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부처님 오신날을 맞아 - 불교의 탄생과 전파

백합사랑 2012. 5. 23. 11:46

불교는 카필라(현 인도와 네팔 사이) 왕국의 슈도다나 왕과 마야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  싯다르타에 의해 발생한 종교이다.

네팔 포카라 호텔 로비에서 찍어온 사진

 

네팔 포카라 호텔 로비에서 찍어온 사진

싯다르타태자는 태어나자마자 "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하늘 위와 땅 아래 오로지 나만 홀로 존귀하다)!" 을 외친 싯다르타는 오랜 수행 끝에  가야산  보리수 밑에서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때가 그의 나이 35세 때이며, 기원전 530년 12월 8일로 , 불교가 탄생한  날이다.

  이후 가야산에서 내려온 싯다르타는 갠지스 강 유역에서 설법을 시작했다.  그는 수많은 제자에게 불법(佛法)을 전했으며,  중생을 극락으로 이끌었다.   싯다르타는 중생에게  자신을 부처라고 일컬었으며, 다음과 같이 엄숙하게 선언했다.

 "  나, 부처는 어둠과 우매함 속에서 큰 깨달음을 얻는 자다.  끝없는 윤회의 수레바퀴와  진리에 대한 무지(無知), 곧 무명(無明)이 고통의 근원임을 알았다.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오안육통(五眼六通: 육안肉眼. 천안天眼. 혜안慧眼. 법안法眼. 불안佛眼의 다섯 가지 안력眼力과 神足通 : 千眼通. 天耳通. 他心通. 宿命通 . 漏盡通의 여섯 가지 신통력)을 얻을지어다.   만약에 죽지 않고자 한다면 오로지 무명을 끊을지어다.  그리하면 슬픔과 늙고 죽음 그리고 고뇌가 사라질 것이다.   모든 더러움이 씻겨 나가 광명을 얻으면 이것이 바로 깨달음의 경계이니, 이로써 불생불사(不生不死)의 해탈이 있을 것이다."

  부처의 음성은 온 천지로 울려퍼졌다. 설법은 강물이 대지를 촉촉히 적시듯 중생의 마음을 감동시켜 큰 깨달음의 경지로 이끌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서 세월은 변함없이 흘러갔다.

부처가 가야산을 떠나 불법을 전하고 중생을 제도한 지도 벌써 49년이 지났다. 길고도 짧은 그 시간 속에서 부처를 따르는 제자와 신도, 그리고 수행으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지위인 아라한과(阿羅漢果)* 를 얻은 이들이 2,250여명에 달했으며, 380여 차례에 걸친 말씀으로 제도한  이가 수를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그 가운데 [화엄경(華嚴經)]에 담긴 내용을 89일, [아함경(阿含經)]을 12년, [방등경(方等經)]을 8년, [반야경(般若經)]을 22년, [법화경(法華經)]과  [열반경(涅槃經)]을 8년 동안 말씀하셨다.

    법회에서는 주로 사성체(四聖諦)]. 십선업도(十善業道)**.

 *아라한과(阿羅漢果) : 불가 용어로 나한과(羅漢果)고도 한다. 소승 불교 최고의 과위(果位)인데, 수행을 완수하여 모든 번뇌를 끊고 다시 생사의 세계에 윤회하지 않는 아라한의 자리로서 그 과위를 얻은 사람을 아라한이라고 하며, 나한이라고, 줄여 부르기도 한다. 아라한이 된 사람은 반드시 승려가 된다고 전해진다.

 

 ** 십선업도(十善業道) : 불가 용어로 십선(十善)이라고도 하며 십악(十惡)과 상대적인 개념이다.  불가의 기본적인 도덕 신조를 가리키는데 , 십선은 실제적으로 오계(五戒), 즉 불살생(不殺生:살생하지 말 것) . 불투도(不偸盜) :도둑질 하지 말것) . 불사음(不邪淫) : 간음하지 말 것) . 불망어(不妄語 : 허황된 말을 하지 말 것) .  불음주(不飮酒 :술을 마시지 말 것)를  확충시킨 것으로 불음주를 빼고 불양설(不兩舌 : 거짓말하지 말 것) . 불기어(不綺語 : 감언이설 하지 말것) . 불악구(不惡口 :험담하지 말 것 ) . 불탐욕(不貪慾 : 탐욕을 부리지 말 것) . 불진애(不瞋애) : 화내지 말 것) . 불우치(不愚癡 : 어리석지 말 것) 를 더한 것이다.  앞의 세 가지는 신업(身業)에 속하는 것이고, 중간의 네 가지는 구업(口業)에 속하는 것이며, 뒤의 세 가지는 의업(意業)에 속하는 것이다. 

 

팔정도(八正道)*  오온인연(五蘊因緣)**  십이인연(十二因緣)*** . 사무량심(四無量心)**** . 삼전심이법륜(三轉十二法輪) *****  팔관재계(八關齋戒) ******등에

 

*팔정도(八正道) : 팔성통(八聖通) . 팔지정도(八支正道) . 팔성도분(八聖道分)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열반의 경지로 통하는 여덟 가지의 정확한 길을 말한다.  정견(正見) . 정사(正思) . 정어(正語) . 정업(正業) . 정명(正命) . 정정진(正精進) . 정념(正念) . 정정(正定)  이렇게 여덟 가지이다.

** 오온인연(五蘊因緣) : 오온(五蘊)은 오중(五衆) 혹은 오음(五陰)이라고도 하는데, 사람과 만물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 즉 색(色) . 수(受)  . 상(想 . 행(行) . 식(識) 등이다.  색온(色蘊)은 물질과 같은 개념이며, 수온(受蘊)은 외계 사물이  눈. 귀. 코. 혀. 몸 등에 작용하여 나타나는 감각이다.    상온(想蘊)은 이성 활동 혹은 개념 활동이며, 행온(行蘊)은 심령 활동 혹은 의지 활동이다.   식온(識蘊)은 처해 있는 경계에 따라  분별해낼 수 있는 마음의 작용이다.    오온은 불교의 전체 교의 중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분석하고 연구하는 대상이다.   오온에 대한 해석은  각 교파가 자신의 사상 체계를 확립하는 중요한 논거가 된다.

***십이인연(十二因緣) : 불교 명사로 십이연생(十二緣生) . 십이연기(十二緣起)라고도 부른다. 무명(無明) . 행(行) . 식(識) . 명색(名色) . 육처(六處) . 촉(觸) . 수(受) . 애(愛) . 취(取) . 유(有) . 생(生) . 노사(老死) 등의 12개의  고리가 돌아가며 원인에 감응하여 생긴 결과가 되기  때문에 인(因)이라 부르고 서로 조견이 되기 때문에 연(緣)이라 부른다.    십이인연은 중생의 생사의 인과 관계를 설명한 것으로 , 이는 생명 현상의 총괄인 동시에 속세  고통의 근원이다. 

**** 사무량심(四無量心) : 불가 용어로 사등심(四等心) . 사범주(四梵住) . 사범당(四梵堂)이라고도 한다.  보살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반드시 갖추어야 할 네 가지 마음,  즉 자(慈) . 비(悲) . 희(喜) . 사(捨)를 가리킨다.

***** 삼전십이법륜(三轉十二法輪) : 석가모니가 도를 깨친 후 녹야원(鹿野苑)에서 처음으로 다섯 명의 비구를 향해 사성제 . 팔정도 이론을 설법했는데, 서로 다른 각도에서 세 차례에  걸쳐 사체(四諦)를 설명했기 때문에 삼전십이법륜이라고 부른다.  일전(一轉 : 시전示轉)은 정면에서 사체를 긍정했는데, 이것이 바로 고체(苦諦) . 집체(集諦) . 멸체(滅諦) . 도체(道諦) 이다.     이전(二轉 : 권전勸轉)은 수행 중에 사체에 대해 취한 태도를 가리키는데, 고체당지(苦諦當知)) . 집체당단(集諦當斷) . 멸체당증(滅諦當證) . 도체당수(道諦當修)이다.   삼전(三轉 : 증전(證轉)은 사체가 이미 도달한 인식 혹은 수행에 대한 결과를 말하는데, 바로 고체이지(苦諦已知) . 집체이단(集諦已斷) .  멸체이증(滅諦已證) . 도체이수(道諦已修)이며, 이로부터 해탈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 팔관재계(八關齋戒) : 불교 명사로 팔재계(八齎戒)라고도 한다. 불교학자들은 출가하지 않은 남녀 신도는 세속적인 일에 얽매어 있기 때문에 매일 오계(五戒)를 지키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매월 6일씩 재일(齋日)을 정해놓고 일체의 육욕을 멀리하고 오계를 지키고, 아울러 어떤 오락 활동에도 참가하지 않고 자신을 치장하지 않으며, 넓고 화려한 침대에 앉거나 자지 않으며, 정오가 지난 뒤 밥을 먹지 않는 등의 삼계(三戒)를 더하면 합쳐 팔계(八戒)가 된다.  이 가운데 정오가 지난 뒤 밥을 먹지 않는다는 항목은 재(齋)이므로 팔관재계라 이름 하였다.

 

 

관한 말씀이 거의 날마다 행해졌다.  말년에 들어선 뒤에도 부처는 언제나 밖으로 나가 중생을 제도했다.

 어느 날  정사(精舍)*로 돌아온 부처는 모든 제자들을 모아놓고 마지막 설법을 행했다.   그리고 설법이 끝나자 엄숙하게 말씀하셨다.

 " 비구(比丘)**들아,  모여서 이뤄진 모든 것은 반드시 흩어진다. 세상에 영원불멸의 법신(法身)***은 없다. 그러나 법문(法門 : 중생을 열반에 들게 하는 문, 곧 부처의 가르침) 은 천고의 세월 동안 존속할 것이다.  그러니 정진하라. 앞으로 3개월 뒤에 내 육신은 떠날 것이다."

  부처를 봉행하던 제자 아난다(阿難陀)가 이 말씀을 듣고 문에 기대어 눈물을 흘렸다. 이에 부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자비로운 눈길로 아난다에게 말씀하셨다.

  " 아난다야, 그만 슬퍼하라.  내가 일찍이 말하지 않았느냐?  가깝고 친숙한

* 정사(精舍) : 불가 용어로 승려가 한마음으로 수행하는 것을 돕기 위해 제공된 숙소이며, 정진(정진)하는 숙소라는 의미로 사원(寺院)이다. '기원정사(祇園精舍)'라는 명칭에서 기원하였다.  기원정사는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 혹은 '승림급고독원(勝林給孤獨園)' 이 원래의 이름이며, 기원(祇園) 혹은  기원(祇洹)으로 줄여 부르기도 한다. 이것은 불교 역사상 제2의 사원으로 불조(佛祖)가 이곳에서 25년 간 설법했다.  중국 당나라 때에 고승 현장(玄奬) 이 인도에 갔을 때는 정사는 이미 훼손되었다.  후세에는 모든 사원을 기원이라 부른다.

 ** 비구(比丘) :  불교의 호칭으로 필추(苾芻) 혹은 비추(備芻)라고도 하며 의미는 남자 거지이다. 후에 출가하여 수행하는 남자 승려를 가리키게 되었다.   불교의 제도에 따르면 어려서 출가하여 처음 수계를 받으면 사미(沙彌)라고 불렀으며, 20세가 되어 다시 구족계(具足戒)를 받으면 비구가 되는 것이다.

승려가 되면 반드시 걸식을 해야 했기 때문에 이러한 호칭이 생기게 되었다.

 *** 법신(法身) : 불교에서 부처는 3개의 신(身)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법신(法身)으로 자성신(自性身) 혹은 법성신(法性身)이라고도 하는데, 항상 없어지지 않으며 사람마다 원래 가지고 있는 진성(眞性)으로 단지 우리 중생이 미혹되어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둘째는 보신(報身)으로 부처의 지혜와 공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법신이 원인이 되어 수습(修習)을 거쳐 불과신(佛果身)을 획득함을 가리킨다.  셋째는  응신(應身)으로 應化身 혹은 변화신(變化身)이라고도 하며 부처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중생의 처지에 따라 드러내는 각기 다른 형상을 가리킨다

 

모든 것과 헤어질 수밖에 없다고 아난다야,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반드시 소멸한다.* 그러니 내 육신이라고  사라지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런 것은  없다.   스승의 가르침은 끝났으며 이제 스승은 없다고 말하는 비구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라.  내가 떠나면 너희들에게 가르친 법과 계율을 스승으로 삼도록 하라.   이렇게 하면 내 법신과 혜명(慧命)**은 영생하게 되리라. "

 얼마 뒤 부처는 절을 떠나 제자 아난다와 함께 쿠시나가라로 갔다. 그들이  쿠시나가라 성 밖에 도착했을 때,  부처는 병이 나서 더 이상 걸어갈 수 없었다.  아난다는 부처를 두 그루 사라 나무 아래에 모시고 잠시 쉬시도록 했다. 부처는 깊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달빛이 온 천지를 비추는 밤에 부처께서 아난다에게 분부하셨다.

 " 오늘 저녁에 이곳에서 열반에 들겠다. 저 두 그루 사라 나무 사이에 머리를 북쪽으로 향하도록 자리를 깔아라 ."   아난다는 부처의 말씀을 듣고 황급히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여러 제자들이 소식을 듣고 달려와 마지막 부처의 말씀을 듣고자 했다.  그들은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며 계속 경배를 드렸다.

 아난다가 눈물을 닦고  부처 곁에 무릎을 끓고 앉았다. 아난다는 부처의 열반이 다가오자 다음과 같은 의문을 금할 수 없었다.    첫째,  부처가 적멸한 뒤 누구를 스승으로 삼을 것인가 ?      둘째 ,  어느 곳에 안주할 것인가?   셋째 , 못된  비구

 

* '제법실상(諸法實相),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의미이다. 불교에서는 우주의 모든 사물은 모두 인연으로  인해 화합되어 생겨나며 갖가지 조건에 제약을 받기 때문에 생성. 변화. 소멸의 과정 중에서 끊임없이 표류하여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고 생각한다(무상無常), 이것이 바로 '공(空)'  이며 또한 우주만물이 가지고 있는 절대 진리이다(실상實相).

**혜명(慧命) : 불가 용어로 부처의 지혜를 말한다.  법신은 지혜로 수명을 삼는데, 지혜의 명(命)이 일찍 끊어지면 법신의 몸도 없어지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 붙인 것이다.

 

들에게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넷째, 어떻게 결집해서 경전을 만들어 사람들이 믿게 만들 것인가?  이 네 가지는 아난다의 고민이자 모든 제자들의 걱정이었다. 이에 대한 부처의 답은 다음과 같았다.

 " 첫째, 계율을 스승으로 삼아라.

둘째 , 사염처(사염처: 도를 깨닫는 네 가지 방법. 곧 육신이 더럽다고 관하는 것, 명예. 재물 . 처자 따위가 모두 고통이라고 관하는 것, 마음을 변화무상한 번뇌로 관하는 것 ,   만유는 실체가 없으며 내가 가진 모든 것도 내 것이 아니라고 관하는 것을 말함)에 안주하라.

 셋째, 못된 비구에게는 말도 걸지말고 훈계도 하지 마라. 

넷째 , 모든 경전에 '나는 이렇게 들었다(如是我聞)' 라고 해서 사람들이 믿도록 하라. "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처는 말씀하셨다.

"비구들아, 모든 것은 변하는 성질을 지녔다. 방심하지 말고 정진하라."

부처는 마침내 이 말씀을 끝으로 열반에 드셨다. 인적이 끊긴 깊은 밤, 달빛이 흘러들어 자애롭고 평화로운 부처의 얼굴을 비추었다.  편안하게 감긴 두 눈은 더욱 그윽했다.  이렇게 부처는 열반의 경계로 드셨다.  때는 기원전 485년 2월 15일 자시(子時 : 밤 11시부터 오전 1시까지) 였다.

 당시 중국은 주(周)나라 목왕(穆王)이 통치하고 있었다.   [주서이기(周書異記)]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폭풍우가 몰아쳐 가옥이 부서지고 나무가 꺽였으며, 땅이 흔들리고 하늘이 어두운 가운데 서쪽 하늘에 흰 무지개가 나타났다.  ........ 태사(太史) 호다(扈多)가 말하기를, "서방의 성인이 멸적했다!" 고 했다.

 

영원한 인류의 스승인 석가모니가 열반에 드셨다. 바람을 타고 서천(西天)의 정토로 돌아가셨다. 세월이 흐른 뒤에 사람들은 석가모니가 이 세상에 남긴 것이 무엇인가 궁금해했다. 그러나 부처는 생전에 자신에 대한 말씀이나 교의를 어떻게 봉행해야 하는가에 관해 그다지 많은 말씀을 남기지 않으셨다.   이는 할 말이 없다거나 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석가모니가 본 것이 너무 많고 또한 말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또한 어떤 것들은 말로 전할 수 없는 것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부처가 열반한 뒤에 제자들이 부처의 말씀을 [화엄경] . [아함경] . [반야경] . [법화경] . [열반경]을 비롯한 1,460종 4,250권의 경전으로 정리했다. 그 가운데는 인생에 대한 심오한 탐구에서 생명에 대한 커다란 깨우침에 이르기까지, 또는 삶을 바르게 바라보는 법에서 견성성불(見性成佛) 하는 데에 이르기까지 온갖 지혜와 가르침이 담겨 있다.  마치 기름이 마르지 않는 지혜의 등불처럼 중생의 미망(迷妄)을 깨우쳐주는 것 같았다.

 뛰어난 지혜와 위대한 선견지명, 그리고 진실한 깨달음! 석가모니는 삶에 대한 선견지명뿐만 아니라 위대하고 탁월한 지혜와 창조력을 지닌 성인으로, 훗날 인류에게 단순히 종교적 영향뿐만 아니라 중요하고 진귀한 과학적 문화 유산을 남겨준 분이라고 할 수 있다.

부처께서 쿠시나가라 성 근처에 있는 사라 나무 아래에서 열반하셨다는 소식이 마가다 국의 수도인 라자그리하에  전해지자. 아자타 샤트루 왕은 물론이고 온 백성들이 비통에 잠겼다. 아자타샤트루 왕은 그날로 신하들을 거느리고 쿠시나가라 교외로 달려갔다. 아자타샤트루 왕과 신하들은 코끼리 수레에서 내려 부처의 시신 앞에 경배를 올렸다.   열반에 든 부처의 시신을 바라보던 아자타샤트루 왕은 비통함과 더불어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지난날 왕은 부처를 모함하는 데바닷타의 말만 믿고, 여러 차례 부처를 없애려고 음모를 꾀한 적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빔비사라 왕을 감옥에 가두고 왕위를 빼앗았던 것을 비롯해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 그러다가 부처의 인도에 따라 불문에 귀의(歸依)하고 선행을 베풀기 시작했던 것이다.

 갠지스 강이 유유히 흐르는 쿠시나가라 성 교외에 향목으로 쌓아올린 화장대가 마련됐다.   섬광처럼 불이 붙여지더니 금세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북풍이 크게 불면서 강물이 요동치고 불길이 더욱 거세졌다 . 불빛이 푸른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사방 천지를 밝혔다. 긴 시간이 흐른 뒤 부처의 시신을 감싸며 타오르던 불꽃이 서서히 식어갔다.    그리하여 제자들이 남은 재를 수습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재 속에서 다 타지 않은 손가락뼈와

 

2005년도 중국 법문사에서 서울로 모셨던 부처님의 손가락뼈 사리

 

 치아 4개,그리고 두개골의 일부와 반짝거리는 원주형 결정체들이 눈에 띄었다.  그 결정체들은 흰색 . 검은색 . 붉은색을 비롯한 가지각색의 빛을 띠었다. 세어보니 영롱한 진주 같은 것이 모두 8만 4천 개나 됐다.    기이한 성물을 앞에 두고 여러 제자들은 합장하면서 부처의 깊고 높은 도행에 깊이 감복했다. 그래서 제자들은 지극한 존경의 마음으로 이 알갱이들과 유물을 '사리'라고 이름붙이고, 금으로 장식한 항아리에 보존했다.

  위대한 부처가 극락 세계로 돌아가신 뒤에 남은 제자들은 텅 빈 듯한 허전함을 금할 수 없었다.     부처의 유언을 어떻게 좇을 것이며, 어디에서 무엇을 따라야 할 것인가?  남기신 말씀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기원전 484년 가을에 여러 비구 승단에서 선발된 고승 500명이 마가다 국의 수도인 라자그리하 교외에 있는 칠엽굴(七葉窟)에서 집회를 가졌다. 이를  제 1차 결집(結集)이라고 부른다. 이는 아자타샤트루 국왕이 하사한 경비로 이뤄진 불교계 고승들의 역사적인 첫 집회였다.

  이 집회에서 부처의 삶과 생전에 말씀하신 설교 내용을 정리하기 위해 암송과 논의가 거듭됐다. 부처의 십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마하카시아파가 회의를 주재했다 .  부처의 사촌동생이자  25년 동안 부처를 좇아 수행해서 '다문 제일(多聞第一)'이라는 별칭을 지닌 아난다는 주로 부처의 연설이나 설교 , 그 밖의 이야기를 암송하는 일을 맡았다.  다음으로 '지율제일(持律第一)'이라는 별칭을 지닌 우팔리는 부처가 일생 동안 말씀하신 지율을 암송하는 책임을 맡았다. 암송한 다음에는 여러 사람들의 질문과 논의를 거쳐 이의가 없을  경우 통과된 것으로 인정하고 부처의 말씀으로 승인하는 방식이 취해졌다.  이 가운데 아난다가 암송한 부분은 경(經)이 됐꼬, 우팔리가 암송한 부분은 율(律)이 됐으며, 이 밖에 부처의 사상을 해석하거나 설명한 내용들은 논(論)이 됐다.  나중에 이 회의에 참가한 500명의 승려들은 아라한이 됐다.  아라한이란 불교에서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른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세월이 흐른 뒤 중생들은 불교사원에 그들 500명의 아라한을 모시고 봉행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376년에 700명의 불교도들이 마가다 국의 바이샬리 성에서 제 2차 결집을 거행했다.   이 결집에서 포교를 하면서 금전이나 재물로 보시를 받을 수 있는가 여부를 놓고 설전이 벌어졌고, 급기야 이 문제를 두고 불교계는 보수파에 해당하는 상좌부(上座部)와 진보파에 속하는 대중부(大衆部)로 분열되고 말았다.   그 뒤 승단은 11개의 상좌부와 7개의 대중부로 구분됐다.

 기원전 253년에 불교도들은 또다시 마가다 국의 수도 파탈리푸트라의 계원사(鷄園寺)에서 제3차 결집을 거행했다. 거의 1천 명에 가까운 승려들이 참가 한 이 집회는 마우리아 왕조 아소카 국왕의 도움으로 이뤄졌다.

 아소카 왕은 어려서부터 생김새가 추하고 성격도 괴팍스러워서 부왕의 환심을 얻지 못했다. 아소카 왕의 어머니마저 왕과 거리를 둘 정도였다.  그러던 가운데 북인도의 한 수령이 반란을 일으키자 부왕은 즉시 아들에게 반란을 진압하라고 명했다. 누가 보아도 이는 자식을 죽음으로 내모는 일이었다.   다행히 적군에게 붙잡혀 죽지 않는다 하더라도, 구사일생 살아서 돌아와도 분명 패전의 책임을 물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궁궐을 나가본 적도 없던 열네 살 소년은 군대의 숫자나 장비가 크게 열세였는데도, 용감하게 싸워 마침내 반란을 평정했다.   이로써 아소카 왕은 조정과 백성들의 신망을 얻게 됐다.

  부왕이 승하하자 아소카 왕은 측근들과 더불어 내란을 일으켜 국가의 정권을 잡았다.     이 과정에서 101명의 형제 가운데 99명을 살해했다.   아소카 왕이 즉위하자 더 이상 대적할 만한 세력이 없었다.  대권을 손에 쥔 젊은 왕은 마침내 인도를 통일하겠다는 야심찬 뜻을 품고, 마지막으로 칼링가 국을 정벌하러 나섰다.

 아소카 왕의 대군은 파죽지세로 칼링가 국으로 쳐들어갔다.  10만 보병과 5만 기병, 그리고 400대의 전차와 500마리로 이뤄진 코끼리 부대는 자욱한 먼지 속에서 칼링가를 짓밟기 시작했다.   양군이 맞붙자 사방에서 칼날이 번뜩이고 죽은 시체가 산처럼 쌓였으며, 흘린 피가 강처럼 흐르고 해골이 곳곳에 나뒹굴었다.   아소카 왕의 군대는 칼링가 군사 10만 명을 죽였고,  15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    성마다 불을 질렀으며 온갖 금은보화를 약탈했다.   사로잡힌 칼링가 왕은 적군의 감옥에서 자살하고 말았다.

  아소카 왕은 이로써 칼링가 국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었다. 그런데 한편으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소카 왕은 전쟁을 통해 자기 나라를 지키려는 칼링가 백성들의 저항 정신을 보았다.  무력으로 백성과 나라를 정복할 수는 있지만 백성들의 마음까지 얻을 수 없음도 깨달았다. 그리하여 전쟁으로 인한 비참함과 죄악을 절실하게 느낀 아소카 왕은 심한 죄책감을 느꼈다.    마침내 진정한 승리는 법(진리)에 의한 승리임을 깨달았다.

  정벌에서 돌아온 뒤 아소카 왕은 칼링가에 신하를 파견해서 백성들을 위로 함으로써 그들에게 참회와 화해의 마음을 전했다.  그 뒤 아소카 왕은 차츰 불교 사상의 교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불교를 인도의 국교(國敎)로  선포하고 깨달음을 전하기 위해 비석을 세웠다.

 아소카 왕은 계속해서 수많은 불교 유적을 순례했으며,  가장 성대했던 제3차 결집을 시행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줬다.   제 3차 결집은 그 규모가 방대했을 뿐만 아니라,   그 의미 또한 불교 역사상 매우 중요했다.

  당시 분열된 불교계는 부처의 교의에 대해서 각기 나름의 해석을 하고 있었는데, 이 결집에서 기존의 경 . 율 . 논을 모아 [삼장(三藏)]을 편찬했다. 무려 9개월 동안의 회의에서 이뤄진 각종 논쟁을 500가지로 귀납해서 전체 1천 조(條)라는 책으로 정리했다. 마지막으로 아소카 왕이 제안하고 승려들이 동의하여, 대반열반당(大般涅槃堂)에 있던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꺼내 8만 4천 개로 나눴다.   그리하여 승려와 신도들에게 이 사리와 불경을 들고 국내뿐만 아니라 외국까지 포교하도록 했다.

  기원전 240년 석리방(釋利房)을 비롯한 사문 18명이 19개의 석가모니 진신 사리를 담은 보석함을 돌고, 긴 세월 동안 혹독한 시련을 겪으면서 중국 땅으로 들어왔다.   이때부터 부처의 밝은 빛이 동쪽 대지를 비추기 시작하면서, 영원불멸의 성자가 주원 땅에 우뚝 솟은 법문사와 오랜 세월 같이하게 된 것이다.

 

부처님의 날을 맞아 다시한 번 부처님을 생각하며 이글을 옮겼습니다

출처: 법문사의 불지사리

지은이 웨난. 상청융 지음 /  심규호 유소영 번역

부처님의 사리가  중국에 전해지며 있었던 고난과 시련 그리고 중국 왕들의 불교에 대한 믿음과 훼불 등에 관해 잘 기록된 책으로  2005년 당시 잠실체육관  내에서 불지사리 참배 할 수 있는 기회가 왔을때 사리 참배후 그곳에서 구입한 책 읽으며 3일동안 기쁨과 슬픔 속에서 카타르시스를 맛보며 부처님의 위대함에 더욱 신심을 가질 수 있었던 책이고   너무 좋아 주변인들에게 사주기도 했었고 읽어보라고 권유했던 책이기도 합니다

 

 

법문사 지하궁에서 나온  불지사리에 관한 유물들 보시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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