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 산악회 가는길에 따라 나섰는데 비가 내린다.
가는 산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미륵산이라고만 한다.
비가 내려도 왔으니 산 입구까지라도 다녀와야겠다고 나섰는데 산을 오르다보니 철조망 안에 탑이 보인다. 어? 그럼 여기가 익산에 유명한 미륵사지? 에고 반가와라 오고싶던 곳이네~
얼른 산에 조금만 올랐다가 내려와서 저곳을 좀 둘러 봐야겠다! 하고 걸음을 재촉하는데 앞에 가시던 어떤분께서 하산하는 산님께 그산에 볼것이 많으냐고 물으신다.
뭐 별로 .......
앞에 가시던 어르신 발길을 돌리시며 오던길에 있던 절이나 구경을 간다고 하신다.
그래도 난 산을 조금은 더 올랐다 내려오고싶었는데 함께 가던 우리팀 우리도 내려가서 절 구경이나 하잔다 ㅎㅎㅎ
미륵산으로 가는 왼편에 있는 소림사라는 절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참 이쁜 길이 보인다.
아담한 절 소림사
절 주변에 떨어져 있는 단풍이 어찌나 이쁜지 꽃비속을 거니는 것 같다.
이제부터 미륵사지를 살펴서~
미륵사지
사적 제 150호
백제(B.C.18~A.D660년) 최대의 가람이었던 미륵사의 창건은 <삼국유사>에 기록 되어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 30대 무왕(A.D.600~641년)이 왕비와 함께 용화산에 있는 사자사로 지명법사를 찾아가던 중 못(池)에서 미륵 삼존이 출연하여 미륵사를 창건하였다. 또 지명법사의 도움으로 산을 허물어 못을 메우고 전(금당). 탑. 낭무(회랑)를 세 곳에 마련한 가람을 조영하였는데 신라 진평왕이 백공을 보내어 도와주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발굴조사에 의해서 미륵사가 3원 1가람이며 산 흙으로 메운 못에 자리하고 있는 점 등이 밝혀져 삼국유사의 기록이 실증적임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믿는다면 미륵사에는 창건 당시 건축. 공예 등 백제의 문화역량이 최대한 발휘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라 등 삼국의 기술이 결집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미륵사 창건은 이곳 금마에 가람을 조영하여 마한 세력을 아우르려는 정치적 의도도 있었을 것이나 황룡사로 대표되는 신라 화엄신앙에 바탕한 것이다.
- 옮긴글-
눈에 보이는 땅은 모두 미륵사지. 멀리서 봐도 참 이쁜 소나무
멀리서 봐도 참 이쁜 소나무
소나무 옆엔 돌물통
미륵사지에 대하여
백제 최대의 가람인 미륵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는 미륵사 인근 오금산(현재 익산토성,쌍릉이 자리하고 있는 곳>에서 마를 캐며 홀어머니와 살던 마동이 신라 선화공주와 혼인하는 서동설화와 미륵사 창건설화로 되어 있다.
선화공주와 결혼한 후 왕이 된 무왕(백제 30대왕, AD. 600~641)이 왕비와 더불어 용화산(현재의 미륵산) 사자사에 있는 지명법사를 찾아가던 중 못 속에서 미륵삼존이 출현하자 왕비가 무왕에게 절을 세우기를 청하여 미륵삼존을 위한 금당 . 탑 . 회랑을 세 곳에 세웠다고 한다.
미륵사 창건에 대한 삼국유사의 기록인 못을 메운 흙이 산흙이라는 점과 가람이 3원으로 구성된 것 등은 발굴조사를 통해 사실로 밝혀졌다 미륵사의 창건에는 무왕과 선화공주의 설화만이 아니라 국민통합이라는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다.
즉 백제의 국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마한 세력의 중심이었던 이 곳 금마에 미륵사를 세우는 데에는 당시 백제의 건축과 공예 등 각종 문화적 역량이 최고도로 발휘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신라 진평왕이 많은 기술자를 보내 도와 주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삼국의 기술이 집결되었을 것이다.
창건 동기에 대하여는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잇으나 미륵사가 백제 불교에서 미륵신앙의 구심점이었음은 분명하며 신라 최대의 가람인 황룡사가 화엄신앙의 구심점이었던 것과 대비된다.
미륵사지에는 국보 제 11호인 우리나라 최고, 최대석탑(높이 14.24M)과 보물 제 236호 당간지주, 문화재자료 제 143호 석등하대석 등의 지정문화재가 있다
석탑은 거의 전면이 붕괴되어 동북면 한 귀퉁이의 6층까지만 남아 있으나 본래는 사각형태의 9층탑으로 추정된다 .
이 석탑은 목탑의 각 부분 양식을 나무 대신 돌로써 충실하게 재현하였다. 기단부는 목탑과 같이 낮고 작은 편이며, 초층탑신은 각 면이 3칸씩인데 중앙의 교차되는 중심에는 사각기둥(찰주)을 세워 탑을 지탱하게 하였다. 1층 각 면에는 민흘림(아래가 넓고 위가 좁은 모양) 형태의 사각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창방과 평방을 가설하였으며, 그 위에 두공양식을 모방한 3단의 받침으로 옥개석을 받치고 있다. 2층 이상의 탑신은 초층 보다는 훨씬 얕아졌으며, 각부의 가구수법은 약화되었다. 옥개석은 얕고 넓은데 네 귀퉁이에 이르러 약간의 반전을 보이며 옥개석 끝(처마끝) 부분에서 옥개밭침까지 사이가 넓다 . 2층 이상의 옥개석은 위로 올라갈수록 폭이 줄어들었을 뿐 두공양식의 3단 옥개받침이나 지붕 귀퉁이의 반전 등 초층과 같은 수법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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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원 9층 석탑
1974년 동원 탑지를 발굴 조사한 결과 기단의 규모와 형태 및 출토유물로 보아 동원 탑지에 서탑과 같은 백제시대의 석탑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 탑자리에 1991년 부터 석탑의 복원을 시작하여 1992년에 완공하였다. 복원에 따른 고증자료는 서탑과 동원 동탑 기단부 및 1980년 이후 동탑지 주변 발굴 조사에서 출토된 노반석을 비롯한 탑 석재가 활용되었다.
복원된 탑은 하층 기단이 1변 12.5M, 상층 기단이 10.5M인 2중 기단이며 9층으로 지면에서 상륜부까지 총 높이는 27.8M이다. 탑의 내부는 1층 탑신에 + 자형 통로가 있고 2층부터는 공간이 없이 막혀 있다. 옥개석과 상륜부에 달린 풍탁은 동탑지에서 출토된 백제시대 금동 풍탁을 복제한 것이다.
탑 복원에는 익산 황등에서 캐낸 화강암, 총 2,000여 개 2,700여톤이 사용되었으며 백제시대 석탑 기단석과 탑신석 35개가 포함되어 있다.
-옮긴글-
곳곳에 미륵사 유적지에서 나온 돌들, 앞에 보이는 건물은 미륵사지탑이 있던 자리인데 그자리를 보존하고 있는 곳
석등하대석으로 강화유리로 덥어놓았슴. 문화재자료 제 143호
당간지주와 유적지에서 나온 것들
미륵사지 당간지주 :보물 제 236호
이 당간지주는 동. 서로 2기가 90여M 거리를 두고 세워져 있다. 기단의 각면에는 둘레를 따라 외연선을 돌리고, 중앙에도 한 줄의 선을 깎아서 표현하였다. 양식수법에 의하여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 되는데 지주의 높이는 4M이다.
당간지주란 절에서 불문(佛門)을 나타내는 문표, 그리고 종풍을 드러내는 종파의 기(旗)인 당(幢)을 달았던 깃대를 지탱해주는 버팀기둥이다.
당간지주 뒤에 나무가 많이 보이는 곳은 연못
미륵사탑이 있던 터를 보존하고 있는 곳
건물 내부에는 탑이 있던 터와 탑 잔재들
국보 제 11호 백제 미륵사 석탑이 있던 곳 --지금은 보수중
사진 중앙에 4각형 돌은 돌 가운데 움푹한 곳 속에 사리함과 사리 등이 들어 있었던 것임
저 네모진 돌 위에 다시 큰 돌이 덮여 있었던 덕에 도굴을 면할 수 있었다고 그곳 관장님께서 일본인들에게 설명해 주시는 말씀 들었음
일본인 관광객들이 단체로 동아리로 와서 진지하게 보는 모습들이 많이 보였음
*아래에 사진으로 옮겨온 것들은 모두 현장에 있는 사진들을 찍어 온 것임
미륵사지 석탑
국보 제 11호
소재지 :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본디 방형 평면인 이 석탑은 동북쪽 부분이 6층까지 제 모습을 갖추고 있을 뿐 무너진 부분을 일제시대인 1915년 시멘트로 보수 하였다. 2001년까지 6층이 남아 있었으며 높이가 14.24M였다.
탑의 건립연대는 백제 무왕(A.D.600~641년)로 추정되며, 목탑에서 석탑으로 이행하는 과정의 구조를 보여주는 시원양식(始源樣式)의 석탑이다. 이탑은 시원양식의 석탑이라는 점뿐만 아니라 규모도 고대 한국 석탑 중 가장 큰 석탑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석탑이다.
2중 기단의 안쪽에 서있는 초층 탑신(初層 塔身)은 4면이 각 3칸이며 각면 중칸에는 문이 있어 탑신 내부로 통하게 되어 있으며 탑 내부 중심에는 거대한 네모난 돌기둥이 있다.탑신 외면에는 네모난 주초석위에
민흘림 수법의 네모난 돌기둥을 세우고 기둥 위에는 목조건물처럼 창방(昌枋),평방(平妨)이, 있고 그 위에 두공(枓拱) 형식의 받침돌이 옥개석을 받고 있다.
2층 이상은 탑신의 높이가 얕아지고 내부 공간도 없어지고 각 부재의 구조도 간결하게 생략되며 위로 올라 갈수록 크기와 높이가 차례로 줄어 들었다. 각층 옥개석은 전체적으로 두께가 얇고 평평한데 귀 부분을 위로 치켜올려 반전을 반전을 이루며 옥개받침은 3단이다.
동쪽에 이와 같은 석탑이 또 하나 있었으며, 두 석탑 사이에는 목탑이 있어 미륵사에는 원래 3개의 탑이 있었다. 이 탑은 붕괴 위험이 있어 2001년부터 해체 보수 정비 중에 있다.
- 옮긴글-
백제 미륵사 석탑의 옛 모습 --지금은 보수 중이라서 탑은 없고 해체해 놓은 돌들만 건물안에 보존되어 있음
옛 미륵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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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
석탑보수정비를 위하여 해체 조사과정 중 2009년 1월 14일 , 백제 왕실의 안녕과 모든 중생들의 불도를 기원하고자 봉안한 (639년) 사리장엄이 발견되었다.
사리장엄은 사리호와 금제사리봉안기, 금제소형판, 은제허리띠장식 등 총 19종 683점의 다양한 유물로 구성되어 있다. 이후 정밀조사 및 보존처리 과정에서 금제사리내호, 유리제사리병 , 사리 등이 추가로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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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 탑터를 보존하고 있는 건물을 나오면 미륵사지 유물 전시관이 있다.
사진에 보이는 것 말고도 청자며 잘 보존된 유물들이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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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부터 여기까지 사진으로 옮겨온 것들은 모두 현장에 있는 사진들을 찍어 온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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