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안(1993년 경주와 자매결연 맺음) 은 산시성(23개)안에 서안시로 5개의 자치구를 가지고 있으며 신강 위그르가 포함 되어 있습니다. 인구는 700만명이며 서북에서 제일 크고 중국에선 8번째로 대학이 43개며 제일 유명한 대학은 교통대학.
5000년 역사를 가진 역사 도시 6대 고도 중 1개입니다.(서안 낙양, 대동 , 남경, 북경 ,?) 또한 아테네, 로마, 카이로와 함께 세계 4대 고도로 통하는 서안입니다
서안은 산시성 성도로 진대부터 수, 당,등등 한나라까지 13개 왕조가 이곳에 도읍을 정했던 중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도시 중의 하나로 13대 왕조가 서안을 장안이라 부름 . (진나라~ 한나라까지) 이후 명나라 때 서안으로 바꿈
*중국의 최초 황제 진시황의 도읍지. 2200전 한나라 수나라 4면이 다 山---> 진경산맥 위수(위하 강태공 낙시하던 곳 ) 가로 세로 800리 평야가 뻗어있는 곳
이곳을 도읍지로 한 이유는 손으로 땅을 파면 파질 정도로 기후 좋다. 동쪽은 겨울엔 땅 언다. 농사는 2모작을 하고 주식은 면이며, 밥은 밥알이 날른다.(년 520m 강우량)
서안을 시발점으로 실크로드가 시작됩니다.
제 뒤에 있는 건물이 천수에 있는 종각 (종루)예요. --서안의 중심거리랍니다.
가장 보전이 완벽한 명대의 건축, 鐘樓
종루는 서안중심에 위치한 동서남북 4방이 연결되어 있는 교통중심지역이다. 우리나라의 동대문이나 남대문과 비슷한 위치로 총 높이가 36m, 총 면적이 1377.4 평방미터다. 서안의 종루는 중국에 남아 있는 수많은 종루중에서 제일 크고 보존이 완벽하여 서안의 상징적인 건축물일뿐 아니라, 예술적으로나 역사적으로 그 종류의 건축물 중에서 가장 으뜸이라고 할 수 있다.
종루는 명태조 주원장 홍무제 17년인 1384년에 시간을 알리기 위해 건설된 것으로, 외관 3층, 내부 2층 정방형의 누각형태다. 이 건물의 특징은 못을 사용하지 않고 건물을 올렸다는 것인데 , 4면에 회랑이 둘러져 있고 내부에 계단이 있어서 올라가 서안시내를 둘러볼 수 있게 해 놓았다. 또한 누각 안에 보전되어 있는 종은 고대에 침을 깨우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서, 새벽에 종이 울리면 종루의 문을 열고 저녁에 종이 울리면 종루의 문을 닫았다고 한다.
종루 주변에 유명한 만두집이 있는데 서태후가 겨울이면 추운 북경을 피해 와 있으면서 먹었다는 교자연 만두집에 왔는데 동행자 한사람은 들어오자 마자 지갑 잃어버려서 고생 많이 했습니다.
장안성( 서안성은 주변이 다 성)이며 북문으로 우리 들어감 황성(황제국경) 땅만 파면 보물 나온다함
이 만두집 서태후가 즐겨먹던
교자연 만두집이라고하여 우리도 먹으러 왔는데 108가지가 넘는 만두를 눈앞에 놓고도 같이간 동행인이 ---돈과 여권이 들은 지갑 잃은 사람이 있어 우리 모두는 너무 놀라 먹지도 못하고 보기만하고 나온 곳입니다.
그 만두를 먹으려고 별러서 간 곳인데 먹지 못하고 나와야 하는 안타까움에 우리는 봉지에 싸달라하여 가져다 냉장 시키긴 했지만 다음날 또 다른 곳에 먹을 것이 많아서 결국 그 만두 제대로 먹지 못하고 ~~~
이곳에 우뚝 솟은 산이 여산(이태백 시중) 온천 43도 있다.
만두집에서 나오니 벌써 야경으로 변한 천수 에 종루-
둘째날
서안 진시황릉과 병마용
진시황제 능 입구 여산 북쪽 기슭에 있는 높이76m 동서 340m 남북 350m 되는 작은 야산으로 정상까지 계단이 나있다
세계 8대 불가사의라는 중국 진시황 병마용
1974년 진시황제릉에서 동쪽으로 1.5km쯤 떨어진 곳에서 가뭄으로 고생하던 농민 6명이 우물을 파려다가, 우연히 지하 4m 되는 곳에서 무사의 모습을 한 흙 인형을 파냈는데 이것이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진시황제 병마용을 발견한 순간이었습니다. 옮긴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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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 병마용 인간문화재님 ! 그리고 오른쪽 이쁜 여인은 룸메트였던 미스코리아였던 S씨 병마용 앞에서 진시황 병마용 박물관은 진시황 무덤을 지키기 위해 흙으로 빚은 병사와 말을 묻은 3개의 갱이 발굴 됐는데 그 중 1호 갱에서만 6천여 병마가 실물크기로 정연하게 늘어서 있다.
1호갱
량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대단한 병마용....... |
한 사람 한사람의 모습이 다 다르고 문관이나 무관 또는 군인의상 백성들 ....그시대의 의복이나 예술 등 여러가지 좋은 자료인듯싶네요
이 수레는 진시황이 살았을때 타고 다니던 것이라함 --거의 완벽하게 고쳐서 박물관에 전시중임 -- 그시대에 그것을 탔던 시황은 정말 .....
우리는 예술인들의 고단함은 제쳐두고 아름답고 정성스러웠던 그들만 보면서 ......
진시황의 흔적, 阿房宮
중국역사를 통틀어 빼놓은 수 없는 인물인 秦始皇의 황궁이다. 지금은 그 모습이 남아있지 않고 흔적만이 있지만, 그 흔적만으로도 규모를 알 수 있을 만큼 거대하다. 서안시 서쪽 교외에 있는 이 유적지는 동서 2,500m와 남북 1,000m의 크기로 앞의 殿과 뒤의 宮,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전의 유적지는 동서 1,300m와 남북 500m의 60만 평방미터의 면적으로 1만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방궁의 건설은 한편으로는 '황제의 위엄을 보이기 위함이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황제에게 알현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고 하나의 국가로서 정복하는 과정에서 京城-북경- , 咸陽-서안-의 궁궐들을 다시 짓게 샜는데 이것을 '六國宮殿'이라 불렀다. 한번은 진시황이 각지의 12만 영주와 富商들을 함양으로 모았는데, 함양궁에 숲처럼 뺵빽히 들어서서 입구까지 꽉 찼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은 남쪽으로는 위강渭江, 북으로는 고원을 접하고 있어서 앞으로 넓힐 수가 없었다. 이에 진시황은 위강을 메워 남쪽의 평원까지 확장시켰고,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 9년(서기 212년)에는 西周의 풍고근처에 아방궁의 前殿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 '阿房'이라는 것은 '近旁', 즉 함양의 근처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미처 공사가 다 끝나기 전에 진시황이 죽고, 그 2세가 이어 공사를 계속하게 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아방궁의 크고 작은 殿宇만 700여 곳에 이르고, 같은 하늘 아래에 있다고 해도 각각의 방이 모두 기후가 틀렸다고 한다. 진시황 생전에는 주변의 六國에서 가져 온 보석과 미녀들을 궁내에 보관해 두었고 매일 돌아가며 하루씩 각각의 방에 머물렀는데, 죽을때까지도 다 마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진왕조의 정치체제와 경제가 서서히 붕괴되고 농민봉기가 일어나 항우(項羽)가 병을 이끌고 함양을 함락시키면서 아방궁도 폐허로 남게 되었다.
1961년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중의 하나로 지정
진시황 병마용 박물관 입구의 진시황 상 앞에서
측천무후부부의묘---측천무후 아시지요? 당나라 30년간 여황노릇을 한 분----이묘의 넓이가 30리라는군요
이곳은 화청지라고 ---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가 쉬던곳
주변엔 우뚝 솟은 여산(이태백 시중)이 있고 온천 43도 있다. 주변엔 玉 (당 비취) 많이 난다. 황제 무덤이 73구 있고 왕가족 3000이상 . 명나라때 만든 600년 된 길 바둑판 같다.
중국에서 현존하는 최대의 당대 왕실 원림이다. 고대부터 수려한 풍경과 질 좋은 지하 온천수 때문에 역대 제왕들의 관심을 받아왔던 장소이다. 특히 당나라의 현종과 양귀비가 함께 겨울을 지내던 곳으로, 온천이 유명해지자 현종이 양귀비를 위해 화려한 누각들을 지었다고 한다. 唐詩 중에는 화청지에 대한 묘사가 포함되어 있는 시가 비일비재할 정도로 중요한 소재가 되기도 했다. 호수를 중심으로 양귀비가 실제로 목욕을 했다는 목욕탕과 양귀비의 석상이 세워져 있다.
1931년 당시 섬서정부가 정식으로 '화청지'라는 공식적인 이름을 붙였다 . 또한 1936년 12월 12일에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열렸던 '西安事變'도 이 곳에서 발생했으며, 현재에도 여산 정상에는 '착장정捉蔣亭'이라는 정자가 남아 있다.
화청지 온천의 수질은 매우 깨끗하며, 수온은 항상 43도c를 유지한다. 다량의 화학물질을 포함하고 있어서 관절염, 신경통 등에 효과가 있다. 또한 매일 육각정 무대 앞에서는 당나라 시기를 재현한 공연이 열린다.
1949년 중화인민 공화국(모택동 -- 간체로 2번 바꿨다.)
서안 남쪽에 위치한 대자은사(大慈恩寺) 내에 있는 중국에서 유명한 불탑 중 하나로, 652년에 당(唐)나라 현장(玄奬)법사가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과 불상을 보존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함
西安의 大慈恩寺 내에 있는 大雁塔
경전을 보존하기 위해 축조된 대안탑(大雁塔)
현장의 꺽이지 않은 구도심과 마하살타보살의 자비심이 깃들어 있는 대안탑에는 현장이 스물두마리의 말에 가져온 불경이 안장되어있고, 63세 입적할 때까지 74부 1335권이라는 엄청난 량의 불경을 번역하였다.
7층의 누각식으로 지어졌으며, 총 높이가 64m이다. 외부는 벽돌로 지어졌지만, 탑 내에는 나선형의 계단이 있어서 걸어 올라갈 수가 있다. 매 층의 사방에는 각기 하나의 아치형 문이 있어서 먼 곳까지 내려다볼 수도 있다. 그리고 당대의 두보 등 많은 저명한 시인들이 대안탑에 올라와 본 후 많은 문구들을 남겼다.
또한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당대 중엽에는 진사에 급제하면 먼저 곡장(曲江), 행원(杏圓)에서 잔치를 한 후에 대안탑에 올라와서 탑 벽에 기념 친필을 남기는 것을 대단한 영예를 여겼다. 유명한 당대시인인 백거이(白居易) 역시 진사에 합격하고 난 후, '자은탑에 친필을 새긴 17명 중 가장 어린 사람이다.(慈恩塔下題名處, 十七人中最少年)'라는 유명한 귀절을 남겼다.
서유기의 주인공 玄奬法師가 인도에서 가져온 經書 보관을 위해 652년즘에 세운 대안탑 앞에서
비를 맞으며 기념 사진을 남기는 ㅎㅎㅎ
大慈恩寺는 삼장법사를 위한 절이라서 법당안에다가 이렇게 삼장법사의 모습을 탱화처럼 모셔
놓았음
가운데에서 밑에서 두번째 층에 계신분이 三藏法師
新羅 圓測法師의 사리탑
서안의 동남쪽 약 20km지점 소릉원에는 홍교사가 있다. 이 절에는 인도 구법여행을 하고 숱한 불경을 번역했던 현장 법사의 사리탑이 있다. 특히 주목을 요하는 것은 현장탑의 좌우에 수제자인 신라의 고승 원측과 그리고 규기의 탑이 있다는 점이다. 신라 유학생 원측법사의 묘탑은 당나라 때 건립된 3층 전탑이다.
흥교사興敎寺
실크로드의 願佛이 된 현장(602~664)이 인도유학을 하고 돌아온 후 대안탑이 있는 자은사에서 신라승 원측과 중국승 규기 등 제자들과 함께 역경사업에 전력하다가 664년 唐 "나는 반드시 미륵불 옆에 환생할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입적한 후 5년 만에 나라에서는 흥교사를 창건하고 절안에 거대한 현장탑을 세워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는데 이 탑은 중국에서도 가장 오래된 5층 전탑이다
그러나 이 탑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현장스님 탑 바로 옆에 있는 신라 승려 원측법사의 3층 사리탑이다. 현장스님의 5층탑을 가운데 두고 그의 두 제자인 圓測(613~682)과 窺基(632~682)의 3층탑을 좌우에 배치했는데 삼장법사의 탑에 비하면 한결 작고 간결하지만 신라 스님이 이처럼 중국 최고의 고승과 나란히 중국인들의 존승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이채롭다. 규기대사는 현장의 법상종을 널리 전파하여 중국 최대의 종단으로 발전시킨 현장의 수제자이다.
원측은 신라 진평왕35년(613년) 경주 모량에서 신라 왕실의 자손으로 태어났다 이름은 문아로 3세 때 동진출가해 15세 때 당나라 유학길에 오를 정도로 어려서부터 명민하기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는 역경과 학문이 중국의 어느 고승보다도 뛰어나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이곳에 전해오는 원측스님의 얘기는 그가 얼마나 고생하며 공부했으며 고난 끝에 그가 어떤 경지에 이르렀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현장스님이 자은사에서 제자들에게 불경을 가르치며 그가 천축에서 가져온 불경을 번역할 때 마침 그곳에 유학가 있던 원측은 처음엔 외국인이라 하여 규기를 비롯한 현장스님의 중국인 제자들이 그를 냉대해 공부방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현장스님의 가르침을 문밖에서 동냥하듯 들으며 공부했는데 그의 재주를 알아본 현장스님이 제자들을 꾸짖고 원측을 큰 학생으로 세워 방에 들어와 공부하게 하고 또 그와 함께 역경작업을 했다고 전한다.
이 때 스님은 유식학을 알기 쉽게 해석해 놓은 <유식론소> 10권, <해심밀경소> 10권, <인왕경소> 3권 등을 저술하면서 중국불교계에 더욱 이름을 널리 떨치기도 했다.
676년에는 인도의 고승 지바하라가 인도의 여러 불경을 가지고 와서 중국어로 번역해 달라고 당나라 고종에게 부탁하자, 이 때 원측스님이 번역의 책임자가 되어 여러 스님들과 함께 <대승밀엄경> 등 34권을 번역하였다고 한다.
원측스님은 한때 신라정부가 귀국을 요청하자 당나라 측천무후가 이를 완강히 거절했을 정도고 중국에서 저명한 고승으로 대접받았으며 측천무후로 부터 생불과 같은 예우를 받은 것으로도 전해지고 있다.
특히 2년 전 중국 하남대학 도서관에서 진본이 발견돼 관심을 모았던 원측스님의 <해심밀경소>는 혜초의<왕오천축국전>과 원효의 <대승기신론소> 등과 함께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는 신라 고승의 3대 저작물로 우리 학계는 물론 세계 불교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 후 스님은 <화엄경>의 번역을 마치지 못하고 신라 효소왕 5년(696), 84세의 나이로 조국 신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중국땅 낙양 불수기사에서 열반에 들었는데 그의 몸에서 나온 사리가 스승인 현장법사의 몸에서 나온 7개의 사리보다 훨씬 더 많은 49개였다고 전한다.
아래 부터는 비림 박물관
서안
섬서성 박물관 안에 있지만, 박물관보다 더 널리 알려져 있다. 비림은 1087년 북송 철종 2년에 세워졌다.
현재 한(漢)대부터 청(淸)대에 이르기까지 각 조대의 비석과 1천 여개의 묘비가 전시되어 있는데, 명필들의 비석들이 모여 마치 숲을 이룬 것 같다 하여 '비림(碑林)'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총 3000여 개의 비석이 있으며, 그 중 개성 석경은 114개의 석판에 유교경전 13경(655,025자)을 조각한 것으로, 명사들의 진적비 등이 집중되어 있다.
비림은 중국 고대 서예 예술의 보고이자 고대 문헌서적과 비석의 조각 도안 등이 집대성되어 있는 곳으로, 대외 문화 교류의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유적지이다. 서예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꼭 가볼만한 곳이다
1실에는 <주역> <시경> <논어> <효경> <상서> <주례> <의례> <예기> <춘추좌씨전> <춘추공양정> <彌雅 > 등이 石經으로 새겨져 보관되어 있고
2실에는 왕희지 구양숭, 안진경, 구양통, 저수량, 유공전 등 당(唐) 대가들의 작품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았다.
3실에는 예서체로 한(漢)의 曹全碑, 초서체로 당(唐) 회소의 千字文, 전서체로 된 송(宋)의 전서목록편방자원, 관우의 대나무 그림 등이 있다.
비림안에 있는 유명하신 분의 글입니다
저 너무 힘들어 지쳤어요.
박물관안에 있는 전시품들
이것은 요즘 만들은 것 같았습니다.--정교한 가위질로 ......
한국전통예술학회 실크로드답사 10일(금강여행사)
순례지역 : 서안, 천수, 난주, 가욕관, 돈황, 투루판, 우루무치, 상해
출국일
때 : 2005년 7월 1일(금요일) 오전 7시 집결
곳 : 인천국제공항 3층
비행기 : 중국동방항공 MU5042 항공편으로 출국
귀국일
때 : 2005년 7월 10일 (일요일) 오후 9시 5분 도착
곳 인천국제공항 1층
중국동방항공 MU5041 항공편으로 도착
답사비 169만원
첫째날 (7/1)8시 55분 인천출발 09시 30분 상해도착, 옥불사 참배
중식후 공항으로 이동, 국내선편으로 상해출발 장안으로 불리던 실크로드의 기점 서안공항 도착
저녁을 먹으려고 서안에 서태후가 갔었다는 덕발장 교자연 집에 갔는데 도착즉시 동행인 여권과 지갑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일행들 모두 맞난 만두 잘 먹지 못하고 아쉬운 남는 날로 기억된다.
황성로얄호텔에서 숙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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