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

한국박물관 100주년 기념 특별전 " 통일신라 조각 "- 우수블로거 초청행사

백합사랑 2009. 2. 4. 22:26

 박물관을 좋아한 덕인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 영원한 생명의 울림,  통일신라 조각 " 기획특별전에서 우수블로거 초청행사에 나도 초대되어서 갔더니 , 원래는 유료(3,000원) 입장인데 무료 입장으로 입장할 수 있게 하여주고 조촐한 다과까지 마련해 주었다.(한끼도 못먹으면 큰일나는줄 아는 나는 낮에 미리가서 다른 전시를 둘러보다가 식사 시간을 놓치는 바람에 식당은 문이 닫히고 문이 열린 마켓으로 뛰어갔더니 단팥빵 한개밖엔 없다하여 그것으로 요기만 했었는데 다과회는 내게 훌륭한 만찬이 되었다 ㅎㅎ

다과시간이 끝나고  허모 (이름을 자세히 못들어서)학예관님의 설명을 들으며 가끔은 보았고 어떤 것은 전혀 낯선( 일본이나 중국에서 온 문화재들)을 한시간 이상 감상하였고 10여분간 ' 신라!' 하면 대표적인 석굴암을 만든 방법과 그곳에 석불과,  함께 있는 보살상이나 다른 여러 형상들에   관해 만들어진 이유나 조각기법 등에  영상을 보여주었다 . 그리고 마지막에 지금은 경주 석굴암엘 가도 유리밖으로  보이는 본존불 석가모니불 밖엔 볼 수 없는  경주 석굴암을 , 완벽한 재현은 아니지만 ,  거의 같은 모습으로 꾸민 곳을 보여주었다. 본존불은 영상으로 처리했고  일제시대 석고본을 떴던 것이 있는 것은 석고본을 떠서,  석고본이 없는 상에는 사진으로 대체해서 보여주었다.

평소에 박물관에 가면 혼자 조용히 보고 느끼고 왔는데  학예관님의 설명을 들으며  보게되니  통일신라에 예술문화와 그시대의 조각가들의 훌륭함을 다시 한 번 감탄하게 되었다.

중국이나 인도  등 세계 어느 곳이든 석굴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나라 석굴암처럼 부처님의 회상을  짜임새 있게 표현한 곳은 석굴암 밖에 없다고 하였다.

부처님과 보살 그리고 팔부수호신장 그리고 부처님의 십대제자 사천왕  금강역사상 등

불경에 표현된 부처님의 회상을 완벽하게 표현해 놓은 석굴암으로 세계적인 인정을 받아 유네스코에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는 것이다.

석굴암을 수없이 갔었지만 늘 무심코 바라보고 왔는데 학예관님의 설명을 들으며 새삼 석굴암에  귀중함을 깨닫게 되었다. 

 

 

 

 

 

 

 

 

 다과회 준비하는 중~

 

 

 초청 된 2-30명에  우수블로거와 문화전시관람동우회회원님들

 

우리에게 자상한 설명을 해주신  허모(남자분) 학예관님과 다른 학예관님

 

 

 

 재현해 놓은 석굴암

전시장 내에서 사진은 금지 되었지만 이곳은 괜찮을듯하여 한 장 찍었음(어차피 전시 끝나면 철거될 곳인것 같아서) 

 

 

 

 1 전환기, 변화의 모색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체제를 정비하는 7세기 말까지의 조각은 삼국시대의 전통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인도, 중국 등 외국 조각의 양식을 수용하여 소화해내는 등 옛 것과 새 것이 공존하는 다양성을 보였다.  백제 조각의 전통을 간직한 충남 연기 지역 출토 불비상佛碑像과 새로운 사실미를 보여주는 감은사 석탑 출토 금동사리상자의 사천왕상은 전환기 조각을 대표하는 작품들이다.

 

 [계유]가 새겨진 아미타불,  돌에 조각한 것  통일신라 673년 충남 연기 비암사  국보 제 106호

이 석물은 계유년 (673), 백제 사람이었던 전씨 가문과 유민(망하여 없어진 나라의 백성) 50여 명은 백제가 멸망한  뒤 통일신라인으로 귀속되었습니다.

그들은 왕과 신하, 세상을 먼저 떠난 부모님을 위해 아미타불상, 관음상, 대세지상을 만들어 부처님에게 기도 하는 글을 이 불비상(돌로 만든 비석 위에 새긴 불상)에 새겼습니다.

 

 

 

통일신라 673년 충남 연기 비암사  국보 제 106호 불비상 옆면의 비천상

 

 

 

통일신라 673년 충남 연기 비암사  국보 제 106호

통일신라 673년 충남 연기 비암사  국보 제 106호  

 

 

 통일신라 673년 충남 연기 비암사  국보 제 106호   불비상 뒷면에 새겨진 악기를 연주하는  비천상 들

 

 

 

계유가 새겨진 삼존불 통일신라 673년 충남 연기군 서광암 국보 제 108호 

화강암 돌에다가  1400여년전에 저렇게 섬세하게 새길 수 있었던 우리의 조상님들 ~~~

 

  금동사리상자  통일신라 682년  경북 경주 감은사 터 서삼층석탑   보물 제 366호

 

 금동아미타불 좌상 , 통일신라 706년 경북경주 구황동 삼층석탑, 국보 제 79호

 

 2 새로운 지평을 열다.

 

7세기 말에서 8세기 전기는 본격적으로 당나라 조각 양식을 수용하여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조각 양식을 성립해나가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무렵  한 .중 . 일 삼국 간에는 사신의 왕래 뿐만 아니라 불교문화의 교섭이 보다 빈번해지고 심화되어 불교조각품에도 국제적인 공통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679년경 완성된 경주 안압지雁鴨池에서 출토된 금동판불들은 불상 몸체의 팽팽한 탄력감과 신체의 굴곡이 율동적인 옷주름과 어우러져서 그 전까지 보지 못한 생명력을 발산하고 있다.

 

 

 

금동불입상 , 통일신라 8세기 . 경북 경주 백률사 . 국립경주박물관 국보 제 28호

 

금동판삼존불좌상 .  통일신라  7세기 후반 , 경북 경주 안압지 , 국립경주박물관  보물 제 1475호  

 

금동관음보살입상 ,  통일신라 8세기 , 삼성미술관 . 보물 제 927호

 

 

 

 

3 완성과 변주

통일신라 8세기 전반에서 중엽에 이르는 시기에는 우수한 제작기술을 바탕으로 균형과 조화가 잘 이루어진 불상이 제작 된다.   살이 있는 듯한 생명의 호흡이 표현된 이 시기 불상을 통해 당시 통일신라인들이 지녔던 미의식을 엿볼 수 있다.  8세기 중엽 이후의 조각들은 전성기 조각의 여운을 간직하면서 다양한 변형이 나타나게 된다.  또한 오른손을 무릎 아래로 내린 항마촉지인의 약사불상과 가슴 앞에서 한 손으로 다른 쪽 손가락을 감싼 지권인智拳印을 한 부처 모습의 비로자나부처 등 당시 중국이나 일본에는 없는 도상이 제작되어 통일신라 조각의 독자성을 보여 주었다.

 

 

 

 

 금동불입상 , 통일신라 8세기  일본 후쿠오카 히코산진구  중요무형문화재

 

 

십일면관세음보살상 백단목으로 조성한 일본 중요문화재  

 

 

석각삼존불상 - 중국 시안 보경사에서 전래되어 중국 일본 등 각지에 흩어져 있는 수십구의 석조불상들 중의 하나이다. 보경사 석불 중에는 이처럼 항마촉지인을 맺은 상이 몇구 전하나 세부표현이 약간씩 다르며 존명도 일률적이지 않다.  8세기 이후 통일신라에서 유행하는 항마촉지인의 불좌상과 관련하여 중요한 도상이다.

일본 중요문화재 ?

 금동불입상, 통일신라 8세기 

 

 

 

 

금동불좌상.  통일신라 8세기

 

 

 

 

 

 

왼편 : 금동불입상  통일신라

 

 

 

 

 

 

 

 약사불 , 금동약사불입상 , 통일신라 8세기 , 보물 제 328호

 

 

 

 

  석조비로자나불좌상 , 통일신라 9세기

 

 

 금동보살입상 , 통일신라 8세기 , 삼성미술관 , 국보 제 129호

 

 

 

 

 금동팔각당형사리기 , 통일신라 9세기傳  전남 광양,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금동 악기를 연주하는 천인 .  통일신라 8세기 . 경북 영덕 유금사

 

 

 

4. 공덕의 장엄, 석탑 부조

8세기 후반 이후 석탑에 새겨지는 부조는 중국이나 일본의 것과는 차별화되어 통일신라 조각을 대표하는 독특한 분야이다.   석탑에 새겨지는 상의 종류는 부처, 보살, 금강역사, 범천(梵千) 제석천(帝釋天) 사천왕 팔부중(八部衆), 주악천인(奏樂天人), 십이지 등으로 다양하다.  이들은 탑 안에 모셔진 불사리를 수호하거나 부처의 주위에 모여 그 가르침을 듣는 것을 상징한다.  석탑의 다양한 부조를 통해 통일신라인들의 열렬한 신앙심과 불교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엿볼 수 있다.

 

 

 

 석탑 탑신석에 새겨진 신장(또는 명왕)상 . 통일신라 8세기 . 경북 경주 읍성 동문터

 

 

석탑 기단 면석에 새겨진 팔부중(아수라) . 통일신라 8세기 . 경북 경주 담엄사 터

 

석탑 받침돌에 새겨진 팔부중상 - 건달바

 

 

5 무덤의 수호자들, 능묘조각

우리나라의 전통 조각은 불교조각이 상당수를 차지하지만, 그외의 조각도 활발히 제작되었다.  통일신라의 능묘조각은 그 본격적인 시작으로 여겨진다.  통일신라 능묘조각의 가장 큰 특징은 봉분 주위에 갑옷을 입은 십이지상을 배치한 것이다.  십이지의 발생지로 알려진 중국에서는 당대唐代에  도포를 걸친 작은 십이지상을 무덤에 넣는 풍습이 있었으나, 통일신라처럼 무장한 십이지상을 무덤 주위에 배치한 예는 아직까지 알려진 바가 없다.

오른쪽 그림 : 십이지(원숭이)상 . 통일신라 8세기 . 경북 경주 성덕왕릉

 

납석(곱돌이라고도 하며  광택이 있고 매끈매끈한 암석이나 광물)제 십이지상 - 토끼

 

 

 

 

 6 신라 예술혼의 절정, 석굴암

이번 전시에는 인류의 위대한 문화유산인 경주 토함산의 석굴암을 전시실 안에 실제 크기와 비슷하게 만들어 현대적으로 재현한 공간을 마련하였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석굴암은 경덕왕(742~765재위)대에 재상을 지냈던 김대성의 발원으로 751년에 건립되기 시작하여 8세기 후반에 완성되었다.   석굴암은 인도와 중국처럼 암반을 뚫어 만든 자연석굴이 아니라 , 가공한 화강암 석재를 일일이 짜 맞추어 인공으로 만든 독특한 건축물이다. 이 속에 40구의 상을 불교의 질서에 따라 체계적으로 배치하여 장엄한 불국토를 구현하였다.   

 

  

신라 예술의 절정 석굴암 .  통일신라   조각의 꽃 . 1995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 으로 지정

통일신라 사람들은 부처의 말씀을 무척 사랑해서 많은 절을 세워 부처님을 공손히 모셨는데  석굴암도 그 중 하나로  751년 통일신라  경덕왕 때 , 재상(임금의 신하 중 높은 계급)인 김대성이 현생 부모님을 위해 불국사를 짓고, 전생의 부모님을 위해 석굴암을 지었다고 합니다.   김대성이 51살부터 만들기 시작했고, 20년 후 그가 세상을 떠나자 나라에서 완성했다고 합니다.

 

석굴을  파기 쉬운 인도와는 달리. 우리나라 돌은 단단한 화강암으로 파기 여려워서 인공으로 석굴을 지어서 만들었습니다.   그냥 석굴을 판 것이 아니라, 집을 짓듯이 만들었던 것을 볼 때 , 우리 조상들의 돌 다루는 솜씨가 얼마나 훌륭했는지 잘 보여줍니다.

 

 석굴암 천장 모양을 보시라고 다시 올림

 

석굴암  11면 관음보살상(석굴암본존불  뒤에 있음) 머링 위에 작은 9개의 얼굴이 있고 가운데에 부처님이 있어 모두 11개임.  지금 사진으로 보이진 않지만  오른손에 든 정병 안에는 활짝 핀 연꽃이 있고, 살포시 잡은 얇은 옷자락은 바람에 날아갈 듯 합니다.

통일신라 751년경  경북 경주 석굴암

 석굴암 석조금강역사두상 . 통일신라 751년경  경북 경주 석굴암

 

 

 

 

 -박물관에서 옮긴글-

 

시인 조지훈 선생님은 석굴암을 보신후 1953년 [돌의 미학] 중에 아래와 같은 글을 쓰셨다.

 

돌에도 피가 돈다 . 나는 그것을 토함산 석굴암에서 분명히  보았다. 양공良工의 솜씨로 다듬어 낸 그 우람한 석상의 위용은  살아있는 법열法悅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인공이 아니라 숨결과 핏줄이 통하는 신라의 이상적 인간의 전형이었다.

그러나 이 신라인의 꿈속에 살아있던 밝고 고요하고 위엄있고 너그러운 모습에 숨결과 핏줄이 통하게 한 것은 , 이 불상을 조성한 희대의 예술가의 드높은 호흡과 경주傾注된 심혈이었다.  그의 마음 위에 빛이 되어 떠오른 이상인理想人의 모습을 모델로 삼아 거대한 화강석괴를 붙안고 밤낮을 헤아림 없이 쪼아 내고 깎아 낸 끝에 탄생 된 이 불상은 벌써 인도인의 사상도 모습도 아닌 신라의 꿈과 솜씨였다.

 

 

 

 

  석조미륵보살입상  .통일신라 719년  . 경북 경주 외동읍 감산사 터.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실  3층 불교조각실    국보 제 81호

 

 석조약사불좌상 . 통일신라 8세기후반 9세기 초  . 경북 경주 남산 삼릉계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실  3층 불교조각실 

 

석탑 기단 면석에 새겨진 팔부중 천상 통일신라 9세기   . 1층 역사의 길

 

 

 금동불 입상

위의 설명들은 국립박물관 통일신라 조각전 교육 프로그램 안내서에서 옮긴 글임

 

 

통일신라시대 유물이 석불이나 금동불만 볼 수 있는 것은 그시대에도 회화나 목조품들도 있었지만 수없이 겪었던 우리의 전란들로 인해 회화난 목조품들은 다 소실되어 없어진 때문이라함

그나마 화강암으로 만든 불상들이 남아 있기에 그시대에 우리의 조상님들의 귀중한 솜씨와  예술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시대 불교 유물만 남은 것은 아니고 간혹 무덤에서 발견된 토용도  볼 수 있다.

 

 하인

당나라 복식의 영향을  수용한 8세기의 토용이다. 바닥면을 보면 한쪽이 비어있으며 백토를 입힌후 부분적으로 채색을 하였다.  크기와 복식 자세 등에서 인물들의 신분차이를 알 수 있다.   당과의 지속적인 교류를  배경으로 통일신라 미술이 지니게 된 국제적인 성격도 엿볼 수 있다.

 

 하인

 

무덤 안에 토용으로 하인

 

십이지 양 

 

 

남녀합장상  국립경주박물관

 

 한 덩어리의 돌을 뚜껑이 있는 상자 형태로 조각하였다.

뒷면에는 베게를 베고 이불을 덮은 채 나란히 누워있는 남녀의 모습을 새겼다.  관모를 쓴 사람이 남자이고 이목구비의 표현이  같은 시대의 불교조각과 비슷하다.   여자의 머리옆에 북두칠성의 별자리가,  남자옆에는 남두 6성이 새겨져 있어  도교신앙과 관련된 듯하다.

 

 

   

 

 

사진으로야 진품에 아름다움을 다 견줄수 없지만 본사람은 다시 기억 하는데 도움이 된다.

시간 관계상 도록을 사지 못해   박물관에서 준 설명서에 있는 작은 사진이라 그림이 선명치 못하지만 아쉬운대로 .......

 

2-30명이 함께 무리지어 다니며, 설명을 들으려니 전시물 하나하나를 자세히 못본것 같아 다시 한 번 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설명이 끝나면서 기녀품을 주겠다고 초청자 호명을 한다.

 

 

메모할수 있는 수첩과 통일신라조각전 입장권

 

다시가려 했는데 입장권까지  선물로 받아서 가족과 함께 다시 가야겠다.

그런데 박물관 기획전 중에 봄이나 여름까지만 전시하고 끝날 것들이 많아서 당분간 시간만 나면 또 박물관엘 자주 가봐야 할 것 같다.

더우기 올해 년말까지 무료 입장이라니 , 이런 대박이 또 어디 있을까?

입장료를 받아도 감사할 곳을 무료 입장까지~~

 

사진을 찍을 수 없는 전시회를 보고 올땐 언제나 팜프렛을 사오는데 어젠 늦은 관람이라서 직원들이 퇴근하는 바람에 책자를 사오지 못했다.

 

박물관 관람시간이 평일에는 오후 6시면 끝나는데 매주 수요일은 큐레이터와의 대화가 있어서 오후 9시까지 관람이 가능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