 하다가 징역도 살고 그랬는데...불교니 예수교니 하는 것들을 전부 미신으로만 알았습니다. 그 당시 내가 어떻게나 똑똑했던지( ?) 일제 밑에서 일하던 사람들을 사람으로 안봤어요. 그들이 어떤 자리,어떤 위치에 있던지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했고,더욱이 민족적 사상도 없다고 얕보는 생각을 했어요. 이거 탁 털어놓고 지나간 일을 말씀드리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데,아마 젊을 때는 이런 생각도 한번 갖게 되나봐요. 그래서 사회운동도 하게 되었는데,날 아끼는 친구들에게 '네가 그렇게 해봐야 아무 소용 없다, 그렇게 한다고 우리나라가 독립이 되겠나' 하는 충고도 많이 받았습니다.

사실 그들의 말이 옳거든요. 전부 그 말이 긍정이 돼요 . 하지만 긍정이 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내 생각이 없어지질 않아요. 그래서 나중엔 학교도 퇴학당하게 되고 취직도 하질 못하게 되었습니다. 취직을 할려고 해도 일본 사람 밑에서는 꿈에도 되는 것이 아녜요. 설사 내가 하고 싶어도 안되는 겁니다. 항상 사상이 나쁘다고 감시를 받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일정한 직업도 없이 있다가 나중엔 만주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사실 만주를 난 먹고 살기 위해서 갔어요. 가긴 갔는데 만주나 우리나라나 꼭 한가지입니다

 

(계속 요시찰 인물로 감시를 받았음). 당시 경상남도 의 경찰 간부들이 만주의 경찰 간부로 옮겼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백봉은 부산과 경남 지역 청년동맹 위원장을 지낸 바 있었음).  그러니 취직 생각을 하지도 않았지만,취직을 할려고 해도 취직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때 나는 만주에서 동만산업개발사라는 회사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광고지를 일본말로도 쓰고 한국말로도 써서 일본의 관청과 한국의 관청에 다 보냈습니다. 이 회사는 금광을 소개하고 토지도 소개하고,만약 토지를 살 경우 농사까지 지어준다고 광고를 했습니다. 사실 자본 한 푼 없이 무작정 벌인 겁니다.

 

 한 열흘 있으니까 일본에서 답장이 오고 한국에서도 왔습니다. 한국에서 온 답장에는 이력서가 들어 있었는데,그 이력서를 보고 내가 울었습니다. 그 내용이,나를 그 회사에 넣어 주시오, 월급도 얼마 안주셔도 됩니다,내 뼈를 만주땅에 묻을랍니다...이런 식이었습니다. 이 편지를 가만히 보니 내 신세나 다를 바가 없어서 눈물을 흘린 겁니다. 어쨋든 얼마 지나니까 헌병대에서 헌병이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날 유치장으로 데려가 집어 넣었는데,거기서 6-7개월 고생했어요. 아무 이유도 없이 붙잡혀 들어간 거예요. 그 당시엔 필요없는 인간은 수갑을 채워서 밖으로 데려나가 꿇어 앉힙니다.

 

그리고는 수갑을 풀어주고 구덩이를 파게 한 뒤에 칼로 쳐서 죽였습니다. 당시 나하고 함께 감옥 생활을 하던 사람 중에 최씨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무식한 사람인데 늘 하는 얘기가 딸이 보고 싶다고 그래요. 딸이 그때 열다섯살이었는데,그 사람 하는 말이 아버지 나 마누라보다는 딸이 제일 보고 싶다고 그래요. 또 공산당 유격대 대장이 하나 있었습니다. 김씨라고 했죠. 눈이 부리부리하고 얼굴이 잘 났습니다.

 

 또 중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 난 사람이 있었고,공산당당원인 중국 사람과 일본인도 한명 있었 어요. 일본인은 경찰 서장하던 사람인데,어떤 잘못을 저질러서 붙잡혀 왔어요. 그런데 그 조그만 유치장 안에서도 그렇게 사회가 다르고 이념이 달라요. 또 내가 있던 여관 주인과 거기서 내가 알고 있던 사람들도 나 때문에 다 붙잡혀 왔습니다. 무슨 죄목인 지도 모르죠. 내가 죄가 없는데 그 사람들이 죄가 있을 턱이 있나요. 그 사람들에게 '김기추를 언제부터 아느냐?'고 하면서 고문을 해요. 사실은 다 알면서도 기를 꺽는다고 그렇게 하는 겁니다. 한번씩 불려 나가면 어찌나 두들겨 패던지 걸어 들어오는 사람 이 없어요. 좌우간 반죽음이 되서 들어와요. 그런데도 나는 부르질 않아요. 난 '한번 불려나가서 맞기 시작하면 굉장히 맞을려나 보다. 까딱하면 내가 죽을지도 모르겠구나. 헌데 죽을 때 죽더라도 정신은 차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문소리만 나면 가슴이 덜컥했어요. 게다가 반죽음이 되서 돌아온 사람들은 전부 내 걱정을 하는거예요. 그거 참 할 짓 아니데요. 당시 내가 무신론자인데-내가 이 얘길 하려고 옛날 이야기를 하는겁니다-어찌된 이유인지 회칠한 감방 벽에다 한문으로 관세음 보살을 쓰기 시작했어요. 예전에 부산에서 청년동맹 위원장을 하다가 붙잡혀 들어가 징역을 살았는데,그때 책을 보다 관세음보살 이란 명칭을 알긴 알았어요. 아뭏든 이 관세음보살을 감방 벽에다 쓰기 시작했는데,한 5-6개월 쓰니까 벽 전체가 관세음보살로 꽉 찼어요. 물론 벽에다 낙서를 하면 걸린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겁을 내면서도 아무 이상이 없어요.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아마 내 딴엔 죽기가 싫었던 모양입니다. 당시 아까 말했던 딸 생각하던 최씨가 그 방에서 제일 먼저 죽었습니다. 이 사람이 밖에 나가서 죽을 때,'에이,니기미 X팔'하고 앉은 뒤에 한 칼로 죽었다고 밥 심부름 하던 아이가 소식을 전해줬어요. 또 공산당 하던 김씨는 헌병에게 다가가 '날 살려다오,내가 그 은혜는 갚을께.날 살려다오'라고 말하더라는 거예요.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하,무식하긴 두 분 다 무식한 분인데,최씨가 좀 더 여유가 있구나,죽는 판에도 그렇게 늠름하게 갔으니." 또 어머니가 한국인이고 아버지가 중국 사람인 그 아이는 만주국 국가를 부르고 죽었다고 전해줘요. 그도 공산당으로 들어왔는 데,마지막에 만주국 국가를 부른 것은 혹시 살려주지 않을까 생각해서 부른 것이라 생각했어요. 아뭏든 감옥 안이 이런 판이었어 요. 한쪽에선 내가 아는 사람들이 반쯤 죽어서 들어오고,한쪽에선 모가지가 떨어지고 있었으니 말예요. 그러니 내 딴엔 좀 놀래고 걱정스러우니까 온 벽에 전부 관세음보살이라고 쓴 것 같아요. 겁나는 줄도 몰랐습니다.

 

 내가 이렇게 하다가 걸리면 죽는다는 생각이 있었지만,그 생각이 그리 깊지가 않았어요. 그거 참 이상한 겁니다. 그러던 어느날 전부 나오라고 해요. 방을 점검하겠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나는 밖으로 나오면서 '아이고,오늘 내가 죽는구나' 하고 생각을 했어요. 감방 벽에다 잔뜩 써놓았으니까 말예요.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 전부 앉아 있는데,사토라는 헌병이 와요. 이 사람이 3백명까지 목을 자르고 그 다음부턴 안잘랐다고 자기 스스로 말한 사람입니다. 이 자가 다가와서 '어이,김기추,너는 관 세음보살을 막 써놓았데'라고 말해요. 어이쿠,이젠 큰일났구나 생각하는데,그 자의 표정을 보니 웃으면서 말을 해요. 퍼뜩 머리 에 떠오르는 것이 '일본엔 불교가 성하다던데 이 자가 불교 집안인가 보구나'하는 생각이 들어요.

 

 나는 죽을 판이라서 아무 대답 도 못하고 있는데,가만히 얼굴 표정을 보니 사람을 죽이려는 표정이 아니예요. '까딱하면 내가 살는지 모르겠구나'-이렇게 생각 하면서 감방에 들어와보니,벽에 관세음보살 써놓은 것도 그대로 있어요. 당시에 나는 쓰면서도 '관세음보살'을 외우고,다 써놓고 도 '관세음보살' 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니,나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외우면서 쓴 것 같아요. 안 외우면 그렇게 써지질 못합니다. 여러분이 자비심을 발동시키면 바로 여러분 자신이 관세음보살의 대행기관입니다. 관세음 보살과 여러분이 둘이 아니예요. 또 여러분은 파순(波旬;악마)이도 될 수 있습니다. 모습놀이모습[相]에만 집착해서 살아가는 것을 하면그 몸 그대로 파순이가 되는 겁니다. 하지만 그때 내가 이런 걸 알 턱이 있나요.

 

그러다가 한 달쯤 있는데,헌병 오장(伍長)인 기무라라는 자가 운동복을 입고 막대기를 들고 들어왔어요. 덜커덩하고 큰소리를 내면서 문을 열더니,내 이름을 부르는 거예요. "이제,난 죽는구나. 내게 물을 먹이면 물 먹을 자신은 있는데,정신은 잃지 말아야겠다." 단지 이 생각 뿐입니다. 그래서 따라 나가니까 기무라가 목욕탕으로 가요. '그렇지,날 물 먹인 뒤에 때릴려나 보다'라고 생각 하는데,그가 문을 열더니 '어! 아직 준비를 안해 놓았네'라고 말한단 말예요.

 

그때 또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물 먹일 준비를 다 해놓고 날 불러야될텐데,이거 이상하구나,까딱하면 내가 살는지 모르겠구나." 목욕탕에 고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자,기무라가 날 다른 방으로 데려가요. 그 방에선 다른 사람을 취조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아하,다른 사람을 취조하고 있는 방을 빌어서 가니,이건 계획적으로 하는 건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그 방에서 취조하고 있던 자가 날 보더니 '아,이게 김기추인가?'하는 겁니다. 방 안에 들어간 나는 방 한 쪽에 서 있었는데,날 데리고 나온 기무라가 내게 의자를 권해요. 내가 의자에 앉자,기무라는 연필을 가지고 와서 내 손가락에 끼운 뒤에 누르는 거예요. 하지만 그 정도로는 뼈가 부숴져도 상관 안합니다.

 

그렇지만 거짓으로 아프다고 하니까,'에이'하면서 좀 놔두다가 감방으로 돌려 보내 는 거예요. 감방으로 돌아오니까,사람들이 날 보고 놀랍디다. 내가 무사히 돌아오니까 놀라는 거예요. 그리고나서 며칠 뒤에 풀 려났는데,그 뒤부터는 헌병들이 날 대하는 태도가 먼저와는 달라요. 취직을 하라는 거예요. 아마 그들이 날 살려서 이용을 할 것 인가,아니면 해로우니 죽여버릴 것인가 의논하다가 살려주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진 것 같아요. 그래서 취직을 하는데,당시 노구교 사건이 터졌어요. 그 사건 때문에 헌병 대장이 현지로 가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 바람에 나도 집에 좀 다녀 오겠다고 하면서 집으로 온 뒤 흐지부지 안가고 말았습니다.]

 

 

2.수행과 경계

만주의 헌병대에서 '관세음보살 사건'으로 살아나긴 했지만,백봉은 여전히 종교와는 무관한 삶을 살았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백봉은 일정한 직업 없이 지냈다.물론 주위에선 취업을 하도록 종용했지만,그의 마음은 움직여지질 않았다. 그러다가 광복을 맞게 되고,해방 후에도 격동하는 현대사의 조류에 휩쓸려 모진 시련과 좌절을 겪었다.

 

 이러한 시련과 좌절로 인해 그는 인생의 무상함을 철저히 느끼고 있었는데,하지만 56세 때 불법을 공부하기 전까지 그의 종교관은 앞서 말했듯이 아주 소박한 것이었다. 그가 처음 절에 가게된 일화는 당시 불교에 대한 그의 생각을 잘 드러내준다. 어느 여름날 같이 어울려서 술마시던 친구들이 절에 피서를 간다고 하면서 백봉도 절에 같이 가자고 권유했다. 그때 백봉은 이렇게 대답했다. "좋네,그럼 술은 내가 사지." "뭐라고! 절에서 술을?" 친구중에서 불교공부를 많이 했다는 신원경거사가 화를 냈다. "거 참,이상한 인간이다. 돈을 내가 내서 사겠다는데,어째서 성을 내지?" 백봉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면서, 왜 화를 내냐고 물었다. "아니,절이 무슨 술 마시는 곳인 줄 압니까?" 신원경거사가 물었다. "그럼,경치 좋은데 절이 있지 않은가? 그런 곳에 가서 술 안마시면 도대체 어디서 마시겠나?" "어허..." 신거사는 기가 막혔다. 하지만 백봉도 기가 막혔다.

 

 신거사는 신거사대로, 백봉은 백봉대로 기가막힌 판국이었다. 그러자 신거사는 절은 그런 곳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불교 공부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참선이나 화두 등에 관한 얘기와 견성을 하면 엄청난 경지에 오른다는 등의 말이었다. 얘기를 들은 백봉은 불교 공부나 견성은 되는 사람이나 되지 아무나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신거사는 계속 백봉에게 불법을 공부하도록 권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에서 공부를 못하고 마음을 바로 갖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집니다." "그럼 공부를 하면 지옥에 안떨어집니까?" 백봉이 물었다.

 

"지옥이 붙을 자리가 없는데 어떻게 지옥에 떨어집니까?" 이 말을 들은 백봉은 굉장히 놀랐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선문답같은 말이었다. 지옥이 붙는다니, 안붙는다니! 평생 나쁜 짓 안하고 일제에 항거하고 육영사업도 했지만, 부모님에게 효도도 하지 못했고,처가에도 잘 해드리지 못했으며,또 술을 너무나 좋아하고,평소에 사람들을 좋게 보지 않던 백봉은 자기가 지옥에 들어가기 십상인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러자 이 공부를 해서 지옥에 떨어지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처럼 백봉은 단순하게 남의 말을 믿어버리는 성격이었다. 후에 그는 '내가 어리석었기에 오늘의 존재 가 있는 것이지 똑똑했다면 오늘의 존재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바로 이 '어리석음' 때문에 공부를 하면 지옥에 안떨어진다 는 말을 고지식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래서 공부를 하겠다고 결심한 백봉은 술친구들을 따라서 충청도 청주근처에 있는 작은 절로 갔다. 절에 도착한 일행은 주지 스님을 만나 인사를 했다. 여기서도 도반들은 주지에게 삼배를 하는데 백봉은 절을 할 줄 몰라서 당황을 했다. 억지로 절을 마친 백봉은 주지에게 엉뚱한 부탁을 했다. 모두들 견성(見性)이 어렵다고 하므로,가만히 생각해보니 견성은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놓은 엉뚱한 말이었다. "견성같은 것 말고 요술이나 배워주십쇼.돈 나와라 하면 돈이 나오고,누가 미우면 때려줄 수도 있는 요술말입니다." 주지 스님은 어이가 없는지 허허 웃으면서 말했다. "공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정당한 마음과 올바른 생각으로 하는 겁니다.

 

그래야만 견성을 합니다. 요술을 배울 힘으로 좋은 걸 배워야지 나쁜 것을 배우면 되겠습니까?" 그리고나서 주지는 그를 인도하기 위한 방편으로 천수다라니를 외우면 견성한다고 하면서 다라니를 외워보라고 했다. 이 말을 그대로 믿은 백봉은 집으로 돌아온 그날부터 다라니를 외우기 시작했다. 아침에 눈만 뜨면 외우기 시작해서 밤까지 부지런히 외웠다. 그렇게 사흘을 외웠다. 견성이 될 줄 알았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시 혼자서 그는 그 절의 주지를 찾아가서 물었다. "내가 사흘 동안 잘 외웠는데,아무 소식이 없습니다." "무슨 소식 말입니까?" "아,견성한다고 해서 내가 열심히 외웠습니다." "그래요. 아니,일평생해도 될까말까라고들 하는데,사흘 동안 다라니를 외웠다고 해서 견성한다는 생각을 가졌습니까? " "예,그렇습니다. 난 하면 철저합니다.

 

" 주지는 기가 막힌지 웃었다. 그리고나서 단시간에 진짜 공부를 하고 싶다면 화두를 가지라고 하면서 무(無) 자 화두를 주었다. 이렇게해서 백봉은 화두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 한달 반 정도는 화두가 잡히지 않아 무척 애를 먹었다. 화두를 잡았다가도 자꾸 놓쳐버렸다. 그는 고난과 좌절로 점철된 자신의 삶을 되새기면서 반드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다졌다.이 공부를 하지 못하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오를 새롭게 다지자,그 뒤부터는 화두가 슬며시 잡히기 시작하면서 별별 환상이 다 나타나기 시작했다. 생각하면 생각하는 대로 환상이 일어났다.처음에는 좋은 환상이 아니었다. 머리가 열두개씩 달린 구렁이가 나타나기도 하고,돼지가 나타나서 물려고 달려 들고,머리가 여럿 달린 사람이 나타나는 등 나쁜 것이 수없이 나타났다.

 

 망상에서 비롯된 무서운 환상이었다. 공부하다가 미치는 수가 있다고들 하는데 정말 미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백봉은 이러한 환상이 다 헛것이며 비과학적이라고 늘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환상이 나타났다가도 이내 사라졌다. 나중에는 절도 나타나고 스님들도 나타나기도 하고,급기야는 태양과 달같은 광명이 나타났다. 방 안에서 불을 끄고 참선을 하는데, 밖의 광경이 그대로 보였다. 처음에는 흑백으로 보이다가 나중에는 색(色)도 나타났다. 밖에 있는 솔나무 잎 하나하나가 그대로 선명히 보였다. 오히려 대낮에 보는 것보다 더 자세히 보였다. 하지만 그는 이것도 망상으로 보았으며,다만 망상이긴 하지만 좋은 경계라고 그냥 넘어갔다.

 

 어째서 그런 생각이 드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당시 그는 인천에서 살았는데,늘 서울로 와서 공부를 하고는 내려 갔다. 또 워낙 술을 좋아한 그는 친구들과 술 마시는 자리를 빠트리지 않았는데,그같은 술자리에 앉아서도 무자화두를 한시도 놓치지 않았다. 술좌석에서도 광명이 나타나자,그는 옆사람에게 물었다. "자네,저 광명이 보이는가?" "아니,무슨 광명?" 옆사람이 대답했다. 백봉은 자신이 환하게 광명을 보았다면,다른 사람도 그 광명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기 눈에만 보이는 이 광명은 마음의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차츰 차츰 화두삼매에 들어간 것이었다. 그러다가 중간에 그는 화두 공부를 집어 치우려고 했다. 화두 공부를 하는 중에 몸이 너무나 괴로와 죽을 것만 같았다. 몸에 어떤 이상이 생겼는지 알아보려고 병원에 가서 검사를 했으나,아무 이상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때서야 그는 화두 때문에 몸이 아프다는 사실을 알았다. 화두가 딱 들러붙어서 떨어지질 않았던 것이다. 마침내 그는 화두를 버리려고 했지만,화두는 떨어지질 않았다.

 

화두를 버리려는 그 마음이 화두를 갖고 있는거나 마찬가지였다. 나중에는 할 수 없이 화두를 갖게 되었다. '내가 팔자가 나쁘니 이 공부를 해야겠는데,화두가 떨어지질 않으니 그대로 갖고 있자. 또 도반들이 화두를 깨면 굉장하다고들 하니 죽으나 사나 갖고 있자'-이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상태가 한 달 이상 계속되었다. 불교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다시피한 백봉은 처음엔 무자 화두가 육조 스님에게서 나온 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화두를 계속 참구하다보니 육조의 환상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백봉은 그 육조의 멱살을 잡고 지근지근 씹어서 뱃 속으로 집어 넣었다. 그러자 육조의 환상이 '날 살려다오' 하면서 아우성쳤다. 백봉은 그 환상을 향해 어째서 무(無)라고 말했는지 답을 내놓으라고 했다. 그러다가 나중에 무자 화두가 육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조주 선사에게서 나온 것임을 알게 되었다. 육조에게 너무나 미안함 을 느낀 백봉은 육조의 환상을 뱃 속에서 토해냈다. 밖으로 나온 육조의 환상은 사라지면서 한마디 했다. "기추,그 양반, 되게 무섭네." 백봉은 다시 조주를 머리부터 지근지근 씹어 뱃 속에 넣고는 화두를 참구했다. 어느날 그는 밤새도록 참선을 하다가 문득 아침을 알리는 고동 소리를 들었다.

 

잠시라도 자야겠다는 생각을 하는데,갑자기 방 안이 환해졌다. 백봉은 '이거 또 망상이 일어나는구나. 헌데 이 망상은 좋은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옆을 보니 하얀 옷을 입고 갓을 쓴 분이 세 분 앉아 있었다. 그는 다시 생각했다. "이 망상은 이상하구나. 좀 두고봐야겠다." 당시 그의 앞에는 그림이 한 장 있었다. 국민학교 5학년 정도의 어린이가 사람을 그린 그림이었다.

 

그때 앉아 있던 세 분 중 한 분이 그림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 그림이 저 하늘의 달과 원리가 하나다. 그런데 기추,네가 분별이 많기 때문에 그 원리가 하나인 줄 모를 따름이다. " 이 말을 들은 백봉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말을 한 사람의 목소리가 바로 자기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가리킨 곳 을 보니 정말 달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달이 없을 때라는 것을 백봉은 알고 있었다. 잠시 후 그들이 사라졌다. 백봉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목소리가 자기 목소리이니 결국은 망상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 경계를 체험한 며칠 후 백봉은 도반들과 다시 청주에 있는 그 암자로 겨울 공부를 하러 가게 되었다. 공부하겠다는 도반들만 남녀 합쳐서 아홉명이 모여 보름간을 정진하기로 하고 갔다. 며칠 전에 기이한 경계를 체험한 백봉의 심경에는 이미 모종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

 

 그 변화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백봉 자신도 알지 못했지만,이상하게도 마음이 들뜨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들뜸은 아주 좋은 느낌이었다. 절에 가자 들뜬 마음은 더욱 심해졌다. 밥을 먹어도 밥맛이 없었고 잠을 자도 잠이 오지 않았다. 마음이 들뜬 것이 마치 내 보물을 내가 어디다 간직해 놓고 내가 잊어버리고 있는듯한 느낌이었다. 백봉의 태도에서 이상함을 발견한 도반들은 서로 의논을 해서 암암리에 그를 돌봐주기로 했다. 일주일 정도가 지났다. 이제는 밥을 먹는 것조차 귀찮아졌다. 이상함을 느낀 신거사가 백봉에게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백봉은 묵묵히 따라나갔다.

 

 이상하게도 말조차 하기가 싫었다. 도반들이 자길 돌보기 위해서 그런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 돌봄이 고마왔지만,이상하게도 말이 하기 싫었다. 두 사람은 5-6백미터 정도 떨어진 마을로 내려 갔다. 평소에 말이 많던 신거사도 그날따라 말이 없었다. 백봉은 내심 이상히 생각하면서 걸어갔다. 이상하게 걸음을 걷는데도 발이 땅을 딛는 느낌이 없었다. 마을을 걷다가 백봉은 어느 나무 아래서 앉자고 말했다. 신거사도 아무 말 없이 따라 앉았다. 백봉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점점 더 커져갔다. 뭔가를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확실히 잡히지를 않았다. 백봉은 다시 절로 가자고 말했다. 신거사도 따라 일어났다.

 

 두 사람은 다시 절로 돌아갔다. 절에서는 매일 모여서 예불을 했다. 도반들은 견성성도(見性成道)하길 기원하는 원(願)을 세우면서 예불을 드렸다. 간절한 염원 때문에 도반들은 전부 눈물을 흘리면서 예불을 하였다. 그러나 백봉은 눈물이 나오질 않았다. 젊은 시절 청년 운동과 대중생활을 해본 경험이 있는 백봉은 대중과 함께 생활을 할 때는 대중을 따라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도저히 눈물이 나오질 않았다. 하루가 지난 뒤 예불을 드릴 때는 눈물이 나올락말락 하다가 아 나온다고 좋아하니까 다시 쏙 들어갔다.그런데 그때 목탁 소리가 이상하게 들렸다. 목탁 소리가 딱 딱 딱 하면서 단음절로 들려야 하는데,이상하게도 따딱 따딱 따딱 둘로 들리는 것이었다. 백봉은 옆의 신거사에게 물 었다.

 

 "자네,목탁 소리가 몇 개로 들리나?" "목탁 소리가 하나로 들리지 몇 개로 들리겠소?" 백봉은 그러면 그렇지 하면서 자기 귀에 이상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옆을 바라보니 신장(神將)이 보였다. 바로 옆에 서있는데,마치 탱화의 그림처럼 멋진 갑옷과 칼을 차고 있었다. 백봉은 '요즘같으면 총을 차고 양복을 입고 있어야 할텐데' 라고 생각하면서 다시 옆의 도반에게 물었다.

 

 "자네,여기 신장이 보이지 않나?" "신장이라니 무슨 신장이 있다고 그래요. 아무 것도 없는데." 백봉의 눈에만 신장이 비친 것이었다. 백봉은 자기가 귀만 이상한 것이 아니라 눈까지 고장이 났다고 생각했다. 이 공부를 해서 견성을 하면 굉장하다고들 하는데,이제 귀 병신 되고 눈 병신 되는데 무슨 공부를 하겠는냐는 생각이 들자 그때서야 눈물이 나왔다. 하지만 그 눈물도 조금 나오다가 말았다. 결국 사람들과 한 방에서 참선과 예불을 하는데 거북함을 느낀 백봉은 되도록이면 방에 있지 않고 밖에 나가서 참선을 했다. 당시는 겨울이었는데 눈이 많이 와서 쌓였다. 그러나 밖으로 나온 백봉은 아무 바위에나 앉으면 그대로 화두 참구로 들어갔다. 그에게는 공부의 방법도 체계도 단 하나 아는 바가 없었지만,한번 앉으면 일어날 줄 몰랐다. 몇시간씩 보내긴 일쑤고 어떤 때는 밤을 샐 때도 있었다.

3.깨달음

암자에 온지도 며칠이 지난 1963년 1월의 어느 날이었다. 그 날도 백봉은 몸에서 열이 나자 도반들을 피해 밖으로 나와 바위 위에 앉아서 참선을 했다. 하늘에서는 커다란 눈송이가 소리없이 내리고 있었다. 깊은 삼매에 들어간 그의 몸에는 내리는 눈이 수북히 쌓였다. 하지만 무릎 위에 올려 놓은 손만은 눈이 닿는대로 녹아버렸다. 몸의 열기 때문인 것 같았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새벽 4시 쯤. 당시 암자에서 4-5리 떨어진 마을의 동네 사람들은 사랑방에서 놀다가 집으로 가는 중이었는데,그들은 암자 있는 곳에서 화광(火光)이 솟구치는 것을 보았다.

 

 마을 사람들은 광명이 솟는 곳에 금광이나 금불상같은 것이 있다는 속설에 따라 삽과 곡괭이를 들고 암자로 올라왔다. 빛이 비치는 곳을 따라가보니,바위 위에 한 사람이 눈에 쌓여서 코만 빠꼼히 내놓은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가서 살펴보니 옴몸이 얼어 있는데 숨소리만 가느랗게 들렸다. 사람들은 얼음장같은 그 사람을 방 안으로 안아서 데려갔다. 신거사와 도반들이 나와서 그의 언 몸을 주물러서 녹였다. 그즈음 백봉의 행동에서 이상한 느낌을 받고 있던 신거사는 백봉의 기색을 살펴본 뒤 평소 보고 있던 무문관이라는 책을 가져 왔다. 그리고는 아무데나 펼쳐 보였다.

 

 "마음이 곧 부처다[卽心卽佛]."는 글귀가 나왔다. 이 귀절을 본 백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알 것 같았지만,별다른 느낌은 없었다. 신거사는 다시 백봉의 안색을 살피다가 다음 장을 넘겼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非心非佛]."는 글귀가 나왔다. 이 귀절을 본 백봉은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훗날 자신의 표현대로 '덜컥 걸려들었던' 것이다. 멍멍한 기분이었다. 갑자기 백봉의 몸에서 방광(放光)을 하자,도반들은 그가 대오(大悟)한 걸 알아차리고 일어나서 세번씩 절을 했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모습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유리창문을 통해 멀리 산이 보였는데, 그만 그대로지 변한 것이 없었다. 그 때 무거무래역무주(無去無萊亦無住)라는 글귀가 생각나면서 오랫동안 엉어리져 있던 의심이 탁 풀렸다. 화두를 타파한 백봉은 바같으로 나가 바위에 편안하게 앉았다. 바로 그때 암자 아랫 마을에서 땡그렁 거리는 예배당 종소리가 들려왔다. 종소리를 들은 백봉 은 깨달음의 심경을 이렇게 읊었다.

홀연히도 들리나니 종소리는 어디서 오나
까마득한 하늘이라 내 집안이 분명허이
한 입으로 삼천계를 고스란히 삼켰더니
물은 물은, 뫼는 뫼는, 스스로가 밝더구나

忽聞鐘聲何處來
廖廖長天是吾家
一口呑盡三千界
水水山山各自明

이 '종성'(鍾聲)이라는 시에 대한 백봉의 직접적인 설법을 들어본다.

[당시 내가 벌떡 일어섰어요. 멍멍한 상태인데,도반들이 전부 내게 세번씩 절을 했대요. 그땐 내가 몰랐거든. 나중에 들으니 그런 것 같아요. 그때 방 남쪽으로 창이 하나 있었는데,창을 통해 바라보니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어요. 변했다면 또 망상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지. 그때 마을에서 예배당 종소리가 들렸는데,그 종소리를 듣고 '홀연히도 들리나니 종소리는 어디서 오나'[ 忽聞鐘聲何處來]라고 했습니다. 물론 예배당 종소린 줄 알았어요.

 

 그러나 예배당이 예배당만이 아니거든. 유정(有情)과 무정(無 情;가령 예배당같은 건물)이 본래의 지혜에서 나와 갈린 것으로 그 당처(當處)는 하나예요. 쓰는[用] 데엔 유정과 무정이 영 달라요-아,돌멩이와 사람은 다르지 않습니까?-하지만 종소리 나는 곳은 한군데 아니겠어요? 우리가 예배당 종이다 뭐다 분별해서 그렇지 그 당처는 하나예요. 그 소리가 바로 나한테서 오는 것과 한가지입니다. "바로 온누리가 '나'이고,내가 있기 때문에 삼라만상이 벌어지는구나.

 

그러니 나와 부처님이 당처는 하나구나"-이런 것이 느껴져요.(만약 하나가 아니라면 부처님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나요? 그렇다면 불교 공부를 해도 공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이 소리가 온 곳을 안다면,예배당 자체가 내 몸 아닙니까? 온허공이 '나'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 '까마득한 하늘이라 내 집안이 분명허이'[廖廖長天是吾家]라고 했어요. 내 집이 어딘가? 허공 전체가 내 집이예요. 처음엔 '내 집'[吾家] 대신 '내 몸'[吾身]이라고 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몸이라 하든 집이라 하든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리고나서 '한 입으로 삼천계를 고스란히 삼켰더니'[一口呑盡三天界]라고 했는데,그때 내 심경이 이랬습니다. 산하대지가 전부 내 성품 속에서,내 뱃 속에서 밝기도 하고 어둡기도 했어요. 이거 거짓말이 아닙니다. 물론 이 몸뚱이[肉身]로서는 말도 안되는 소리죠. 하지만 '허공이 나'이니,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있을 수가 없어요. 내가 없는 데 산하대지가 있어요? 내가 없는데 부처님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과 나는 동근(同根)이란 말예요. 이 '나'는 파순이가 되려고 하면 당장 파순이가 되고,부처가 되려고 하면 당장 부처가 되고,중생이 될려면 당장 중생이 되요. 그 뿐인가 지옥에 갈려면 지옥에 가고 극락에 갈려면 극락에 갈 수 있어요. 그런데 이게 얼마나 크냐 이 말입니다. 원래 큰 것도 작은 것도 아니지만 ,적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허공을 싸고도 남고,큰 것도 아니기 때문에 바늘귀에 들어가고도 남아요. 이걸 과학적으로 생각해 보 세요.

 

 이렇게 생각해 보면 이 '나'는 정말 굉장한 겁니다. 바로 이 주인공인 '나'가 슬며시 알아졌단 말이예요. "야,그렇구나. 큰 것도 작은 것도 아니구나. 마음대로 하는구나. 이런 재주를 내가 갖고 있구나. 게다가 나고 죽는 것도 없구나. 단지 나고 죽는 것을 나투어서 쓸 따름이구나."-이런 사실도 저절로 알아져요-"그렇구나,그렇다면 이건 굉장 한건데. 참말로 절이라는데가 술만 먹는 자리가 아니구나. 그리고 산하대지를 비롯한 우주의 숱한 천체가 결국 이걸 벗어나지 못 했구나,이걸 벗어나면 의지할 곳이 없구나."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건 절대(絶對)에 속한 거예요.

 

그래서 자신이 딱 생겼습니다. 이렇게 느끼고서 바라보니,자기 인연에 따라서,자기 멋에 따라서 산은 산대로 물은 물대로 스스로가 밝았어요[水水山山各自明]. 그래서 이 시를 지은 겁니다. 하지만 육신에 들어 앉아서는 이런 글이 안나오는 겁니다. 당시 내 심경은 허공이 내 몸이었어요. 그러니 욕계,색계,무색계,천당,지옥이 다 허공 속의 작용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마음을 키울려면- 원래 키우고 안키우고도 없지만-이 육신을 내버려야 해요 . 사실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그 자리는 꼭 허공과 한가지입니다. 이 허공이 '나'라는 느낌이 들면 확 달라집니다. 우리가 중생놀이를 하는 것도 이 무정물인 육신 때문에 중생 놀이를 하는 것이고,우리가 공부를 해서 부처가 되려는 것도 이 육신을 방하착(放下着)해서 부처가 되는 거예요.]

4.열반

1985년 여름철 철야정진(徹夜精進) 기간이었다. 선원에서는 해마다 여름과 겨울에 두차례씩 일주일에 걸쳐 철야를 하면서 정진을 하는 전통을 지켜왔었다. 제자들은 이 해에도 전국 각지에서 오는 도반들을 맞을 준비에 바빴다. 백봉은 자신이 자주 인용하시던 자신의 <최초구>(最初句)라는 게송을 하얀 천 위에 썼다.

가이없는 허공에서 한구절이 이에 오니
허수아비 땅 밟을새 크게 둥근 거울이라.
여기에서 묻지 마라 지견풀이 가지고는
이삼이라 여섯이요 삼삼이라 아홉인 걸.

無邊虛空一句來
案山踏地大圓鏡
於此莫問知見解
二三六而三三九

그리고는 이 시를 제자들을 시켜 기다란 대나무 장대 위에 걸어서 선원 입구에 세워놓게 했다. 철야정진을 하러 온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 그동안 철야정진할 때 하지 않던 일이었다. 철야정진을 하러 온 사람들 중에는 한동안 오지 않던 백봉의 옛도반과 초기의 제자들도 많이 왔다. 일주일의 기간이 도반들의 용맹정진으로 지나갔다. 어느 제자에게 백봉은 이렇게 이야길 했다. "다음에 자네가 오면, 그 땐 나를 못 보네". 1985년 8월 2일 아침,백봉은 철야정진 해제식(解制式)을 끝내는 마지막 설법을 했다. 그리고는 방에 들어간 뒤 잠시 앉아있다가 조용히 쓰러졌다.

 

 제자들은 급히 병원으로 옮겼지만 병원에선 회생불가능이라고 말했다. 어찌된 일인지 의식이 전혀 없는 백 봉의 눈에서 눈물이 비쳤다. 중생에 대한 한없는 연민의 눈물처럼 느껴졌다. 이렇게해서 백봉은 열반에 들었다. 열반에 든 날로 부터 장례를 치르는 날까지 3일간은 비가 무척 쏟아졌지만,장례를 치르는 날에는 거짓말처럼 활짝 개었다. 장지는 평소 백봉이 말하던 선원 앞 지정된 장소에 모셨다. 지난 몇달간 백봉은 이번 8월에는 내가 이 산을 막 뛰어 다닐거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열반에 들기 2-3일 전에 평소 고생하시던 탈구증세가 악화되자 이 몸이 귀찮으니 이젠 내버려야 되겠다고도 말씀하셨다. 또 마지막 철야정진을 앞두고는 <최초구>게송을 제자들을 시켜 걸게 했다. 왜 그랬을까? 긴 장대에 꽃힌 이 깃발은 만장(晩章)이 되서 백봉을 보내고 있었다.

 

 

출처/ 보림선원 홈페이지에서~~

보림선원 글을 올려주신분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