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산악회에 갔다가 다른 산악회 회장님이라는 분께서 그 산악회에 다음주에 시산제가 있으니 와보라고 하신다. 초청해 주심이 감사해서 가겠다고 말씀을 드렸기 때문에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날 그자리에 나갔다. 이 산악회는 해마다 충남에 무슨 산에서 늘 시산제를 지냈었는데 올해는 구제역 때무에 갈 수가 없어서 이번에 간 괴산에 있는 산막이마을 등잔봉이라는 곳 아래서 제를 올린다고 하신다.
시산제 모습
추운 날씨에 두툼한 잠바를 입었음에도 춥다고 야단들인데 어떤 분은 끈달이 한개 입고 등산을 한다 지난번 다른 등산 영하 날씨에도 저 모습을 보았는데 이곳에서 또 만났다. 버스에서 내 옆자리에 앉으셔서 저 묵직한 배낭속에 들어 있는 갖가지 영양차 인삼에 표고버섯, 대추,감초 등을 넣으셨다는 차와 포도 액기스 배즙 등을 먹으라고 주시고 하물며 싱싱한 파푸리카까지 주신다.ㅎㅎ 그렇게 좋은 영양있는 자연식만 드셔서 추위도 안타시는 걸까? 집엔 여러가지 엑기스가 많은데 잘 먹히질 않는다시며 그래서 등산할 때 가지고 와서 나누어 먹는다고 하신다. 영하 8도까지는 저렇게 여름복장으로 다니신다며 저분은 겨울옷은 아예 없다하신다.ㅎㅎ 부럽다! 난 추위 대장인데 그리고 저분은 술, 담배, 커피는 절대 안드신다고 한다.
산막이 옛길 안내문
가는 길목엔 연리지 나무가 보인다.
뿌리가 서로 다른 나무의 가지가 한 나무처럼 합쳐지는 현상을 연리지라고 부른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연리지 앞에서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면 사랑이 성취되고 소망이 이루어 진다고 함
그래서 일까? 연리지 옆에는 하트 모양의 푯말에 영원한 사랑을 기원하는 기원물들이 즐비하게 걸려있음을 볼 수 있다.
수력발전소가 보이는 언덕 위에 그네며 여러가지 놀이 시설물들이 설치 되어 있다.
소나무숲 사이에 소나무 출렁다리가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즐기고 있다.
시간 여유가 있다면 편지 한 장 붙이고 싶었는데 빠른 걸음을 재촉하는 난 그냥 뒤돌아섰다
아기를 안고 탄 그네를 아빠는 밀어주고 있는데 보는 내가 더 아슬아슬하다 혹시 저 아래 호수로 떨어질까봐 ? ㅎㅎ
연화담~ 예전에 작은 천수답으로 농사를 짓던 곳인데 지금은연꽃을 심었다는 곳
호수 옆에 망세루가 있다.
망세루는 남매바위라 불리는 바위 위에 장자를 만들어 비학봉, 군자산. 옥녀봉, 아가봉과 좌우로 펼쳐진 괴산호를 볼 수 있는 정자로 세상의 모든 시름이 잊혀지고 자연과 함께 편안함을 느낄 수 있음
우리의 산행 목적지는 450m 등잔봉이라는 곳인데 산길이 좀 험한 편이라 산행이 어려운 사람은 45분 거리의 호수 주변 둘레길을 돌라고 알려준다. 난 능력은 호수 주변 돌 형편이지만 높이 올라 바라 볼 생각으로 등산을 택했다 혹시 내 능력이 넘쳐나면 얼른 등잔봉을 돌고 내려와 호수도 돌려는 생각도 해보며
하지만 그것은 욕심일뿐 등잔봉을 5분쯤 더 가면 된다는데 아래서 만나야 할 약속시간 지키려면 무리 해야 될 것 같아서 오르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조금 오르니까 멀리 마을이 보인다
괴산호수도 보인다
멀리 보이는 수력발전소는 1950년대에 우리나라 최초의 기술진으로 만들어진 곳으로 년 3000킬로와트의 전력이 만들어 진다고 한다. 사실 요즘 상황에선 전력의 쓰임새보다 관리비가 더 많이 들어 이용가치는 떨어지지만 맨처음 만들어진 기술이라고 하여 보전 되는 것이라고 군청에서 오신 분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산엘 오르다 보면 이런 표지판이 있다.
'힘들고 위험한 길'이라는 표지와' 편안하고 완만한 길'이라는 표지가 있는데 난 완만한 길이라는 곳으로 올랐지만 그래도 힘들었다.
내가 마지막 앉아 있던 곳에서 바라본 곳
맨처음 산밑에서 오르기를 같이 시작했던 베테랑 산인들 따라 오르려니 너무 힘이 들어 혼자 뒤쳐졌다. 우리 뒤 따라오던 모르는 산악인들 쉬는 무리에 섞여 쉬는데 그들이 막걸리를 권주한다. 못마신다고 했더니 바나나를 한 개 준다. 괜찮다고 같은 팀도 아닌데 안먹겠다고 했더니 같은 팀이 아니면 어떠냐고 극구 먹으라고 한다. 그들이 다시 산을 오르며 나도 같이 오르자고 서두른다. 난 그냥 좀더 쉬다가 내려갈까? 했는데 바나나만 얻어 먹고 달랑 그냥 내려오기가 좀 그래서 또 더 올랐다. 내가 발걸음을 천천히 띄면 몇 분이 날 앞세우고 뒤에서서 마구 재촉을 한다. 혼자 떨어지면 목없고 엉덩이만 있는 귀신이 나타나서 큰일난다고 하며 .....
내리막길이 더 힘들다는 말을 오늘에야 이해하게 됬다. 완만한듯 하지만 좁고 가파른 길이 그냥 내려가긴 위태롭다. 낭떠러지를 밭쳐주고 있는 베어진 나무들이 힘든 내리막길을 보호해준다. 역시 나무는 언제나 고마운 존재다.
그렇게 혼자 내려와 약속 시간을 지켜 점심 식당까지 이동을 하였다. 식당 주변 풍경이 아름답다.
우린 저 다리 건너편에 산에 올랐다가 내려온 것이다.
우리가 점심을 먹은 식당
이 주변에도 둘러 보고싶은 곳이 있지만 역시 시간이 문제로다.
등산 시간을 조금만 주면서 점심 식사후 천안 좌불상도 간다고 한다. 그말을 들은 난 주최자측이 불자라서 이곳에서 산신제를 지내고 부처님에게도 예를 올리러 가는 줄 알았다. 헌데 그곳에 도착해서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곳에 온것은 절에 올라가려고 온것이 아니고 절 부근에 유흥가를 가기 위함이었다.
그 이유는 춤을 좋아하시는 님들을 위해 맘껏 춤 출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기 위함이었다
어떤 분 내게 차에선 가만히 있었으니 그곳에 가서 맘껏 스트레스를 풀라고 친절히 말씀해주신다. 내겐 그게 더 스트레스인줄 모르시고 에고~
난 그분들이 춤추며 즐기실 동안 좌불상엘 다녀오겠다고 했다. 그렇게 각원사엘 오르고 있는데 내 뒤에도 여러분이 올라오신다.
꽁꽁 언 연못 위로 멀리 각원사가 보인다
좌불상이 있는 곳에서 내려다 본 각원사 전경
각원사 대웅전
대웅전에 모셔진 불상들
좌불상
좌불상을 중심으로 주변 산 봉우리가 마치 연꽃이 핀듯 보인다고 예전에 들은적이 있는데 내가 보기도 그렇게 보인다
불상에서 조금 내려가면 대불 공덕비가 있다.
클릭하면 글씨 자세히 보입니다!
공덕비 뒤엔 이 사찰이 세워진 원력에 대해 자세히 적혀있다.
내가 오래전 맨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는 아직 절 건축물이 하나도 없고 대불만 조성하고 있을때 였다. 그때 대불을 조성하던 홍익대 교수라는 분의 말씀도 들었다. 본래 자기는 기독교인이었는데 이곳 스님이 찾아와 불상을 조성해 달라하여 거절을 했었는데 며칠후 꿈에 선몽을 받고 다시 스님을 찾아 불상을 조성하겠다고 허락하고 자기 스스로 그곳 허허 벌판에서 천막을 치고 집에도 안가고 금욕생활을 하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불상을 조성하였다고 했던 말이 아련히 떠올라 자신없는 내 기억을 확인해 보려고 사무실에 찾아가서 이곳절에 관한 안내서 같은 것 있느냐고 물었더니 저 밑에 공덕비 뒤에 있다고 한다. 비각 밑에 안내서를 주는 곳이 있는줄 알고 기웃거려도 비석 주변엔 아무것도 없다. ㅎㅎㅎ
비석 뒤에 적힌 글을 알려준 것이다.
비석 뒤에 적힌 글을 보면
고려 태조 왕건께서 후삼국 통일을 위하여 양구한 곳으로 알려진 유서깊은 이 곳 태조산 기슭에 봉안한 남북통일기원대불은 한 재일동포의 신명을 다한 기도와 염원에서 이룩된 것이다. 그는 생전에 이름을 밝히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나 이제 그가 타계한지 3년이 경과 하였음을 기하여 이를 밝혀 그의 공덕을 기리고져 한다 그는 경주김씨익화군제주파19대손으로 성명은 김영조며 법호는 각연거사이시니 1930년 음 4월 4일 일본국 대판부에서 부 김두만. 모 고명월의 장남으로 출생하여 약년15세에 단신으로 동경에 상경하여 53세로 타계할 때까지 그곳에서 살으셨다. 거사는 평소에 모친의 영향으로 불심이 돈독하였으며 부모에 대한 효성심이 지극하였으나 불행히도 33세에 모친의 상을 당하게 되자 일본사원에 위패를 모시고 100간을 금욕하며 하루도 빠짐없이 분향을 다녔다는 것만을 보아도 불심과 그 효성심을 짐작할 수 있다. 거사께서 처음으로 한국불교계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에 부인 (정정자)과 함께 박법춘스님의 안내로 당시 필자가 관세음보살을 모시고 기도와 수학의 생활을 하고 있던 곳을 참배차 오신 것이 1974년 6월 26일이었다. 그날부터 매일 관세음보살을 1천번 북두주를 백팔번씩 독송하는 천일기도를 시작한지 백일째 되던날 필자가 염원하고 있던 동경도내에 한국사원건립에 협력의사를 표했으며 1년후에 동경 전단의 명월사가 이루어졌으니 명월은 모친의 명복을 비는 마음에서 그 이름을 따른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거사의 불사는 어느날 대지위에 솟아나는 큰 부처님의 꿈을 꾼후 대불조성의 대원으로 커지게 되어 한국관음회의 김상봉회장을 위원장으로 추대하시고 종정이서옹대선사를 총재로 모심으로써 대불봉안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대불조성은 홍익대학교 최기원교수가 담당하여 이 역사적인 대작불사는 착공 만이년만인 1977년 5월 9일에 증명법사 윤고암. 박기종.전관음. 강석주 원로선사를 모시고 대망의 점안식을 갖게된 것이다. 적수공권으로 상업에 종사하여 자수성가한 거사는 오랜 신앙생활에서 우리는 항상 남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보살정신을 깨달으시고 백번의 생각보다 한 번의 실천을 중요시했으며 상대방의 이익없이 내이익이란 있을 수 없다는 신조에서 참된 마음으로 살기에 노력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이 대불은 전민족의 염원인 남북통일성취를 기원하고 또한 이 곳을 참배하는 모든 분들의 깨달음을 원한다는 뜻에서 이 도장이 호국 각원사라 일컬어지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거사는 생전에 단 한번 대불을 친견하셨는데 그때 동행한 일본인 친우 빈천영웅(부인. 명미)씨는 서로의 우정을 기념하는 뜻에서 대불전에 향로와 대성경(?)을 희사하셨다. 無 . 空의 추구는 성불의 초보이다. 성심으로 봉사하는 것은 불심을 짓는 본업임을 확신한다. 이것은 마지막으로 남긴 거사의 신앙관이었다. 1982년 12월 29일 입적하심으로 평소에 그 조국애와 효성심이 후손에게 모범이 되기에 이에 공덕비를 건립하는 것이다.
1985년 5월 3일(단기 4318년) 건립 호국 각원사 대중일동 합장 申 法印 짓고 쓰다.
-비석에서 옮긴글-
그동안 들어 알고 있던 것을 글로 확인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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