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

법문사, 중국 법문사 박물관 (법문사 지하궁에서 나온 세계 문화 유산들 ) 1

백합사랑 2006. 7. 2. 19:09

 

 

 

 법문사는 당나라때 부터 왕궁사원이다 --이곳엔 석가모니 진신 사리를 모신곳으로써 그 사리를 보전하기 위하여 있었던 희비의 쌍곡선이 천년이상을 되풀이 하며 간직 된 유물이 보존된 절이다.

 

작년에(2005년) 우리나라에도 모셔왔던 부처님의 손가락 사리이다.

그 사리가  이 세상에, 지금의  나까지 친견할수 있도록 ---보존하기 위하여 있었던 천년이 넘는 세월은 성자이신 부처님이시기에 지금껏 존재할수 있었으리라 믿는다.--이 사리의 진위를 놓고

UN에서는 1000도가 넘는 불에 7일간을 달구었다한다

틀림 없는 사리임이 확인된후 법문사 지하궁전에서 나온 모든 유물 --총 3,000점 이상이 모두 세계유산이 되었다 --중국에선 발굴당시 너무 엄청나서 --진시황능 이후 가장 찬란한 문화 유산 발굴로--도난이나 도굴의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하여 군인 50명이 밤낮으로 경비를 섰다한다. 

 

 

 

 

 순금으로 된 탑으로 부처님의 손가락 사리를 모셔 놓았던 사리탑으로 탑의 크기는 1m가 넘어 보이는데   이탑과 부처님의  사리 그리고 20여종의 佛器 등이 우리나라에 순행 왔을때 소림사 무술승이

4명씩  교대로 경비를 서--고 있었다.

태국이나  홍콩이나 싱가폴등에 순회때는  참배객이 3-400만명씩 됬다는데  우리나라엔 ,,,,?

그래도 난 부처님을 직접 대하는듯 하여 같이 간 언니들과 함께 감동의 눈물이 ..... 

 

 이탑은 복원된 법문사 탑 .--지금은 이곳이 거기서 나온 유물을 보관하는 박물관이 됨.

 

 

 

 법문사와 법문사 박물관

명나라 시기 벽돌탑 --이탑을  어느날 번개가  반으로   갈라놓는 바람에 나까지  사리를 친견 하게 된것이다.

 

 

지하궁전에 사리와 함께 모셔졌던 불상들이다 .

 

 

부처 명나라,  연화공양인

 

부처 뒷면 국부 

 

 

 

 

이곳은 지하궁전의모형도이다.  

 

 지하궁전으로 들어가는 당시의 조사관들의 사진이다.--지하 궁전 바닥에는 당나라때 부터 청나라때 까지  부처님께 보시한 금은화인데  발견당시 돈이 어마어마하게 만았다고 한다 --아마 현재 남아있었던 당나라 화폐를 전세계것 다 합해도 그보다 작을것이라했다.

 

 발굴하기 전의 지하궁전 첫번째 석문

 

지하궁전의 답보 만도와 첫번째  석문

 

 

이곳은 지하궁전 내려가는 곳과 지하에 사리가 모셔진곳을 돌문으로 보호한곳

.

 

 

 

 漢白玉靈帳

이것 역시 사리를 모시기위한 것으로 영장이라한다.

 

 네 번째 불지사리 영골(影骨)

위의  뼈는 부처님 진신사리가 아니고 부처님 사리를 지키기 위해서 그동안 부처님 사리를 대신했던

 影사리라 함.

 

 금박을 한 가릉빈가 조문 은관

위의 영골(影骨)을 넣어 두었던 은관

 

 


 

 

 

 

백옥관 (白玉棺)

 

第七重 鎏金四天王盝頂銀寶函 四天王曼羅 (제칠중 류금사천왕록정은보함에  사천왕만다라가 새겨진 불함)

불함 앞면과 아래 사진은 불함 뒷면

 

위의 사진은 불함 오른쪽면 / 서방비루륵차천왕

아래사진은 불함 왼쪽축면/ 동방제두뢰타천왕

 

 

정면은 동방아촉여래와 그의 4친근 보살의 만다라 

 

(황제의 명을 받고 석가모니의 진신보함을 삼가 만들었음) 이라고 새겨진 네모 단은 서방무량수여래와 그의 4친근보살의 만다라

 

 

 

 

 

이곳에 담겨진 사리가 부처님의 진신사리-靈사리로 --아까 맨위의 두번째에 있었던 진신사리--

 

사리를 모셔 두었던 사리함.

 

 

 

 

부처님 사리를 왕들이 30년에 한번씩 친견할때 이 보살상 위에 받치고 친견 한것으로 추정함 --30년에 한번씩 왕들이 친견 할수 있도록 법으로 정했는데 --부처님 사리를 친견하는 때가 되면 그때는 그나라가 풍요로와 졌다함

 

 

 

 俸眞身菩薩正面봉진신보살상)이며

부처님 사리를 왕들이 30년에 한번씩 친견할때 이 보살상 위에 받치고 친견 한것으로 추정함 --30년에 한번씩 왕들이 친견 할수 있도록 법으로 정했는데 --부처님 사리를 친견하는 때가 되면 그때는 그나라가 풍요로와 졌다함

 

 

 


 

이역시 부처님 사리탑

 

.

 

 

 

 

 銅浮(동부도) Copper stupa

 

사리를 9겹으로 함에 담고  탑에 모시고 또 또 탑  탑 ....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9대 기적이자 중국의 국보 중 최고의 성보로 봉안되어온 법문사" 佛指舍利 !"

 

 

*** 부처님 진신지골사리( 眞身指骨舍利)

 

1981년 8월 24일, 중국 시안(西安)의 법문사 주변에는 열흘 이상 폭우가 내리고 있었다. 오전 10시쯤 사찰위로 천둥번개가 치더니 13층의 팔각 진신보탑이 두동강 났다. 400여년간 서있던 탑의 서쪽면이 마치 예리한 칼에 베인 듯 꼭대기부터 반쪽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그로부터 5년 뒤인 86년 나머지 절반도 완전히 무너져 버려 그해 가을 중국 당국은 탑을 철거했고, 이듬해 봄 유물 발굴작업을 시작했다 .

어느 날 발굴팀은 바닥에서 조그만 굴을 발견했다. 그걸 파고 내려가다 돌문을 발견하게 된다.

지하궁의 입구였다.

    그속에선 전설의 불지(佛指) 사리가 보물 3000여 점과 함께 나왔다.

 

  불지사리란 석가모니다비(기원전 485년) 에서 나온 손가락뼈다.

7일동안 화장(火葬)을 했는데도 재가 되지 않은 길이 3.7cm의 진신(眞身: 부처의 몸) 사리다.

  지하궁에서 나온 진신지문비(眞身志文碑)는 세계에서 단 하나밖에 없다.

 

석가세존이 남긴 사리는 8만 4000여개다. 

그것들은 기원전 240년 인도 아소카 왕에 의해 나라 안팎으로 흩어진다. 포교를 위해 쓰인 것이다. 그때 중국으로 보내진 19과의 진신사리 중에 하나가 불지사리다.

   고대 중국의 황제들은 이를 궁전에 모셔 놓고 친견했지만  후한(後漢) 때 법문사로  옮겨졌다.

부처의 영골(靈骨)을 황제 손에 맡기는 건 위험하다고 본 고승 안세고가 그렇게  한 것이다.

당나라 의종은 아예 지하궁을 밀봉, 접근을 막았다. 이후 불지사리는 점차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졌다.

 

불지사리가 다시 발견된 날은 음력으로 석가탄신일이다.  그래서 발굴 당시 " 부처가 현신(現身) 한것" 이라는 얘기도 나왔다.  이것을 한 때 물개의 뼈라고 깎아내리는 이들이 있었다, 그 바람에 시뻘겋게 달궈진 쇠그릇 속에서 테스트를 받기도 했지만 영물은 색깔조차 변하지 않았다.

   이것을 유네스코는 세계 9대 기적중 4번째 기적으로 지정했다

불지사리를 보면 한 가지 소원이 성취된다는 전설이 있다. 진신사리의 영험함에 관한 기록은 많은 문헌에서 쉽게 찾을 수 있지만, 장쩌민 (江澤民) 주석이 불지사리 친견 이후 주석직에 올랐다는 소문도 있어 불지사리는 가는 곳마다 구름떼 같은 인파를 불러 모으고 있다.

불지사리 전시회가 열렸던 태국 (1994년 )에서 200만명, 대만 (2003년) 에서 400만 명. 홍콩(2004년)에서 150만 명이 몰린 것도 이때문이다.   또한 1987년 발굴 당시 진신사리의 보호를 위해, 모양과 색깔이 똑같은 3개의 모조품(영골사리)이 함께 나왔으며, 그 영험한 힘은 진신사리와 같다하여 1994년 태국에서는 이 영골사리를 200만 명이 친견하기도 했다.

 

우리는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가 이땅에 더 충만해 지기를 바라옵니다.   남무석가모니불 __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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