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봄에 가장 아름다운 사찰 화엄사

백합사랑 2007. 4. 21. 09:31

 

구례구역이 있는 장소가 구례군이 아니라서 구례구역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고함

 

역에 내리니 저 넓은 강? 시원하여서 .....

 

 

 화엄사를 올라가는 계곡에 이렇게 이쁜 자운영이라는 꽃이 어찌나 많은지 ?

 

 

 

화엄사를 오르는 계곡에 부도들이 ....

 

 

 

 

 

 

화엄사

백두대간의 정혈에 자리잡은 지리산 대화엄사는 백제 성황22년(544년)에 인도스님인 연기존자께서 최초로 창건하셨다.   그 후 신라 선덕여왕(645년)때 자장율사께서 부처님 진신사리 73과를 4사자 3층탑에 봉안하여 적멸보궁으로 중창하였고  670년 의상조사께서 2층 4면 7칸의 황금장육불상을 모신 장육전을 건립하여 벽면에 화엄경을 돌에 새겨 화엄법계의  연화장 세계를 설함으로써 화엄종 종찰의 도량이 되었다.

통일신라 경덕왕(742~ 746년)때  다시 중창하였으며 도선국사께서 헌강왕 원년(875년) 비보사상에 의하여 대가람으로  중창하여 당우가 1,300여동으로 총림대도량으로 면모를 갖추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으며 그 후 조선인조(1630~ 1636년) 백암선사께 대둥전과 여러전각을 중건하시고 숙종(1703년)때 계화선사의 각황전 중창과 더불어 현재 선교양종 대가람으로써 스님들의 수행 중심 도량으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국보 및 보물

각황전(국보 67호) , 석등 (국보 12호 ), 4사자 3층석탑(국보35호),   영산회괘불탱화 (국보301호),  동오층석탑(보물 132호),   서오층석탑(보물 133호),  대웅전(보물 299호),  원통전앞 사자탑(보물300호),   화엄석경(보물1040호), 서오층석탑 사리장엄구 일괄 14종 22점(보물1348호),   대웅전삼신불탱화(보물 136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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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보물 제 299호

 

 

저녁예불 하러 가는 스님들의 모습

 

대웅전 앞 각황전 쪽에 서오층석탑 - 보물 133호

 

 

각황전은 국보 제 67호 ---화엄사 하면 각황전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곳

 

각황전 앞의  아름다운 석등 국보 제 12호

 

 

각황전 뒷쪽으로 올라가면 적멸보궁이 있음

 

이곳이 적멸보궁

화엄사 4사자 삼층석탑과 연기 존자 공양탑  국보 제 35호

 

  연기존자 공양탑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

국보 제 35호

소재지 전라남도 구례군마산면 황전리

탑이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것으로 불교의 상징적인 신앙대상이다.

이 석탑은 탑아래인 기단이 이중으로 된 3층 석탑의 기본형이나 윗기단은 특이한 장식이다.   아랫기단 각 면의 돌은 고대양식인 3구식의 눈(眼象) 모양을 조각해 그 안에 악기를 연주하는 자세,춤을 추고 꽃을 바쳐 공양하며 부처를 찬미하고 있는 자세의 천인상은 다양하다. 윗기단은 기둥 대신 연꽃무늬 받침대 위에 꿇어 앉은 암수의 사자 2마리씩을 배치하고 머리 위는 연화대를 얹어 갑석(돌위에 포개어 얹는 돌)을 받쳤다.    중앙은 연꽃 조각을 하여 뚜껑으로 삼았다.

 

이 탑은 현재 국내에 남은 사자탑 가운데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불국사의 다보탑과 함께 한국 석탑의 쌍벽을 이룬다. 연기조사와 그의 어머니와 관련된 전설이 있으며 만들어진 연대도 8세기 중엽 통일신라시대로 짐작된다.

 

 

저녁예불 직전  북을 치는 장면의 동영상 

 

 

 

 대화엄사 창간사

대화엄사는 고조선이 망하고 열국을 거쳐 다시 삼국으로 정비되었던 백제 성왕22년 (544년)에 인도에서 온 연기존자 (성인)에 의해 최초로 창건되었다.

연기존자는 연(연 :모통은 거북이 같고 얼굴은 용과 같이 생긴 상서로운 동물로 바다에 살고 날아다닌다.)이라는 동물을 타고 화엄경과 모친인 비구니스님을 모시고 이곳 황둔골 (지금 화엄사 산중)에 와서 기거하고 있었다.    황둔골 아래 마을 사람들은 이를 알고 찾아와 이국에서 온 낯선 스님을 보고 예를 다해 모셨고 스님의 가르침을 받고 차츰 신도가 되었다 .   스님은 연을 타고 다니며 마을 사람들의 질병을 고쳐주었고 효심이 깊어 노모를 극진히 모셨다. 이렇게 수행하는 연기존자를 본 마을 신도들은 감동되었고 , 신도들은 서로 합심하여 두 스님의 기거할 집과 의궤를 행할 전당을 지어 모시기로 하였다.   드디어 황둔골에 터를 잡고 두 동의 건물을 세웠으니 하나는 해회당(요사채)이었고 , 하나는 대웅상적광전 (대적광전: 의궤를 행하는 본전)이었으며 도량(성소)의 이름을 화엄사라 하였다.  화엄사의 화엄이란 곧 부처님 세계를 가리키는 다른 말이다.   화엄 세계는 깨달음의 세계며 영생 세계이고 부처님 세계인 것이다.  부처님 세계를 일러놓은 말씀을 기록한 경전을 '화엄경'이라 하는데 화엄사란 이름은 연기존자의 소의경전(교본)인 화엄경의 명칭에서 따온 것이다.    화엄사 이곳이 중생들을 화엄  세계로 인도하는 현세에서의 부처님 세계임을 천명한 것이다.

 

백제 법왕 1년 (599년)에는 이미 수많은 건물들이 축조되어 삼천 여명의 스님들이 거주하며 화엄학을 드날렸고, 이후 고구려 . 백제  . 신라가 서로 전쟁을 하며 한창 혼란한 시기를 맞이하였다.  신라 선덕여왕14년 (645년)이미 2년 전 중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신라 자장율사가 접전 지역인 이곳에 들러 거주하면서 구층탑을 조성하고 사리를 봉안하였고 건물들을 증축하였다.     신라 무열왕1년 (654년)경에 원효대사가 거주하며 해회당에서 신라 화엄도들에게 화엄학을 가르쳐 민족통일의 불꽃을 피우게 되었고 , 신라 무열왕17년(660년)  백제 의자왕20년 경에 이곳은 신라로 편입되었으며, 신라 문무왕16년 (676년)에 마침내 고구려 . 백제가 멸망되고 신라에 이해 통합되었다.

  의상대사는 전쟁으로 피폐되고 혼란된 민심을  달래고 안심시키고자 이에 미리 대비하고 있었는데 , 이것이 곧 화엄십찰(화엄종 십대사찰)의 건설이었다.  화엄사도 그중의 하나가 되었다.

 

통일신라 2년 문무왕17년(677년)에 의상대사가 이곳을 화엄종의 원찰로 삼고 거주하면서 건물들을 증축하였고 해장전에서 화엄설법을 펴면서 혼란한 백성들을 불심으로 거두었다.    통일신라 경덕왕13년(754년) 의상대사의 손상좌(제자의 제자)인 연기(緣起)조사에 의해 화엄사는 비로소 남방제일 화엄대종찰 지리산 대화엄사로 그 명성을 얻게 되었다.   또한 이때 화엄사 산중(황둔골)에 팔가람(팔원: 화엄원 . 봉천원 . 안지원 . 홍교원 . 서유원 . 미타원 . 증림원 . 선림원) 팔십일  암자가 조성되었고 그 중심 본원이 화엄원인데 지금의 화엄사다.   당시의 사람들은 다른 이름으로 황둔사, 화엄법류사 , 화엄법운사, 화엄불국사라 불렀고 그야말로 이 산중은 화엄불국세게로 장관을 이루었다.    본원인 화엄원 안에는 이웃 순천 땅에서 생산되는 편마암의 돌로 화엄경 경문을 새기고 , 새겨진 석경으로 이층사면칠칸의 장육전(지금의 각황전 자리)이 조성되었고 그 옆 동백 숲 언덕 위에 4사자 사리탑과 연기존자 공양탑이 조성되었다.

  연기조사는 선대 개산조인 연기존자의 효심을 전해 듣고 감동되어 존자의 모친상을 새겨 탑 기단부 안에 봉안하였고 , 사리탑 앞에는 차를 공양올리는 존자상을 새겨 봉안하고 후손들에게 불심과 효심의 이정표가 되게 하였다. 통일신라 말기 헌강왕 1년(875년")연기(烟起 : 도선국사의 별호 )선사가 거주하면서 본전 앞뜰 동서 양쪽으로 오층석탑을 조성하고 사리를 봉안하였으며, 또 교종가람이었던 화엄사를 봉천원에 선원(수도원)을 설립함으로써 선종 가람을 더하여 선교양종의 종합수도원인 대총림이 되었다.    통일 신라 경순왕9년(935년)에 신라가 멸망하고 고려왕조가 들어섰고  연기(도선)선사의 덕을 입은 고려왕조는 선사를 국사로 추대하여 모셨으며, 왕조 대대로 스님들을 국사나 왕사로 모셨고 도선국사의 덕을 잊지 않았다. 또한 이곳에도 대각국사와 정인왕사가 거주하였고 대대로 왕들의 발원에 의해 건물의 증개축 보수 등이 이어졌으며 다시 고려조가 멸망하고 저선왕조가 들어섰다.

 

조선조에도 수없이 개축 .보수하는 불사가 이어져 잘 보존돼 왔으나 조선 선조25년(1592년)임진년에 이웃나라 왜국(지금 일본국)의 왜인(지금 일본인)들의 침략으로 전쟁이 일어나자 나라와 백성을 구하려는 화엄사 스님들이 승군(군대)을 조직하여 인근의 다른 절 스님들과 함께 왜적들과 맞서 결사 항전하였다.    조선 선조 26년 (1593년)화엄사의 중관 안선사와 같은 문도인 벽암선사가 의승군을 조직하여 진주성 전투에 참전하였고, 또 자운스님은 의승수군 (해군) 총책으로 연선 (지금의 호칭 거북선)의 입안 및 제작을 이순신 장군에게 제안하고 전라좌수영 군대와 함께 진해 부근 웅천 해전에 참전하여 왜군과 맞서 장렬히 싸웠다.   지리산 . 광양만 . 섬진강 전투에서 수많은 스님들이 전사되었고, 전투에서 패퇴될 때는 승군의 근거지인 절들을 왜인들은 닥치는 대로 불살라 버리고 노략질하였다,   화엄사의  팔원 팔십일 암자도 이 전란 중에 모두 소실되었다.    또 조선 선조 30년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화엄사의 설홍 주지스님은 방처인 스님등 350명의 의승군을 조직하고 의병들과 합세하여 구례지역 섬진강 중류의 석주관에 나아가 왜적의 주력부대인 가등청정의 적군과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화엄사 스님 153명이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이 전쟁은 무려 7년 동안 이어졌고 결국 승리로 이끌었다.   또 자운선사는 전쟁이 끝나갈 무렵에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자 전사한 장군과 사병들과 백성들을 위해 노량에서  수륙재를 베풀고 원혼들을 달랬다.      조선  인조 8년 (1630년)  팔도 도총섭이 되신 벽암선사와 왕실의 발원에 의해 대웅전 복원을 필두로 여러 전각들을 복원하였고 , 조선 숙종25년(1699년) 팔도 도총섭 계파선사에 의해 장육전 자리에 석경 대신 목조로 건물을 세워 올리니 지금의 각황전이다,

 

1910년 조선이 망하고 일제 강점기와 6.25 동란을 겪으면서도 화엄사는 피해를 적게 입었지만 도량은 다소 퇴락되어 있었다.  1969년 도광선사에 의해 퇴락돼 있던 도량을 정비하고 보수하여 오늘의 화엄사 모습을 되찾게 되었고, 그 제자 문도들에 의해 대대적인 건물의 복원과 증개축 불사가 오늘에 이어지고 있으며 사세 또한 날로 번창하고 있다.    역사를 더듬어 보건데 이곳을 거쳐간 고승대덕이 수없이 많았으며 한국의 건축사에도 빼놓을 수 없는 석조물과 목조물들이 많이 남아있다.

 

 

이집 식사가 괜찮았었기 때문에 다음에 갈때 들르려고 올려놓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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