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남해 보리암과 남해 충렬사

백합사랑 2014. 2. 4. 08:40

조촐하게  아침부터 먹고

 

 남해 보리암을 향합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마을버스를 타고 10여분 오르고 다시 10여분 걸으면 보리암이 나옵니다

 

마을버스를 내려서 보리암을 향해 가는길 ~  안타깝게도 안개가 자욱합니다

 

 

 푯말에  상주해수욕장과 아름다운 바닷길들이 보인다는데  앞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이렇습니다  에고~

 

보리암 입구

 

 

 

 

 

보리암 보광전 벽화

 

 

 

 

 

 보리암 산신각

 

보리암 3층석탑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74호

이 탑은 금산 정상의 절벽에 위치하고 있으며 비보(裨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보리암과 인접해 있기 때문에 보리암 전 삼층석탑으로 불리고 있다.  절설에 따르면 ,  683년(신문왕3)에 원효대사가 금산에 처음으로 절을 세운 것을 기념하기 위해 가락국의 수로왕비인 허태후(許太后)가 인도에서 가져온 파사석(婆娑石)으로 탑을 만들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에 의하면 허태후가 가져온 부처의 사리를 이곳에 안치하기 위해 탑을 세웠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 탑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졌고,  양식 또한 고려 초기의 것이기  때문에 전하는 이야기와는 사실상 거리가 멀다.   이 탑의 형식은 커다란 돌 하나로 된 단층 받침을  세우고 면석에는 모서리 기둥 새겼으며, 그 위에 3층의 탑신(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각 층 몸체의 사면에는 모서리기둥을 새겼다.   지붕돌의 처마에는 4단의 받침이 있으며,  약간의 경사를 두면서 자연스럽게  처리되었다. 꼭대기 부분(上輪部)에는 구슬 모양의  보주(寶珠)가 남아 있다.

*  비보(裨補) :  풍수지리상 나쁜 기운의 지역의 탑,  장승 등을 세워 나쁜 기운을 억누르고, 약한 기운을  보충하는 일

 

보리암 해수관음성지

한국의 해수관음성지는 예로부터 남해보리암, 양양낙산사,  강화보문사, 여수향일암을 꼽아왔습니다

관음성지는 '관세음보살이 상주하는 성스러운 곳' 이란 뜻

 

 

 

 

 

푯말 뒤 바위 아래 음성굴이 보입니다

 

이곳은 쌍홍문 윗쪽

 

 

쌍홍문 안에  바위 구멍에 돌이 들어가면 소원 성취한다니까 사람들은 열심히 돌을 넣습니다  우리 친구도 소원성취!

 

쌍홍문 : 높은 바위 아래 마치 문처럼 생긴 굴이 두 개 있음  왼쪽엔 장군암

 

 

보리암에서 약 차로 10여분 가면  상주해수욕장의  해송

 

 

승차가격 일인당 5천원 주인이 운전해줌 여름엔 바다에서 타는 것이라함

난 탈생각 전혀 못했는데 친구가 타보고싶다고해서 탔는데 약간 겁났지만 재미도 있었음

 

 남해 충렬사 사적 제 233호

정유재란(1597년) 마지막 전투였던 노량해전에서 왜적과 싸우던 중 장렬하게 순국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설천면 노량리에 세워진 사당

 

 남해충렬사  사적 제 233호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1545~ 1598)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충무공이 순국한지 34년 되는 1632년에 지역의 선비들이 노량해전과  충무공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던 조그만 사당에서 시작되었다.   1659년에 통제사 정익(鄭益)이 다시 지었고 1662년에는  나라에서 충열사란 이름을 내렸다.  충열사 옆에 있는 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지었는데, 충렬사의 상세한 유래가 적혀있다.

옛날에는 충열사 옆의 호충암(護忠庵)에서 승장 1명과 승려 10명이 교대로 지켰으며,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냈다.  충렬사는 남해 바다를 지키는 수호신의 사당으로 받들어져왔다.

현재의 사당에는 비각 (碑閣), 내삼문(內三門), 외삼문(外三門), 재실(齋室) , 강당(講堂), 일각문(一脚門), 가묘(假墓) 등이 있다.

 

 

 

 앞에 비각과 뒤의 충무공비,   비석 뒤엔 충무공 가묘

 

충열사 사당 왼쪽엔 충민공비가 있고 오른쪽으로는 충무공비가 있는데 모두 충무공을 위한 비인데

충민공비(忠愍公碑)는 1598년 11월 19일에 이순신삼도수군 통제사가 노량해전에서 순국하자 1633년에 향인 김여빈과 또 한 명이 이를 슬피여겨 초옥 사당을 건립하고 위패를 봉안하고 충민공이라는 비를 세웠는데 그 후 나라에서 다시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다시 충렬사라는 이름을 내렸다합니다

이곳의 비문이 많이 회손되어 읽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성웅 충무공 이순신장군 가묘

성웅 충무공 이순신장군 가묘께서 삼도수군 통제사로 임진왜란중 노량해 전에 참전 1598년 11월 19일 관음포 앞바다에서 순국하였으며 공의 유구는 최초로 관음포에 올려졌고 이곳 남해 충렬사에 안치되었다가 고금도(古今島)를 거쳐 충청남도 아산 현충사로 운구 되기 전의 가묘입니다

 

 

자암김구선생님의 비

충열사 입구에는 자암김구선생님 비석과 삼도통제사 이태상의 비가 있습니다. 이곳의 김구선생님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근대의 김구선생님이 아니고 성종 19년에 서울 연희방에서 출생하신 분입니다

약관 16세에 한성시에서 장원하고 20세에 중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중종 때 조광조에 발탁되어 32세의 나이로 홍문관 부제학에 올랐으나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남해에서 13년간 유배되었다. 조선 전기 4대 서예가중 1인인 그가 남해에서 유배 중에 저술한 [화전별곡]은 일점선도 一點仙島 남해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경기체가이다 이 비는 그의 6대손인 김만화가 남해 현령으로 재직하던 숙종 32년(1706)에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삼도통제사이태상비

이태상의 본관은 덕수 자는 래숙으로 숙종 27년(1701년)에 출생하였으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5대손이다

이태상이 진주 병마사로 재직중인 영조36년(1760)에 남해충렬사를  참배하고 청해루를 세웠다.

이 비는 1882년 전 판관 문경일의 감독 하에 건립된 것으로 이순신장군의 전공을 기리고,  백성의 세금을 탕감해 준 선정을 칭송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충열사 언덕에서 내려다 보이는 남해대교

 

 

 

  점심은 생선회덮밥으로

 

 

 식사를 마친후 자유시간에 거북선 내부 구경을 하기로  입장료 1천원

 

 노량해전 (충무공의 최후)

1598년 8월 17일 풍신수길이 사망하자,  그의 유언에 따라 철수하기 위하여 왜적들은 대부분 울산, 부산, 사천, 순천 등지로 집결하였다.

그러나 조 . 명 연합군의  해상봉쇄로 바닷길이 막히자 명나라 장수들에게 뇌물을 써서 뱃길을 열것을 종용하였으나 공은 단호히 이를 거절하고 해상경비를 강화하였다.  그러자 왜군은 그들의 전선을 총동원하여 공의 연합함대를 격파하면서 탈출할  마지막 기회를 노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11월 18일 저녁 무수한 왜선들이  노량에 집결하여 그 수는 무려 500여척에 달했다.  이에 공은 왜교의 해상봉쇄를 해제하고 노량근해에 집결한 왜 함대를 섬멸하기 위하여 공격을 개시하였다.  밤새 치열한 격전 끝에 많은 적을 무찔렀으나  공은 11월 19일 아침 전투중에 적탄에 맞아 쓰러지고 말았다.   공은 유언대로 공의 아들 회와 조카 완이  독전기를 흔들며 전투를 계속하여 낮 12시경에 200여척의 왜선을 격파하였다.   왜장 소서행장은 간신히 달아나고  50여척의 왜선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가고 7여년간의 임진왜란은  공의 전사와 함께 막을 내리게 되었다

 

 

 거북선 1층

 

 1층에 뒷간

 

 거북선 지하? 부엌과 침실

 

바다도 한 바퀴 돌아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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