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시내 큰길에서 골목길로 접어들어 400M쯤 가면 넓은 주차장이 있고 그 뒤로 높다란 계단 위로 올라가면 바다가 보이는 청마 문학관이 있습니다.
청마문학관 뒤로 돌계단을 오르면 복원된 청마생가 이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생가에는 유약국이라는 간판이 보입니다.
왜일까?
생각했는데 청마유치환님의 아버님이 한의사이셨던 이유였습니다.
청마 문학관에는 많은 전시물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유품들
청마문학관에 적혀 있는 청마의 출생기
[내가 태어난 때는 1908년 즉 한일합방이 이루어진 전전해로서 갈팡질팡 시달리던 국가 민족의 운명이 마침내 결정적으로 거꾸러지기 시작한 때요, 난 곳은 노도처럼 밀려 닿던 왜의 세력을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던 한반도의 남쪽 끝머리에 있는 바닷가 통영(지금의 충무- 다시 통영이 되었음)이었습니다.]
훗날 출생지 문제로 다툼이 있을 것을 예상이라도 한 듯 청마 유치환은 자작시 해설집 [구름에 그린다]에서 본인의 출생기를 너무도 정확히 기술하였다. 이 외도 [출생기 出生記] [귀고 歸故] 등의 자작시에서도 본인이 태어나고 자란 이야기를 시(詩)로 표현 하였다. 작가로서는 특이한 현상이다.
검정포대기 같은 까마귀 울음소리 고을에 떠나지 않고
밤이면 부엉이 괴괴히 울어
남쪽 먼 포구의 백성의 순탄한 마음에도
상서롭지 못한 세대의 어둔 바람이 불어오던
융희(隆熙) 2년
그래도 계절만은 천년을 다채(多彩)하여
지붕에 박 넝쿨 남풍에 자라고
푸른 하늘엔 석류꽃 피 뱉은 듯 피어
나를 잉태한 어머니는
짐짓 어진 생각만을 다듬어 지니셨고
젊은 의원인 아버지는
밤마다 사랑에서 저릉저릉 글 읽으셨다.
왕고모 댁 제삿날 밤 열나흘 새벽 달빛을 밟고
유월이가 이고 온 제삿밥을 먹고 나서
희미한 등잔불 장지 안에
번문욕례(煩文辱禮)사대주의의 욕된 후예로 세상에 떨어졌나니,
신월같이 슬픈 제 족속의 태반(胎盤)을 보고
내 스스로 고고(呱呱)의 곡성(哭聲)을 지른 것이 아니련만
명이나 길라 하여 할머니는 돌메라 이름 지었다오
[출생기]
또 세살 위인 형 동랑 유치진은 자신의 수필([동아일보], 1937 .7.22),
([자서전],1975), 마산 MBC출연(1962.2,1) 등에서 본인이 통영에서 태어났음을 말했다.
청마 유치환은 공부 (호적)상 정확히 1908년 7월 14일 통영시 태평동 552번지에서 한의(韓醫)인 아버지 진주 유씨 준수와 어머니 밀양 박씨 우수 사이의 5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거제시 둔덕면은 부조의 고향일 뿐이다. 거제에서 태어난 아버지 유준수가 통영의 박약국 집에 데릴사위로 와서 청마를 낳았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약국이 있는 통영의 친정을 두고 그 산촌의 둔덕 시가(媤家)에 가서 아이를 낳았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이해 할 수 없는 일이다.
위대한 작가를 기리고 기념하는 일이야 어디에서 한들 어떠랴,
그러나 작가가 태어난 곳은 두 군데일 수 없다. 어떤 연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유족들이 거제시와 합세하여 뜬금없이 청마의 출생지가 거제시 둔덕면이라며 통영시장을 상대로 통영의 청마문학관 현판에 기록한 출생지(통영시 태평동 552번지)부분을 삭제해 달라며 소를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1.2 심을 비롯하여 대법원에서 조차 청마의 출생지가 거제라고 볼 근거가 없다며 기각했다. 법조계의 전무후무한 해프닝이었다.
사실이 이럼에도 출생지 문제로 더 이상 논란을 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온 국민이 이런 사실을 알아야겠기에 위와 같이 자료제공: 통영시문화예술관
--옮긴글---
복원된 청마 생가
생가 마당에서 내려다 보이는 통영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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