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신숙주 영정 및 감실주독을 찾아서 ~

백합사랑 2012. 4. 9. 16:06

조선초기의 대학자이며 한글 창제에 큰 공을 세운  신숙주 영정 및 감실주독이 있는 곳을 찾아서~

사당에는 보한재 신숙주(1417~ 1475)와 그의 아들 및 손자의  위패가 봉안되어있다.  사당 내의 신숙주 영정은  충북 청원군에 소재한 구봉령 당본에  있는 진본(보물 613호)을 1890년에 본떠 그린 것이다.   또한 평택시 향토 유적으로 지정된 감실주독이 보관되고 있다.

 

 

문충공 고령신숙주 선생 한글 창제 사적비 제 오백 이십오 주년 한글날 한글 학회에서 세운 비

 

 

감실주독 아래 설명글   :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음니다! 

保閒齋 申叔舟 影幀 成宗. 中宗大王의  駙馬不遷之位神主 . 龕室主독

이곳은 조선시대 학자이며 문신이였던 신숙주(1417~1475) 선생과 선생의 증손이신 성종대왕의 부마 고원위 시 문효공 항(1477~1507) 및 현손이신  중종대왕의 영천위 의(1530~1583) 세 분의 위패가 봉안된 사당이다.  본 사당은 1874년 본당 9평 삼문 3평 2합이였으나 세월에 노후되어 1989년에 대지 150평 본당 14평 삼문 5평3합으로 중수하였다.   당시 고원위  영천위 양 부마의 당우였으나  1927년에 의정부 고산동 묘하당우가 노후붕괴되어 장자 후손 집거지인 청북면 고잔리 905번지로 신주와 영정을 종가 자손들이 고잔묘 현 사당에서 봉향하고 있음. 선생의 본관은 고령이다.  호는 보한재 희현당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고령부원군 문충공 신숙주선생이시다.

선생은 집현전에 수찬을 지내면서 세종대왕을 도와 훈민정음 창제에 크게 공헌하였으며 세종부터 성종까지 여섯 왕조를 섬기면서 대제학,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지냈고 정난공신, 좌익공신, 익대공신, 좌리공신에 책록 되었다.  뛰어난 학식과 문재로 해동제국기, 보한재집  등의 저서와 국조오례의  동국정음, 국조보감, 세조실록, 영모록 등의 편찬에 참여하셨다.   이곳 고잔묘당에 모셔진 선생의 영정은 충북 청원의 구봉영당에 소장된 1455년 중국 화공에 의해 그려진  진본 국보613호를 옮겨 그린 것으로 녹색 관복에 오사모를 쓴 모습으로 섬세하게 표현한 얼굴 묘사와  안정감 있는 구도를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감실주독은 선생의 신주를 모신 나무 궤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흑칠과 주칠로 채색하여 단아하며 아름답다.  선생의 증손인 고원위 시 문효공은 성종21년(1490) 14세에  성종대왕 제1녀 혜숙옹주와 국혼 부마 7, 8세 황산곡시집암송 성종대왕 총애 귀후서 제조 연산8년 임술(1501) 풍원위 임승재의 모함으로 위계박탈 중종 2년 정묘(1507)  중종반정에 원종 일등 공신으로 책록되고 봉헌에 오르다.   중종 2년 2월 29일 정침에서 영면하니 향년 32세였다. 墓. 의정부시 장곡동 둔야 조모 한씨 묘하 쌍영 문경공 이요정이 신도비 명찬하다.(유석물)선생의 현손(5대손)인 의공은 중종 25년 생하시여 생이후매하고 재조과인하여  능서사하니 시년 12세 즉 중종대왕 제4녀 경현공주와  국혼부마로 상선숭덕 대부 영천위시다.   공은 조극귀부하고 성품호방불검하여 다여보온배 윤원형과 뜻이 맞지 않아 문정황후께서 영호남에 본의아닌  유거생활을 하게 하고 선조 17년 8월 13일 경저정침에 고종하니 향년 55세 이시다.   묘는 광주시 광주읍 목현리 연장산서록 고 묘 후에 합영

- 위의 계시글을 보기 좋게 하기 위헤 옮겨썼음-

 

 

 

감실주독 : 평택시 향토유적 제 8호

이곳 역시 내부와 영정을 보려면 제사 때나 와야 할것 같았습니다 

 

 

조금 늦은 시간에 도착해서인지 관리인도 없고  주변에 이웃은 있었지만 물어볼만한 집을 찾지 못하고 사진만 몇 장 찍는데 담장이 높아 보이지 않았는데 주변에 약간의 턱을 밟고 '고잔묘' 라는 현액은 보았지만

영정은 보지도 못했습니다 

 

 

 

 

 

 

 

 

 

 

2000년대에 만들어진 건물로 아직 정리가 덜되고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는 듯 했습니다.

 

 

 

 

 

평택시 청북면 고잔리 905

난 어릴때 숙주 나물을 먹지 않았는데 이유인즉 숙주나물이 잘 쉬는것이 신숙주님을 닮은것 같아서  싫었기때문이였는데  하지만 세월이 많이 흐른후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숙주님은 그당시 9개국어를 할만큼 천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천재는 겁이 많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겁 많은 사람으로서 보이는 앞날이 얼마나 무서웠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후부터 신숙주님을 이해하게 되었고 이젠 숙주나물도 맛있게 먹습니다. 그래서 신숙주 감실주독까지 찾았습니다  아직 그곳이 정리가 덜되서인지 조금 늦은 시각에 도착해서인지 안내서도 설명해줄 관리인도 만나지 못해서 아쉬움을 남긴채 돌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