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땅끝마을 미황사

백합사랑 2011. 11. 8. 11:28

 

 청산도를 나와 미황사로 가는 길 언덕 높이 장보고님의 동상이 멀리 보이지만 달리는 버스 속이라 내려가 볼 수도 없고 빨리 셔터를 눌러 봅니다.

 

미황사는  우리나라 최땅끝에 있는 절이랍니다.

미황사 일주문

미황사는 신라 경덕왕 8년(749년)에 창건되었다. 사적비(1692년)에 따르면 서역 우전국왕의 인도로 경전과 불상이 가득한 배가 땅 끝에 도착하였는데, 의조화상과 향도(香徒)100여 명이 그 배를 맞이하여 지금의 자리에 절을 세웠다.  창건 이후 미황사는 조선중기까지  12암자를 거느린 대찰의 모습을 갖추고 번성하였다. 그러나 정유재란(1597년)을 겪으며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어 1598년에 중창하였고,  2008년에 삼창하였다. 

미황사 뒤편에 병풍처럼 둘러선 달마산은 그 빼어난 아름다움 때문에 남도의 금강산이라고도 불린다.  달마대사가 중국에 선을 전하고 해동의 달마산에 늘 머물러 있다고 하여 달마산이라 이름지어졌다.   고려시대의 기록에 따르면 중국 송나라의 높은 관리들이 찾아와 달마산을 찬탄하고 예경하였다고 전해진다.

현재 이곳에 머무는 지운, 현공, 금강스님이 1989년에 퇴락한 미황사에 오게 되었다. 흔적만 남아있던 명부전, 삼성각, 종각, 만하당, 달마전, 저하루, 백운당, 청운당, 감로당, 부도암 등을 복원하고, 낡은 세심당과 염화실, 향적전을 증축하였다.  15년 넘게 이어진 중창 불사 결과 이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찰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옮긴글 -

 

 

 

달마대사가 달마산에 늘 머므르셨다는 전설이 있어서인지? 이 절에는 달마상이 있습니다.

 

 

 

 

 

 

병풍처럼 둘러진 산과  전각들

 

 

대웅보전(大雄寶殿)- 보물 947호

대웅보전은 미황사의 중심 전각이다.  한 가운데에는 석가모니불, 좌우에는 아미타불, 약사여래불이 모셔져 있다.  1601년에 중건하였고, 1660년,  1754년, 1982년,  2007년에 거듭 중수하였다. 내부의 대들보와 천장은 산스크리트어 문자와 천불벽화로 장엄되어 있는데 그 아름다움이 인도의 아잔타 석굴 벽화, 중국 둔황막고굴의 천불벽화에 비견되어지기도 한다.

특히  천장 곳곳에 그려진 1천 분의 부처님 때문에 이곳에서 세 번만 절을 올리면 한 가지 소원은 이루어진다고 한다. 부처님이 천 분이니 세 번이면 삼천 배가 되는 격이니 그런 이야기가 나온 듯하다.  대웅보전은 창건실화에 나오는 배를 상징하기도 하고, 중생계에서 부처님의 세계로 건너는 배를 상징하기도 한다.

 

미황사 대웅전에 단청이 없는 이유는?

단청은 일반 건축물과 달리 법당이나 궁궐의 권위를 나타낼 목적으로 건물에 그린 그림이다. 또 바람이나 나무를 썩게 하는 여러 원인들로부터 건축물을 보호하기 위해 그리기도 했다.  미황사 대웅보전의 경우 건물 안을 보면 벽화가 그려져 있듯 외벽에도 단청을 했었는데  1754년 건물을 중수할 때 단청을 했으나 250여 년이 넘는 동안 바닷바람 등의 영향으로 그 고운 색이 바랬다고 합니다.

법당을 지은 나무는 느티나무

-옮긴글-

 

 

 

 

 

 

대웅전 안에 모셔진 가운데 석가모니불, 좌우에는 아미타불, 약사여래불 그리고 양옆에 천장과 벽에 그려진 천불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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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황사 대웅전 안에 아름다운 단청들입니다

이 사진에서는 천장 서까래의 그림을 중심으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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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에서는 맨 아래편에 달마상을 중심으로 봅니다

 

내부의 대들보와 천장은 산스크리트어 문자와 천불벽화로 장엄되어 있는데 그 아름다움이 인도의 아잔타 석굴 벽화, 중국 둔황막고굴의 천불벽화에 비견되어지기도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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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금으로 그려진 새와 산스크리트어 문자를 중심으로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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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아래쪽 서까래 뒤에 천불이 그려진 그림을 중심으로 봤습니다

 

 

 

 

 

병풍처럼 둘러싸인 달마산과 응진당 (應眞堂)- 보물 1183호

응진당은  석가모니 부처님 제자 중에서 신통력이 뛰어난 16분의 아라한과를 얻은  제자들을 모신 전각

應眞은 참다운 존재의 실상을 환히 깨닫고 해탈에 이른 이들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 '아라한'의 한자어

 

응진당은 가운데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시고 좌우에 아난 존자와  가섭존자가 모셔져 있고 그 둘레로 16나한상, 인왕상, 시자상, 동자상 등이 모셔져 있다.   특히 응진당 내부 벽면에 수묵으로 그려진 나한 벽화는 유려한 선(線)맛이 선필의 경지를 보여준다. 

 

 

미황사 안쪽에서 본 일주문

 

* 미황사 창건설화

신라 경덕왕 8년(749)에 홀연히 돌 배 한 척이 땅끝마을 사자포구에 와서 닿았다. 배 안에서 천악범패 (天樂梵唄)의 소리가 들려 어부가 살피고자 했으나 배는 번번이 멀어져 갔다. 의조스님이 이를 듣고, 장운 , 장선 두 스님, 향도 백 여 명과 함께 목욕하고 경건하게 기도를 올렸다. 그러자 비로소 돌 배가 바닷가에 닿았는데 그 곳에는 주조한 금인(金人)이 노를 잡고 서 있었다.  배 안을 살피니 [화엄경] 80권, [법화경] 7권과 비로자나불, 문수보살, 40성중(聖衆), 16나한, 탱화 등이 있고 금 가락지, 검은 돌이 한 개씩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경전을 바닷가에 내려놓고 모실 장소를 의논할 때 검은 돌이 저절로 벌어지며 그 안에서 검은 소 한마리가 나타나니 문득 커졌다.

그날 밤 의조스님이 꿈을 꾸었는데 금인(金人)이 말하기를 "나는 본래 우전국(인도) 왕으로서 여러 나라를 두루 다니며 경전과 부처님을 모실 곳을 구하고 있는데, 이곳에 이르러 산 정상을 바라보니 1만불이 나타나므로 여기에 온 것이다. 소에 경을 싣고 가다 소가 누워 일어나지 않는 곳에 성상을 봉안하라."고 일렀다.

이에 소 등에 경을 싣고 가는데 소가 한 번 눕더니 벌떡 일어나 다시 걸어갔다.  그러더니 산골짜기에 이르러 누워 일어나지 않았다. 이에 소가 처음 누운 자리에 통교사를 짓고 누워 일어나지 않은 자리에 미황사(美黃寺)를 지어 불상과 경전을 모셨다.  미황사의 '미' 는 소의 아름다운 울음소리에서 따왔고, '황'은 금인의 황금빛을 따와 이름 붙였다. 1692년(숙종18)에 민암이 지은 (미황사사적비)에 이런 기록이 나온다.

- 옮긴글-

 

미황사는 템플스테이도 있답니다.

전화예약은  061- 533- 3521

참가비 1박 2일은 (개인방 8만원, 다체방 5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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