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여행

중국 면산 개자추의 개공사당과 등신불을 모신 정과사

백합사랑 2014. 9. 11. 21:11

산시성 면산 , 우리가 山위 숙박을 한 호텔- 기둥에 용이 승천하는듯~ 

노루귀님의 면산 사진을 보고 기대를 많이하고 갔는데,  어제까지 멀쩡하던 하늘이 하필 새벽부터 비가 쏟아집니다.  우비야 가지고 갔지만 일행모두 한 숨입니다

내가 너무 완벽한 준비를 했다고 나보고 대표로 관광하고 오랍니다. 본인들은 1천원짜리 입었다가 벗으면 찢어지는 우비를 사입었다고 ㅎㅎ

 

호텔 1층에 바로 붙은 식당

 

현지식으로  종류도 많은데 어제 늦게 자고 비도오고  한심한지? 모두들 식사를 못합니다

 

썩힌 두부라고해서 조금 떼어먹어보니 어찌나 짠지~

 

비가 내려도 시간은 흐르니까 관광버스를 타고 ~~  하차할 때쯤은 제발 그쳐다오!

 

하늘도 여행자의 마음을 이해했는지?  비가 조금 멈춤니다.   매표소도 운치있고 멋집니다 이문을 통해서 굴속으로 조금 걸어가면 엘리베이터가 나옵니다

이곳은 면산 서현곡 관광구입니다

면산은 아찔한 산세와 깊은 협곡이 신비로운  해발 2000m위 깍아지른 절벽에 세워진 사찰들과  개자추 사당이 있는,    중국 역사 속에서도 의미가 깊은 곳으로,

중국의 절개라 불리는 진국(晉國)의 충신 '개자추(介子推)'와 한식이 이곳에서 유래되었습니다 .  해발 2,072m 산 정상에 개자추  모자를 기리는 사당이 있는데 이곳에 인간계와 선계(仙界)의 경계 같이 보이는 하늘 도시가 건설 된 곳입니다

 

 

봉후정 앞

봉후정은 북송원풍원년 (1078년)에 송신종은 도성에 가믐이 들자 하늘에 비를 구하였는데 개공은 나타나 중원대지를 은택하게 하였다.  신종은 개자추를 길혜후로 추가봉하였고 재상 문언박을 면산에 파견하여 칙봉하게 하였으며 이정자를 건축하였다.

 

 문공멱현처

개자추가 분신한 다음해 진문공이 면산에 와서 개자추를 위하여 성묘하였다.   일행이 서현곡을 따라 올라가다가 개자추가 이 동굴에서 좌선하며 수행하였다 함을 듣고 동굴안에서 조용히 앉아  깊이 사색하면서 어진 신하를 그리워하였다.   후세 사람들이 이곳을 문공멱현처라고 불렀다

-옮긴글

사실 이 글이 오른쪽 파란천옆에 돌문같은 곳이 보이는데 그곳에 간판이 붙어 있었는데 들여다보니 쓰래기 같은 것이 있었는데

그곳을 말하는 것인지?  계단위의 곡현루를 들어가서 있는 것인지? ㅎㅎ

 

뒷쪽에서 본 봉후정

전설에 의하면 개자추가 어머니와 함께 은거하러 갈때 이곳을 거쳐갔다고 한다.  천년동안 개자추의 "충성하고 효도하며 깨끗하고 강직한"  위대한 인격과 공로를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공헌 정신은 역대왕조의 무수한 무인과 아사들이 추앙을 받았고 서현곡은 현인을 찾고 성인을 방문하는 곳이 되었으며 심신을 수양하는 성인의 자취가 있는 한적한 곳이 되었다.

 

봉후정 안에는 비석이 있습니다

 

엘리베이터 내린 곳

 

마구 쏟아지던 비는 그치고 물안개가 산을 덮었다 흩어졌다를 반복합니다

개자추와 그의 어머니를 모신 개공사당 입구

비가와서 걱정을 했던 것은 잠시고 산을 덮었다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구름떼에  모두들 카메라를 꺼내듭니다.

 

앞에 보이는 건물 중 황금문을 '소덕문'이라 하는데 이 문은 당나라 개원 11년(723년)에 매조국(오늘의 베트남) 왕자 매숙난이 자금을 투자하여 수리 건설하였다  당나라 개원 11년에 매숙난은 당나라에 조공을 바친 이후 면산을 유람하고 이 문을 건설하였다 이 문은 금강경 모양으로서 전형적인 동남아 소괴불교의 풍격이다.   송신종 원풍원년(1078년)에 재상 문언박이 황제의 명을 받고 개자추를 "결혜후"로 봉하고 " 소덕" 액자를 이곳에 걸어 놓았다.

 

소덕문

 

문안에 있는 벽화

 

개자추 탄생후 이름을 얻은 모습

 

개공사당 가는 회랑에서

 

사진작가 황선생님께서 찍어서 보내주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바위 안에 지은 개공사당

 개공사당 - 천하제일 石窟廟라고  설명 되어 있네요

 

 개자추님!

진나라 왕자 중이(中耳)가 권력의 암수를 피하여 19년간 유망하던 시기에 그와 함께 하던 중신 개자추와 그의 어머니를 모신 사당으로 훗날 청명절 직전의 3일 기간을 찬 음식만을 먹는 한식(寒食)의 기원이 되었답니다

긴 이야기가 있지만 생략하고 (중이가 개자추의 죽음을 슬퍼하며 300일간 음식을 익히지 말고 생음식만 먹게하자 여론에 의해 다시 익혀먹되 1년에 3일은 찬음시기 먹는 유래,  청명절은  황제중이가 죽은 개자추를 기리기 위해 개자추집앞에 버드나무를 베어다가 나막신을 만들어 신었는데 후에 가보니 버드나무가 다시 파랗게 싹이나고 살아 있음을 보고 청명절이라 하였다 함.   

또한 -개자추가 중이를 따라 다닐때 먹을 것이 없자 개자추 엉덩이 살을 떼어 고기국을 만들어서 중이에게 바친 충신 그러나 후에 중이가 왕이 된후 끝까지 모신 신하 5명은 모른체 하고 자기 친족들만 등용함을 보고 개자추 고향 어머니를 찾아가  모시고 살고 있다가 어느날 시를 지어 퍼뜨렸는데 ' 옛날 어느 나라에 용이 한 마리 있었고 그 밑이 뱀이 5마리 있었는데 그 중 한 마리가 죽었네~'   그 시가 돌고돌아 임금 귀에까지 들어가자 중이는 그시가 자기와 개자추라는 것을  깨닫고 개자추를 찾아 갖지만 개자추는 면산으로 피하여 살며 나오지 않자 임금은 개자추를 나오게 하기 위해   면산에 불을 지르되 3면만 불을 지르고 한 쪽은 남겨 두라고 하였는데 중이 곁에 간신이 4면에 다 불을 질러서 나오지 못하고 죽었다함 죽은 후에 보니 개자추는 어머니를 감싸안고 있었다함 

불을 내게한 이유는 개자추가 효자라서 불을 내면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뛰쳐 나올 것이라 생각하고 ~~

개자추의 효심과 충성심을 교훈으로 삼기  위해 그후 많은  왕족들 중신들은  은 면산을 방문하여 교훈을 배웠고, 지금도 면산에서 1년에 한 번씩 당 지도자들  모임을 갖는다고 합니다  )

사람들이나 제자들이  개자추에게 '당신을 버린 임금을 왜 그렇게 섬기느냐'며 말려도 개자추는 나는 임금님보다 백성을 위해서라고 하였답니다

개자추 사당 벽에는  입체적으로 그의 이야기를 만들어 두었습니다

 

 

다시 정과사(正果寺)로 발길을 옮깁니다

정과사(는 불교와 도교가 함께 하는 사원)를 가는 길에 오루사라는 절이 있는데 아주 작아서 정과사에 속한 절인지?

개별 절인지? 궁금하고 들어가보고싶지만 일행이 앞서고 있기 때문에 지체할 수가 없어서 ~

 

암벽에 불상을 모셨네요.

 

정과사의  영응탑

正果寺는 포골진신상(抱骨眞身像)을 모신 절입니다

옛 중국에는 지극히 수행이 높은 고승이 열반에 들어가시기 직전에 금식은 물론 물도 한 모금 안 마시고 앉아서 열반 좌화 하신다고 전해집니다 .  스님이 앉아서 원적하신 후 신체가 무너지지 않고 곧게 앉은채로 그대로 계시면 바른 수련의 결과의 과실-정과(正果)를 이 현세에 남기셨다고 하여 그 유체에 진흙을 발라 말린 후 생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채색을 하여 모셨습니다

한인가운데 성불한 첫사람 전지초는 무덕5년에 면산에 온 후 오용형제가 불교에 귀의하였다.   지초는 오용형제를 파견하여 윤번으로 당직을  서서 구름을 펴고 비를 내려가뭄을 해결하게 하였는데 오용은 나이가 어려 놀음에 탐내 비를 제때에 내리지 못하였다.    지초는 오용을 벌하여 십일동안 물을 통하게 하였고  그후부터 오용은  회개하여 새롭게 됨으로 직책에 충실하였다.

법당옆에는 작은 소가 있는데 그소를 후세사람들은 ' 伏龍泉'이라 하였다 합니다.  그래서 법당을 오를때 용의 중간(빨간띠가 매어진 것이 용모형-  빨간띠는 소원을 적은 소원글인것 같습니다)을 통해 가게 되어있나 봅니다 . 요즘 법당주변 공사로 옆으로 겨우 들어갔습니다

 

 

북위 시대 담난의 조각상

正果殿(佛) 소개

정과전은 불교계의 기적으로 불리우는 8명의 고승 "진신사리"를 공양하고 있다.   천년이되지만 근골이 끊어지지 않고 영기가 흩어지지 않아  " 포골진신" 이라한다. 가운데는 북위의 정토 숭배 창시자 담난의 조각상이 있고  양쪽에는 당사본, 회덕,  사현,  송지현, 명철, 김보흠, 원신원, 원공등이 포골신상이 있다.

 

 

정과사는 포골진신상(抱骨眞身像)을 모신 절로 옛 중국에는 지극히 수행이 높은 고승이 열반에 들어가시기 직전에 금식은 물론 물도 한 모금 안 마시고 앉아서 열반 좌하 하신다고 전해집니다. 스님이 앉아서 원적하신 후 신체가 무너지지 않고 곧계 앉은체로 그대로 계시면 바른 수련의 결과의 과실- 정과(正果)를 이 현세에 남기셨다고 하여 그 유체에 진흙을 발라 말린 후 생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채색을 하여 모셨습니다

 

唐思本佛

唐思本佛의 사리

正果寺에는 8분의 포골진신상이 계신데 한 분 한 분 모셔놓았습니다

그곳에 계신 스님 한 분께서 일일이 포골상의 속살을 보여주시고 설명도 해주시고 思本佛의   사리까지 보여주십니다

 

釋師顯佛

어떤 포골상은 어깨의 살 어떤분은 무릎살 어떤 분은 뼈까지 볼 수 있도록 흙을 파놓고 흙속의 살을 보여주십니다

정과사에 포골진신상이 8분이 계시니까 도교사원에도 4분을 해 놓았는데 그분들은 가짜랍니다

 

 

 

영응탑에는 들어갈 수 없다하여 들어가보지 못했습니다

 

정과사를 나와 다시 한치앞도 잘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  Z길 제트자 같이 생긴 계단을 걸어서 운봉사를 갑니다  이 길이 멋지다고 걸어보라는데 앞이 않보이니 ~  않보여서 무섭진 않지만 멋지다는 느낌은 못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