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우리집에 놀러만 오면 운전 못하는 나를 배려해 가고싶었던 곳에 가자고 합니다. 평소 한 번 가보고싶었던 정도전 사당에 가자고했습니다
삼봉기념관 --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은산리 183 에 위치한 평택시 향토유적 제 2호
삼봉 기념관은 삼봉집 목판과 선생의 시문 문집 등과 같은 유품들이 보관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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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 관리하시는 분께서 우리가 도착하자 나오셔서 친절하게 설명해주십니다 어찌나 설명을 열심히 잘 해주시는지 혹시 정도전선생님 후손 되시냐고 물었더니 아니라고 ~~
삼봉기념관 안에 있는 삼봉집 목판
경상도 관찰사 정대용이 지휘 , 감독해서 제작한 목판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132호로 지정(1988. 5. 7)되었으며, 당시 총 258판을 제작하였다.
각자(刻字) 양식은 양면에 양각이고 반엽 10행으로 1행이 20자로 새겨져 있다. 목질 재료는 배나무이며, 목판의 규격은 길이 56cm, 폭 21cm, 두께 3.6cm이다.
삼봉집 목판은 팔만대장경 목판과 달리 양면이 다 목판이 되어 있다고 설명해주심
설명에 '악장' 이라는 제목으로
본 악장의 작품은 <삼봉집>에 수록된 것을 근거로 작성한 것이라함
樂章의 설명입니다 혹시 읽어보시려면 클릭해 보세요. 글씨를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정도전(1342~1398)은 조선개국의 일등 공신이며 정치가, 대학자이다. 조선 건국 후에 정권과 군권을 장악하고 한양 천도와 설계, 통치규범 정비, 국방강화를 주도하였다. 사당 전면 현판에 '유종공종(儒宗功宗)' 이라는 태조가 내린 글귀로 선생의 높은 학식과 공을 알 수 있다. 삼봉 기념관은 삼봉집 목판과 선생의 시문 문집 등과 같은 유품들이 보관 전시되어 있다.
*정도전님의 영정으로 (1994년 10월 권오창 화백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문화관광부가 지정한 정도전 선생의 표준 영정이다.(제54호). 현재 문헌사 사당 내에 봉안되어 있다.
삼봉 전도전 선생의 生平
*1342(충혜왕 복위 3)년 : 형부상서 정운경, 영의정추증)과 우연(禹淵, 본관: 榮川)의 따님을 부모로 하여 3남 1녀 중 장남으로 출생, 본관은 奉化, 자는 宗之, 호는 三峯, 시호는 文憲이다.
*1360-1361(공민왕 9-10)년: 19-20세 : 19세에 성균시(城均試)에 합격, 경주인 최습의 다님과 혼인하여 이듬해 장자 진(津)을 출산.
*1362-1363(공민왕 11-12)년: 21-22세 : 진사시 문과에 합격한 이듬해 충주목 시록을 제수 받음.
*1364-1365(공민왕 13-14)년 23-24세 : 전교시주부에 임명, 이듬해 비서직인 통례문지후로 승진됨
*1366-1369(공민왕 15-18)년: 25-28세 : 부모상을 연거푸 당하여 고향 영주에 내려가 3년간 여묘살이를 하면서 후학들을 지도하다가 삼각산에 돌아와 학문에 정진
*1371(공민왕 20)년: 30세: 성균관 박사, 테상시 박사 및 예의정량을 제수 받음
*1374(공민왕 23)년: 33세 : 공민왕이 시해되자 명나라에 알릴 것을 주장하다가 친원파와 반목을 빚음
*1375(우왕1)년: 34세 : 성균관 사예, 예문관응교, 지제교 등을 제수받고, 임금의 文翰 작성을 전담함, 이 해 반원 . 친명(反元 . 親明) 정책을 주장하다가 친원파에 의해 전라도 나주 회진현 거평부곡 , 현 나주 다시면 운봉리 백동마을)으로 유배당함, 당시 [삼문천답(心問天答)]을 저술함
*1377(우왕 3)년 : 36세 : 유배지에서 [금남잡영(錦南雜永)] 및 여러 시문을 지음 . 유배생활을 마치고 고향 영주로 돌아가는 길에 전남 장성의 정토사(현 백양사)에 들러 (정토사교루기(淨土寺橋褸記)를 지음
*1380-1382(우왕 6-8)년 39-41세 : 삼각산 아래에 三峯齋를 짓고 후학을 가르치며 학문에 정진하던 중, 권신들이 핍박으로 집이 헐리자 부평, 김포 등지로 이전함, 이 무렵 [ 學者指南圖, 八陣三十六變圖譜, 太乙七十二局圖 등을 저술함
*1383(우왕 9)년 : 42세 : 함경도 함주로 가서 동북면도지휘사 이성계와 만나 정치. 사회 등의 개혁을 결의하고 김포로 돌아옴
*1384(우왕 10)년: 43세 : 전의부령에 임명되어 성절사 정몽주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옴
*1385(우왕 11)년 : 44세 : 성균관 좨주에 임명됨 왕사 태고 보우가 열반하자 (원증국사석종명圓證國師石種銘)을 찬함
*1387(우왕 13)년 : 46세 : 남양부사로 부임하여 혜정을 베풀었음
*1388(우왕 14)년 47세 :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 후 비서직인 밀직부사와 성균관 대사성을 제수받음. 이 해[진맥도결] 과 [상명태일제산법] 을 저술함
*1389(창왕 1)년: 48세 : 예문관 제학에 취임함. 조준, 윤소종 등과 더불어 전제개혁을 추진하고, 이성계 , 정몽주 등과 논의하여 정통성이 문제가 된 昌王을 폐위시키고 恭讓王을 옹립함. 봉화현 충의군에 책봉되고, 수충논도좌명공신의 호를 받았으며, 국가 재정을 관리하는 三司의 左使에 임명됨.
*1390(공양왕 2)년: 49세 : 중서문하성 정당문학에 취임하고,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옴
*1391(공양왕 3)년: 50세 : 삼군도총제부가 설치되자 우군총제사에 임명됨, 과전법을 주도한 이유로 구세력의 저항을 받아 봉화로 유배됨
*1392(공양왕 4, 태조 1)년: 51세 : 유배에서 풀렸다가 이성계의 낙마 사건을 계기로 구세력에 의해 영주에서 체포되어 보주(甫州:예천)의 옥에 투옥되었다가 정국이 안정되자 관직이 회복되어 개경으로 돌아옴, 7월 17일에 남은 , 조준 등53명과 함께 조선 왕조를 개창함. 봉화백(奉化伯)에 피봉되고, 문하시랑찬성사, 동판도평의사사사, 판호조사, 판상서사사, 보문각태학사. 지경연예문관춘추관서운관사, 의흥친군위절제사 , 세자사 등을 겸임함. 17조항의 편민사목을 반포함, 태조가 강비 소생 방석을 세자로 책봉할 때, 연공 서열을 주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함, 순충분의좌명개국원훈에 비봉되고, 계품사 겸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옴
*1393(태조 2)년: 52세 : [오행진출기도] [사시수수도][강무도], [진법] 등의 병서를 저술함, 동북면도안무사로 임명되어 함길도의 여진족을 회유하고 행정구역을 정비함. [문덕곡] [몽금척][수보록] [납씨곡][정동방곡][궁수분] 등 악장을 찬진함. 판삼사사에 임명되어 재정을 주관하고, 요동 정벌을 목표로 [진도]에 의해 군사 훈련을 실시함
*1394(태조 3)년 53세 : 판의흥삼군부사로서 사병을 혁파하는 병제개혁을 단행하고, 경상, 전라, 양광도의 삼도도총제사로 임명되어 행정 구역을 개편함, 왕조의 헌법에 해당하는 [조선경국전]과 철학서인 [심기리] 3편, 그리고 병서인 [역대부병시위지제]를 찬진함. 한양 천도를 위해 음양산정도감에서 지리도참의 서적을 모아 정리하고 한양 천도를 찬양하는 [신도가]를 찬진함
*1395(태조 4)년: 54세 : 정총과 더불어 [고려사] 37권을 편찬하고, 성군의 통치이념인 [경제문감]을 찬진했으며. 지방관의 지침서인 [감사요약]을 저술함, 인왕산, 백악산 등 사산을 실측하여 도성의 범위를 정하고. 궁궐과 종묘 건축을 주도하여 완성하였으며, 경복궁의 이름과 근정전, 사정전, 교태전 등의 궁전 이름을 지음. 태조는 삼봉 선생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여 귀갑구와 어울러 '유학에도 으뜸이요, 공적도 으뜸' 이라는 뜻으로 '유종공종'의 친필을 하사함
*1396(태조 5)년 55세 : 도성의 흥인지문(興仁之門:東大門), 敦義門 (서대문) 崇禮門 (남대문) 肅靖門(북문) 및 四小門의 이름을 짓고, 한성부의 5부와 52방의 이름도 지음,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기 위해 군사 편제를 개편하여 군사 훈련을 독려하고, 일본의 일기도(一岐島)와 대마도를 정벌하기 위한 병선을 출동시킴
*1397(태조 6)년: 56세 : 판의흥삼군부사에 재차 취임하여 [진도] 훈련을 강화하면서 요동 출병을 시도했으나, 온건파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함 . 가례도감의 제조와 유비고의 제조관에 임명됨, 연말에 동북면도선무순찰사로서 함길도의 주군의 정비와 성보를 수리하고, 호구와 군관을 점검함. [경제문감별집]상 . 하권과 [경제의론] [칙위성지발어], [채집정씨역전오위효상], [국초군영진적첩], 등을 저술함
*1398(태조 7)년 57세 : 3월에 동북면 도선무순찰사의 임무를 마치고 귀경하자 윤관의 9성 건설보다 업적이 크다고 태조가 치하함, 성균관 제조에 취임하고, [ 진신도팔경시]를 지어 새 나라 새 도읍의 지리적 환경과 웅비하는 모습을 노래함. [불씨잡변] 19편을 지어 불교를 비판하고 유교 입국의 정당성을 이론화 함. 여름에 요동 정벌을 위해 양주목장, 경상도 , 전라도 등지에서 [진도]에 의한 군사 훈련을 독려하고 , 민본정치를 추진하던 중 8월 26일 새벽에 송현(松峴 :지금 한국일보사)에 있는 남은의 집에서 이방원 일파의 기습을 받아 희생되고 관직을 삭탈당함. 삼봉 선생의 죽음은 재상 중심의 정치 운영을 주장하고 世子師의 위치에 있던 선생과, 세자 책봉 및 사병 혁파에 불만을 품은 이방원 간의 갈등이 빚어낸 역사의 불행이었음. 큰 아들 진(津)은 당시 중추원부사로서 태조를 수행하여 지방(함흥)에 있었으므로 생명이 보존돼서 세종대에 형조판서를 역임하고 뒤에 의정부 우찬성에 추증되었다. 영(泳)과 유(游) 두 아들은 삼봉 선생과 함께 화를 당했음.
*1791(정조 15)년: 삼봉 선생의 학문을 높이 평가한 正祖께서 기존의 [삼봉집]에 빠진 글들을 모아 체계적으로 문집을 다시 발간하도록 규장각에 명하여 경상도 감영에서 판각했다. 당시 제작한 [삼봉집]의 목판이 현재 삼봉기념관 목판고에 보관되어 있음
*1865(고종 2)년 : 경복궁 중건을 계기로 조선 개국 초기에 한양도읍 건설을 주도한 삼봉 선생의 업적을 고종께서 높이 평가, 모든 훈작을 회복시키고 , 문헌 이라는 시호를 내리도록 전교함.
*1870(고종 7)년 : 삼봉 선생의 모든 훈작을 회복시키는 고종의 복훈교지가 하사됨 .
*1872(고종 9)년 : 고종께서 조선 건국 480주년 경축을 계기로 삼봉 선생의 업적을 남기려 문헌이라는 시호를 하사하였다. 죽산부사 이헌경으로 하여금 경기도 양성현 산하리에 문헌사를 세워 제사를 지내도록 하고. 고종이 친히 치제문을 내렸다.
*1912년 : 양성현에 있던 문헌사를 후손들이 지금의 자리로 이전함
- 옮긴글-
휴~
삼봉집
복훈교지(復勳敎旨)
임진왜란 때 소실 된 경복궁을 1865(고종 2)년에 중건함을 계기로, 삼봉 선생이 조선 건국의 창업과 한양 도읍의 건설 및 각 법궁 . 전각의 이름을 짓고 조선 건국을 송축한 가사 등에 감명을 받은 고종 임금께서 1870(고종 7)년에 삼봉 선생의 모든 훈작을 회복 시키는 복훈 교지이다.
사시교지(賜諡敎旨)
1870(고종 7)년 삼봉 선생의 모든 훈작이 복훈(復勳) 됨에 따라 그의 탁월한 학문 및 정치적 업적에 합당한 문헌(文憲)이란 시호를 1872년 삼봉선생에게 하사한 교지이다
삼봉 선생이 설계한 한양도성 설계도
정도전 선생의 저서
사물잠(四勿箴) --- 이글은 정도전 선생의 친필이라고 합니다(복사본도 아니랍니다)
안연(顔淵)이 몸을 다스림에 있어 경계할 덕목을 묻자, 孔子가 말하길 "예가 아니거든 보지 말고, 듣지 말며, 말하지 말고, 행동하지 말지어다" 하니 이를 사물잠이라 한다. 이 어록을 정자가 역주 하였으며 , 후일 시잠과 청잠을 삼봉 선생이 친필로 남겼다 삼봉 선생의 친필 중 원문의 '其視箴日'이 '其心箴日'로, '其中則遷'이 ' 其中遷'으로 기록된 사유는 알 수 없다.
사무실로 쓰이는 곳 -- 현판을 김용옥 선생님이 쓰셨답니다
김용옥 선생님의 글 "민본위'랍니다
"홍상문이 뭔지 아세요?" 질문하시고 설명해주십니다 "홍살문은 정도전 선생님의 혼령 외에 다른 잡신들은 들어오지 말라고 세운 것입니다 "
내 친구는 부지런히 올라갑니다 ㅎㅎ
정도전님의 사당 문헌사
계단을 오르는 왼편에 있는
문헌사 오르는 계단 왼편에 정도전님 장손의 사당
문헌사 ---관리인께서 설명도 해주시고 하시기에 문헌사 내부도 보여주시려나? 기대했건만 아무때나 열수 없다는 대답과 제삿날 열린다고 ........
아주 작은 문틈으로 ---- 에고 답답해~
이리저리 기웃거려 겨우 이만큼 볼 수 있는 곳 발견
오른쪽 검은집에 예전에는 삼봉집 등 목판을 보존하던 건물로 지금은 창고로 쓰인다함
사당에 현판'儒宗功宗'
삼봉 선생은 조선 건국 초기에 한양 도읍의 궁궐과 종묘 건축을 주도해서 완성한 후 경복궁 등 각 전당의 이름을 지었으며 인왕산. 백악산 등 사산(四山)을 실측해서 도성의 범위를 확정하였다. 이와 같은 공적을 높이 평가한 태조께서 귀갑구(龜甲구)와 아울러 '유학(儒學)에 관한 학문적 지식이 으뜸이요, 조선 개국 창업과 수도 한양 건설의 공로 또한 '으뜸' 이라는 의미가 담긴 유종 공종 이라는 어필을 1395(태조4)년에 삼봉 선생에게 하사한 것을 현액으로 제작한 것이다.
사당 전경
사당 왼편에 산이 보이는데 그곳이 정도전선생님의 묘지라고 합니다 하지만 시신을 없답니다 그당시 시신을 찾지 못했답니다
사실 친구가 건강하다면 저 묘지까지 올라가 보자고 하고싶었지만 여기까지 오자고 한것도 역사유적 좋아하는 날 위해 먼저 가고싶은 곳 가자며 친구가 데려 온것이라 ........
산 왼쪽 끝에 아주 작게 비석이 조금 보입니다 ㅎㅎㅎ
마을 아래 종가댁이라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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