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미륵사지.왕궁리 5층석탑.부안개암사
참 단촐하니 좋았다
4방 측면 모습이 다르다
미륵사지 석탑은 7세기에 미륵사가 처음 지어질 당시 세워진 세 기의 탑 중 서쪽에 위치한 탑으로 우리나라 석탑 중 가장 크고 오래된 탑이다. 많은 석재들이 없어져 원래의 모습은 알수 없으만 남아있던 석재를 참고해 9층으로 복원된 동쪽 석탑과 같은 규모로 추정된다.
미륵사지 석탑은 목탑이 석탑으로 변화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학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탑이다. 층마다 모서리의 기둥이 다른 기둥보다 살짝 높게 된 형태 . 지붕이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며 끝부분이 솟아 오르는 모양 등 목조건축의 수법을 따르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구성된 1층에는 사방에서 계단을 통해 출입이 가능한 십+장형의 공간이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여러개의 석재를 쌓아 올린 중심 기둥(심주心柱)이 세워져 있다. 2009년 1월,가장 아래의 심주석에서 사리장엄구 발견되었는데 백제왕후가 639년에 탑을 세우면서 사리를 모셨다는 기록이 확인되었다. 6층 일부까지만 남아 콘크리트 구조물에 의지하고 있었던 미륵사지 석탑은 1998년 구조적으로 불안정하다는 안전진단 결과에 따라 2001년부터 2017년까지 해체와 조립이 진행되었다. 수리가 완료된 탑의 높이는 약 14.5m .폭은 12.5m. 무게는 약 1830톤에 이른다.
관세음 응험기
백제 무광왕武廣王이 지모밀지枳募密地에 천도하여 정사를 새로 지었다.정관貞觀13년 (무왕40년,639 ) 기해년 겨울 11월, 하늘에서 크게 천둥이 치고 비가 오더니 마침내 제석정사帝釋精舍가 화재를 입었다. 불당과 칠층탑 七級浮圖 그리고 회랑과 승방이 모두 불타버렸다. 탑 아래의 초석 안에는 갖가지 칠보가 있었고, 역시 불사리가 채색 수정병에 담겨 있었다. 또한 동에 금강반야경을 새긴 사경과 이를 담은 목칠함이 있었다. 초석을 열어 보니 모두 불타 없어지고 ,오직 불사리병과 반야경을 넣었던 칠함만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수정병은 안과 밖이 환히 보이지만 뚜껑이 열리지 않았고 ,사리는 모두 없어졌는데 어디로 빠져나갔는지 알 수 없었다.
병을 가지고 대왕에게 가니 대왕은 법사를 청하여 곧바로 참회하였다. 그런 다음 병을 열어보니 6개의 사리가 모두 보였다. 이에 대왕과 모든 궁인들의 공경과 믿음이 배로 늘어 공양을 올리고 다시 절을 지어 사리를 봉안 하였다. 이 내용은 <법화경> 보문품의 '불도 능히 태우지 못한다 '는 응험에 해당한다 . 무릇 성인의 신기한 기적은 온세상을 인도하고 교화하니 어찌 마음으로부터 믿지 않겠는가 .
다시 이런일이 일어나지 않을리가 없고, 이와 같은 일은 계속해서 일어날 것이다.
일본 쇼렌인 靑蓮院 소장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 > [백제 무광왕조]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