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여행

중국 - 돈황 막고굴 1

백합사랑 2006. 8. 11. 09:03

 여행 6일째날에 돈황 막고굴을 보기 위해~

돈(크다)황(성하다)은 고비 사막의 오아시스 도시로 중국 서쪽의 관문이다.   비단을 가득 실은 낙타들을  몰고 가는 대상들과 불경을 구하러 인도로 향하던 승려가 죽음의 사막 타클라마칸을 건너기 전, 바로 이곳에서 여행의 안전을 기원하는 불공을 드렸다고 한다. 장도를 떠나는 사람들에게는 무사 안녕을 비는 기도처였고 서역에서 돌아온 사람들에게는  감사를 드리는 곳이었다. 

그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 바로 돈황시에서 남쪽으로 25km  떨어진 막고굴이다.

막고굴은 겉으로 봤을때는 일반적인 중국  건축물이지만 내부는 동굴로 이어져 신비롭다.  남북으로 1,618m, 1천년동안 수도승들이 모여들어 735개의 굴이 생겨났는데 지금은 492개만 남아있다.  굴에서 발견된 벽화를 합하면  4만 5천m^2, 불상만 1천 4백여 점이다.  

돈황 석굴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석굴 ---

 

돈황의 석굴들

돈황막고굴(敦煌石窟)

감숙성 돈황에서 동남으로 약 20km떨어진 명사산과 삼위산 사이에 있는 돈황막고굴은 세계최대의 예술화랑으로 불리운다.  기원 366년에 건설을 시작해서 북위시대와 수나라, 당나라, 오대, 송나라, 서하, 원나라를 거쳐 기나긴 세월의 흐름속에 건설된 돈황막고굴은 아주 큰 규모를 형성하고 있다.  소조불상과 벽화 등의 불교미술품 외에 많은 고문서류가 발견되어 동서문화교류사 또는 중국불교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1907년 영국의 A.스타인과 그 다음해 프랑스의 P.펠리오에 의해 알려졌다. 명사산(鳴沙山) 기슭에 길이 1.6km에 달하는 크고 작은 600여 개의 불교석굴이 있는데, 둔황문물연구소[敦煌文物硏究所]의 조사에 의하면 불상조각이나 벽화가 있는 동굴은 469개소에 달한다.
빙하기의 충적층(沖積層)에 속하는 수성암(水成岩)으로 된 석굴이어서 불상은 모두 소조상(塑造像)이며 4세기 중반 북위시대부터 13세기에 이르는 1,000년 간 석굴조영자(石窟造營者)들은 벽화의 제작에 힘썼다. 이들 벽화는 표면에 석회를 칠한 벽면 위에 짙은 채색의 불교회화를 치밀하게 묘사했는데, 제작 연대별로는 위대(魏代)가 22굴, 수대(隋代)가 90굴, 송대(宋代)가 103굴이 있다. 그 중에는 청대(淸代)에 들어와서 그린 것들도 있다.
둔황석굴의 조사보존사업은 1960∼1970년대에 걸쳐 행해졌는데 1972년의 보고서에 의하면 최고(最古)의 것인 366년(前秦의 建元 2)의 것으로부터 492개의 동굴이 조사되어 2,000여 채의 채색소조상(彩色塑造像)과 4만 ㎡의 벽화를 조사 연구하고 500여 ㎡의 벽화와 30여 채의 소조상이 복구되었다고 한다.
그 밖에도 북위(北魏)와 당대(唐代)의 견직물 60여 점, 748년의 문서, 인쇄된 불상 등을 발견 조사하고 계속 연구하고 있다. 또한 둔황문서 중의 불교관계서적을 통해 중국의 불교 수용과정을 엿볼 수 있다. 막고굴은 1987년에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 유산의 하나로 지정되었다.

중국불교는 한나라 때 처음 들어옴 이때 도교 등 많은 종교가 있었다.  오??국 시대에 중흥위해 불교를 받아들였는데  너무 불교가 성하니까 스님들의 위신력이 무서워 폐불시작

 

막고굴은 돈황에 있는 석굴들 중에도 가장 아름 다운 곳이며 이 문도  몇대를 거쳐서 근세 까지 만들어진 것이다.

돈황 막고굴


왕도사 부도

막고굴입구에 왕원록도사의 부도가 있다

 

돈황 막고굴

- 막고굴의 기원과 형성
莫高窟은 돈황시내에서 동남쪽으로 2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각 동굴들은 鳴沙山 동쪽 절벽에 생긴 바위 틈 사이에 만들어져 있으며, 동쪽으로는 三危山과 마주하고 있다.
막고굴이 최초로 조성된 것은 4세기 동진(東晋)시대이다. 366년 승려 낙준(樂 )이 석양에 비치어 금빛으로 빛나는 삼위산(三危山)에서 천불(千佛)의 위엄을 느끼고 맞은편 명사산 벽에 석굴을 조성하여 수도의 장소를 삼은 것이 시초이다. 그는 이 성스러운 장소 첫번째 동굴을 만들었으며, 그 후 북위, 서위, 북주, 수, 당, 오대, 송, 원 등 열한 나라, 1000 여년을 거치는 동안 수백개의 동굴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 중서문화교류의 결정체
막고굴은 천불동(千佛洞) 이라고도 불린다. 기록에 의하면 당나라 시대 때에 막고굴은 천여개의 동굴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세월을 거치는 동안 자연적인 소멸과 인위적인 파괴에 의해 현재 남아 있는 동굴은 불과 492개, 벽화는 4만 5천여 평방미터, 조각상이 2천여 점, 당송시대의 목조건축이 5개 그리고 장경동(藏經洞)에서 출토된 수 만점의 문헌과 예술품이 있다. 492굴을 시대별로 나누면 수(隋) 이전 120, 수(隋)대 140, 당(唐)대 111, 오대(五代) 7, 송(宋)?원(元)대가 35굴이다.
유물들은 중국에서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최대 규모에 내용이 가장 풍부한 예술박물관이며, 전인류의 문화유산이다. 예술작품은 중국 각 민족의 화공, 조각공의 피와 땀이 어려있는 결정체이다.
돈황예술은 불교예술이기 때문에 내용면으로는 종교적인 색채가 짙지만 눈부신 예술의 성과는 민족예술역사의 기록일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강한 예술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현대인들은 종교적인 표현형식을 통해 고대인들의 생산활동과 정서, 풍속습관 등을 알 수 있으며, 고대의 사회, 정치, 경제, 군사, 종교, 문화 및 민족간의 관계 등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막고굴을 살펴본다

제45굴의 칠존상(七尊像)은 唐 전성기 소상의 걸작이며 둔황 소상 예술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어느 미술서에나 등장한다.
제158굴의 16m 열반상은 唐 중기의 작품이고 벽화도 훌륭하다.
제156굴의 장의조출행도(張議潮出行圖: 만당),제172굴의 관경변상도(觀經變相圖: 성당), 제249굴 수렵도(狩獵圖: 서위).제257굴의 녹왕본생(鹿王本生:북위) ,제428굴 살타태자사신사호(薩 太子捨身飼虎: 북주)의 벽화는 전문가들이 살펴 볼 만한 작품이다.
제285굴에 그려진 비천(飛天)은 서위(西魏)의 걸작이며, 제427굴의 소상과 천불은 수대 작품이다.
제17굴은 장경동(藏經洞) (唐 851-862)이라 불리며 송대까지의 경전이나 문서를 간직하고 있었는데 서하가 지배했을 무렵에 봉쇄되었다가 1900년에 도사원록(道士圓錄)이 발견되어 전세계의 화제가 되었다.

 

 

 

 

막고굴의 벽화
벽화의 내용은 시대에 따라 바뀌고 있다.
초기에는 민간 신화가 많은데, 이는 후한(後漢)시대에 전해진 불교가 중국 고래의 신불사상과 결합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초기굴의 벽화에서 석가의 선행을 주제로 한 이른바 본생담(本生譚)은 인도의 쿠샨, 카니슈카 왕조 시대에 서역으로 전해진 불교 예술의 영향이 강하다.
6세기 중엽의 북주(北周)시대는 불상의 귀가 초기석굴의 그것보다 커지고 수인이 다양화됨으로 불보살이 신비화되고 있는 모습을 알 수 있다.
수(隋)대는 서역의 동점(東漸)불교가 중구에 뿌리내리고 꽃피우기 시작하는 시기라 할 수 있다. 구마라십(鳩摩羅什)이 산 스크리트 어 불전을 다수 한역(漢譯)한 다음의 벽화에는 유마독경변(維摩讀經變)이나 법화경변(法華經變)등 불교 고사가 등장한다.
당(唐)대는 중국의 불교문화가 개화기에 접어드는 벽화의 황금시대로 ,그 내용도 서방정토의 극락세계를 구하는 다채로운 것으로 바뀐다. 사학자들은 당(唐)의 작품을 초당(初唐), 중.성당(盛唐), 만당(晩唐) 등 4기로 그 구분을 세분화하여 비교 설명하곤 한다.
송(宋), 원(元), 청(靑) 등의 작품은 당(唐)보다 특별한 것은 보이지 않는데, 불교문화의 화려함과 극치는 중.성당에서 찾을 수 있다고 관계학자들은 말하곤 한다.

 

 

 

여기부터  北凉篇 (421--439AD)

 

제 328굴 서벽 남측 반가보살상

 

제 272굴 서벽 남측 공양보살

 

제 272굴 서벽 북측 협시보살

 

제 275굴 서벽 교각 미륵보살

 

제 272굴 굴 천장에 벽화

 

 

제 272굴 벽화

 

제 275굴  남벽 비천과 공양보살

 

제 275굴 북벽 중층 비능제리왕 본생

 

제 268굴 서벽 교각 불상

 

제 275 북벽중층 월광왕 본생

 

 

여기부터 北魏篇 439--535 AD

 

제254굴 남벽 동끝 살타라태자 본생

 

제259굴 북벽내 선정불상

 

제 254굴 북벽앞부분의 중층 란타 출가

 

제 257굴 굴 천정

 

 

 제 257굴  중심주 상층남향  사유보살상

 


 

돈황막고굴(장경동)

 

 

제 249굴 고구려벽화 비슷하다는 그림입니다

 


 

1900년(淸 光緖26년)에 왕원록이라는 도사가 藏經洞(현재 17굴)을 발견하였다. 특히 장경동은 가장 중요시되는 석굴의 하나로 신라의 혜초스님의 "왕오천축국전"이 보관되어 있었다. 17굴 안에서 서기 3세기 진대(晉代)부터 에서 11세기 송대(宋代)까지의 종교문헌, 사회문서, 자수 등 진귀한 유물 수 만여점이 발견되었다.
이 발견은 전세계의 학자들을 놀라게 하였고, 이들 문서를 현재 학계에서는 돈황유서(敦惶遺書)라고 부르고 있다. 돈황유서의 내용은 兩晉으로부터 北宋까지의 약 천년간의 정치, 경제, 군사, 종교, 문학, 예술, 천문지리, 의학, 인쇄 등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을 총망라하고 있어, 돈황학이라는 신흥학문을 형성하게 되었다.
왕도사는 장경동을 발견한후 동굴내의 일부 문화재들을 가져다 돈으로 교환하였다. 이런 보귀한 문화재들이 민간에 흘러듬에 따라 막고굴에 고대 수고가 소장되여있다는 소식도 널리 전해지게 되자 세계 각국의 탐험가들은 막고굴로 몰려들었다. 그 당시 청나라정부의 무능으로 하여 20년도 안되는 사이에 러시아와 영국, 프랑스, 일본 미국을 비롯한 나라의 이른바 탐험가들이 선후하여 돈황에서 거의 4만권의 경서와 많은 진귀한 벽화, 조각을 훔쳐감으로써 막고굴에 커다란 재난을 안겼다. 지금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 인디아,도이취란드, 덴마르크,스웨리예, 한국, 핀란드, 미국 등 나라들에서 모두 돈황문화재들을 소장하고 있는데 그 수는 장경동문화재의 3분의 2를 차지하게 된다.
장경동이 발견됨에 따라 일부 중국학자들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돈황문서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1910년 중국의 제일진 돈황문서연구에 관한 서적들이 출판되었고, 이로부터 <세계현학>이란 돈황학이 창립되었다.
지난 수십년동안 세계 각국의 학자들은 돈황예술에 커다란 흥미를 갖고 부단히 연구를 진행하였고 중국학자들은 돈황연구에서 이미 중대한 영향을 가진 연구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우리가 돈황엘 가도 이곳 석굴을 다 보려면 1개월은 족히 걸리고 남을 만큼의 예술품 들 !
시간과 여유가 모자라   가서도 하루 온종일 본다해도 7-8개의 굴 밖에는 볼수 없다
그것도 건성 건성 가이드 가는대로 따라 가야만한다.
돈황의 400여개가 넘는 석굴을 다 보기란 여간한 정성으로 않될것 같다 .
거리상으로도 4KM가 된다고 한다.
굴 한개 보는데 치루어야하는   금액도 상당하다.
어떤 굴은 한개 보는데 900원(한화로 약 십2,3만원 된다 )이상 되는 곳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일인당 요금이다.
하기야 귀한 자료이고   보면 치루긴 치루어야 겠지만
나 같은 사람은 여러모로 능력 않되어서 아쉬웠다
그러나 다행히     사진 책자가 자세하게 나와 있어서 감사한다 .
그곳은 일체의 사진 촬영을 허용하지 않는다.
난 몇십년을 별러서 간곳이라 좋은 작품을 사진에 많이 담아오려고
카메라 3개나 가지고 갔었지만 모두 허사였다.


 어르신들 모두 피곤하시다고 여행비에 포함된 맛사지 받으러가신 사이

우린 골목 돌아보기 하다가 맛있는 호떡을 사먹고 있습니

 

돈황 석굴에  있는 여러 불상이나 벽화 등을 더 많이 보시려면 카테고리 부처님에

돈황 2~ 12까지 있습니다

 

막고굴 2의 주소줄 입니다--->. http://blog.daum.net/hyeanj/6108037


 

http://blog.daum.net/hyeanj/5516447====<여행  ,8 9일투루판 우루무치 천산과 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