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와 작품

고구려의 고분 벽화

백합사랑 2006. 11. 12. 09:27
위대한 고구려의 고분벽화
고구려 장군총의 전경.
고구려 옛 수도 집안에 있는 장군총은 초기 피라미드형과 아주 유사하다
장천 1호분 전실 서쪽벽을 가득 채웠던 생활풍속도 부분.

중국 지안시 장천1호분 벽화 중 전실의 귀부인 나들이 모습.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장천1고분 삼삭형 천장 받침돌의 모습.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장천 1호분 전실 왼쪽 벽의 생활 풍속도.

[고구려 고분벽화] 무용총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무용총 묘실 정면의 천장으로 올라가는 부분.
탑 모양으로 차츰 좁혀 올라가는 다섯개의 계단에 온 세상을 담은 듯,
각종 동식물과 인물 형상이 가득 그려져있다.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무용총 벽화에 등장하는 수렵도.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4호묘.
천장 밑 층급받침돌 벽화의 용을 탄 신선도와 태양의 상징인 세발 까마귀,
소머리 형상을 한 농사의 신 등이 그려져 있다.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무용총의 벽화 그림.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무용총 천장 벽화중에 말 그림.
오른쪽에 세계의 선으로 연결된 것은 별이다.
고구려 무용총의 수렵도.
고구려인들의 습속을 그린 그림의 한장면인데 화살촉이 석류처럼 생겼다.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4호묘 ①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4호묘.
천장 밑 층급받침돌 벽화의 용을 탄 신선도와
태양의 상징인 세발 까마귀,
소머리 형상을 한 농사의 신 등이 그려져 있다.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4호묘의 천장 받침돌 그림.
학과 용을 타고 승천하는 신선과 달을 상징하는 두꺼비가 그려져 있다.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4호묘 묘실 벽면의 부채를 든
귀부인의 인물도.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4호묘 천장 받침돌의 용그림.
용의 몸뚱아리가 적-황-청의 보색대비로 그려져있으며 비늘은
지금도 선명하다.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4호묘 ②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4호묘의 묘실 천장 받침돌에
그려져있는 달의 신.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4호묘의 수레바퀴 만드는 신의 모습.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4호묘의 하늘을 나는 신선의 모습.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4호묘의 고구려 벽화 중 `해의 신.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5호묘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5호묘
천장 밭침돌 벽화에 등장하는 농사의 신.
소머리에 벼이삭을 들고 질주하고 있다.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5호묘의 묘실 천장과
계단식 천장받침돌 벽화.
오회분 4-5호묘는 사신총과 함께 7세기 고분에 속한다.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5호묘의 묘실 입구로부터
묘실 전체를 담은 사진.
무덤의 구조와 벽화의 배치상태 등이 잘 나타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 삼실총 ①

삼실총 제1실 남쪽벽의 행렬도.
삼실총 제1실 천장 고임면에 있는 주작(남쪽을 지키는 신) 그림.
도굴당한 뒤 고분 입구에 두껍게 시멘트를 바른
중국 지린성 지안시의 삼실총의 최근 모습.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삼실총 벽화의
신수 백호의 머리부분과 용의 몸통부분이 결합된 형상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에 삼실총에 나오는 새 그림.

[고구려 고분벽화] 삼실총 ②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삼실총의 고구려 여인의 모습.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삼실총의 인물상.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삼실총 제3실 서쪽 입구 벽의 역사(力士)상.
갑옷과 투구를 착용하고 긴 칼을 찬 무장이
묘실의 무덤 주인을 보호하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삼실총 행렬도의 남자 인물상.
11명으로 구성된 행렬도의 10번째 위치하는 것으로 봐서
평민으로 보인다
.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삼실총 행렬도의 평민 복장 여인.
오늘날의 애교머리를 닮은 특이한 헤어스타일이 재미있다.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저고리와 통이 넓은 바지는
고구려 평민들의 전형적인 복식이었다.

[고구려 고분벽화] 사신총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사신총의 묘실에서 연도 쪽을 바라다 본
면의 그림. 삼각형 천장 받침대가 만나는 부분을 귀면 판석으로
처리한 것이 특징이다.

[고구려 고분벽화] 각저총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각저총 벽화 모습.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각저총 벽화.
저고리와 바지를 입은 전형적 옷차림의 고구려여인 모습.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각저총의 벽화.
쪽구들에 앉은 부인들과 맨바닥에 의자를 놓고
걸터앉은 남편이 상위에 차린 음식을 즐기며 담소하고 있다.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각저총 묘실 왼족 벽면의 말과 마부.
말의 등에는 안장이 놓여있고 마부의 손엔 채찍이 들려있다.
서역인과 고구려인이 씨름하는 모습을 그린 각저총 벽화.


[고구려 고분벽화] 북한 송죽리 고분

북한 황해도 연탄군 송죽리 고구려 벽화 고분에서
1600여년만에 모습을 드러낸 고구려인의 모습
.
북한 황해도 연탄군 송죽리에서 발굴된 고구려 벽화.
북한 황해도 연탄군 송죽리에서 발굴된 고구려 벽화.
부리부리한 눈의 고구려 호랑이.
훼손으로 인해 주위는 떨어져나갔다.

[고구려 고분벽화] 쌍영총

평남 남포시 쌍영총의 8각기둥과 주두

[고구려 고분벽화] 안악 제1호분

황해도 안악 제1호분 벽화의 주두.

[고구려 고분벽화] 덕흥리 고분

평남 대동군 덕흥리 고분의 주두.
현재 북한에 있는 덕흥리 고분 전실 벽화.
왼쪽에 묘지 주인공이 꽃무늬로
장식된 화려한 방에 앉아 있는 보습을 그렸다.
위에는 주인공의 신상을 기록해 놓았는데,
이에 따르면 그는 이름이 진이고,
요동태수와 유주 자사 등을 지냈으며 77세에 죽었다.

[고구려 고분벽화] 안악 제3호분

현재 북한에 있는 안악 3호분의 마구간 그림.
주인공의 생활 면모를 그린 동쪽 측실 벽화 가운데 하나다
마구간 구유에서 여물을 먹고 있는 말의 모습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대륙을 달리던 고구려인들의 분위기가 물씬 난다.
수산리고분 현실 북쪽 벽에 그려진 귀신 얼굴모양 부채.
묘지 주인공 부부의 시종들이 들고 있던 것으로,
부채 혹은 햇빛가리개의 용도로 쓰였을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
귀신밑으로 S자 비슷한 손잡이까지 달려있는 것이 특 징
고구려 벽화에서 보는 유일한 형태이다
안악 3호분 전실 동쪽 벽면에 있는 수박놀이하는 역사(力士) 그림.
투를 머리 뒤로 묶고 아랫도리 일부만을 가린채
금방이라도 한번 맞붙을 기세다
. 역사들의 체구와 몸짓을 다소 희화적으로 과장되게 그렸다.
고구려 안악 3호묘 왕비복식

고구려 유물들 ①

금동여래입상
평양 동암리 고구려 고분벽화에 의복그림일부로 보이는 파편조각
.
고구려 유물.
일본 나라 박물관 특별전에 전시된 고구려 승려화가 담징이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법륭사 금당벽화 비천도 진본.
서기 756년 일왕 성무(聖武) 사후 작성된 법륭사 헌물장의 일부.
왼쪽에서 네번째 줄 아랫부분에 "고구려 비단(高麗錦)"이란
구절이 보인다.

고구려 유물들 (2)

1940년 평양에서 병기창공사를 하던 중 발견한
고구려 "금동미륵반가상"(왼쪽)과 6세기쯤 신라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우리나라 최초의 "반가사유상"

1998년 7월의 호국인물로 선정된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의 흉상.
.
고구려와 발해의 피지배층이었던 말갈족 주거지로
추정되는 마리아노브카 토성에서 나온 삽 등 철제 유물들

옛 고구려 영토였던 중국 동북평원의
왼쪽에 위치한 대싱안링의 고구려시대 흔적인 돌절구.

일제 어용학자들이 식민사관에 근거로 이용한 광개토대왕비,
일본인들이 비문을 조작해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했다.

복제품 진품운 평양박물관

경복궁내 신축한 국립중앙박물관이
1996년 12월 13일 개관을 앞두고 6일 미리 공개됐다
. 사진은 고구려실에 전시한 금동투조장식 복제품.
진품은 평양 진파리 1호분에서 발굴돼
현재 평양역사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높이 14cm, 너비 23cm. 고구려하면 대륙적이고
강인한 것만을 연상하지만,
이 유물은 고구려가 얼마나 정교하고
섬세한 기술을 지닌 국가였는가를
보여주는 명품이다.

보장왕21년(서기662년) 고구려의 실권자 연개소문은
평양 부근 사수에서 방효태가 이끄는 당군을 격파했다.

고구려 소수림왕의 삽화.
갑주를 입은 고구려 보병의 복장을 고증을 거쳐 재현한 모습.



엘리자베스 키스의 그림들.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 1887-1956). 스코틀랜드 출신의 여류화가.

여러 차례 동양을 방문하여 정감어린 시선으로 이땅의 풍물들을 그렸다.

그녀는 한국을 무척 사랑했다고 전해진다.

화풍은 섬세하고 잔잔하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냄.

그녀의 화집 [Old korea](1919)에 실려 있는 그림들을 소개한다.





"Portrait of Miss Elizabeth Keith" by Ito Shinsui, 1922

방석이 한국을 느끼게 한다


가난한 모녀



김윤식 대감 (고종 때 외무대신 했었죠...)



두 명의 학자



모자가게



미망인



바느질하는 여인



부유한 한 가정



붉은 조복을 입은 청년



사당에서



새 신부



서당 풍경



수원성

보충 설명을 하자면 수원성 보다는 (화홍문(華虹門) 이라고 했지요

지금은 연무동인가....? 옛날엔 참 맑은 물이 흘렀는데......



시골의 학자



식당 풍경 (이건 주막이 아닐까 생각되네요)



연날리기



함흥의 아낙네



대동강변




장기를 두는 사람들

스코틀랜드의 자그마한 도시 Aberdeenshire 에서 태어난 엘리자베쓰 키이쓰(Elizabeth Keith, 1887-1956)는 다른 여류 화가들. 예를 들자면 불란서의 Mary Cassatt이나 Berthe Morisot처럼 부유하고 사회적으로 영향력있는 집안에서 태어나 집안의 후원으로 여유있는 미술인생을 연 화가가 아닙니다. 그리고 Frida Kahlo, Lee Krasner, Helen Frankenthaler처럼 국제적으로 명성을 떨치는 남자 화가와의 긴밀한 관계에 편승하여 미술사에 족적을 남긴 화가도 아닙니다.

키이쓰의 가정은 그리 넉넉하지 못했습니다. 어렸을 때는 런던으로 이사를 해야 했었습니다. 성장기에는 평범하게 가사를 도우는 소녀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28세가 되던 1925년 그녀는 남편을 따라 동경에 와 있는 Jessie라는 여성을 만나러 일본을 방문합니다

당시 일본의 적십자사는 결핵환자들을 도울 기금을 마련하느라고 고심하던 중 사회 유명인사들의 모습을 풍자적인 삽화로 구성하여 책자로 만들어 판매수입을 얻고자 했습니다. 이에 그녀가 발탁되어 그림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책은 즉시 다 팔려 장안의 화제가 되었고 이때부터 화가로 변신하게 됩니다.(Grin and Bear It: Caricatures by Elizabeth Keith, 1917)

그리고 삼일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에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의 풍습과 인물 등 많은 그림을 그려 도쿄에서 전시하였습니다. 이를 본 일본 목판화의 대부인 와다나베가 목판화로 출판할 것을 권유했습니다. 출판된 작품은 대성공을 거두어 그때부터 자타가 공인하는 화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합니다.

그녀의 미술인생은 한국을 서양인들에게 그림으로 소개한 미국여류 화가 Lilian M. Miller나 프랑스인 Paul Jacoulet처럼 정식 미술교육을 받지 못한 순전한 독학이었습니다. 1933년에는 드디어 영국의 한 미술잡지의 호평을 받아 당시 일본 목판화의 대가인 호쿠사이나 히로시게와 동렬에 이를 정도의 명성을 얻게 됩니다.

영국의 여왕도 그녀의 전시회에 참관하였고 전례 없이 일왕의 동생도 전시회를 다녀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후 일본 한국은 물론이고 미국 프랑스 영국 등 여러 곳에서 전시회를 가??었습니다. 사망 이후 45 년이 된 지난 2002년 2월에는 파사데나에 있는 Pacific Asia Museum 에서 단독 전시회가 있었으며 책도 출판되었습니다.(Elizabeth Keith: The Printed Works by Richard Miles).

옮겨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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