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시장에 갔더니 감자부침을 판다 맛이 있어서 12원어치나 샀다
팥죽도 맛이 좋다 찰떡도 많이 있고 10원정도 했던것 같다
어제 백두산이랑 장백폭포 가느라고 고생했으니 오늘은 느즈막하게 일어나자고 기상시간을 8시로 정했지만 며칠을 3~ 4시에 일어나던 습관 때문에 오래 자지도 못하고 일찍 일어났다
시내버스인지를 타고 용정중학을 찾아나섰다
도착하자마다 화장실을 찾았지만 보이질 않아 초시(시장)안에 네일아트집에 들어가서 아가씨에게 부탁을 했더니 흔쾌히 자기집 화장실을 내준다 고마웠다
물어물어 용정중학교를 찾았다
용정중학교는 (구 대성중학교)
민족시인 윤동주시인이 다녔던 학교로, 현재는 용정제일중학교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실제로 학생들이 이 곳에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단 신관과 구관으로 나뉘어져, 구관 앞에는 그의 대표적인 시 <서시>가 새겨져 있는 " 윤동주 시비" 가 세워져 있으며, 건물 2층에는 기념전시관이 꾸며져 있습니다.
윤동주님의 시비가 보인다
건물안에 윤동주님의 역사 기록이 사진으로 전시되어 있다
윤동주님 상앞에서 ~
안중근 의거
안중근 의사는 황해도 해주 출신의 교육가이자 의병장으로 ,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귀국 후 학교 경영에 전념하다가 1907년 연변을 거쳐 러시아 연해주로 건너갔으며, 1908년에는 대한의군참모중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국민회, 일심회, 단지동맹 등을 조직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다가 1909년 10월 우덕순, 조도선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처단을 계획하고 하얼빈 역에서 이토히로부미를 처단하였다. 이후 재판과정에서도 민족영웅으로서의 당당한 태도를 잃지 않았으며 1910년 3월 26일 려순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우린 여순감옥도 가보고싶었지만 이번엔 기회가 되질 않았다
순국 이틀 전 두 아우에게 유언하는 안중군
어려운 시절엔 정말 영웅도 많았던것 같다 저분들이 안계셨다면 지금 우리는 ???
감사함을 전합니다!
모두 내가 모르는 분이지만 이름이라도 들어본 김좌진 장군의 사진도 있다
1931년 9월 18일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중국공산당은 즉각 (항일구국선언)을 발표하여 동북에 거주하는 여러 민족에게 일치단결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연변에 거주하던 조선족들은 추수투쟁 춘황투쟁 등 반제반봉건투쟁을 적극 추천하였으며, 이를 토대로 연길, 화룡, 훈춘, 왕청 등 4개 지역에 항일유격대대를 창설하여 본격적인 항일유격투쟁을 전개하였다.
그후 조선공산주의자들을 비롯한 동북지역 조선족들은 중국공산당에 령도하는 동북항일련군에 적극 참가하였으며 동북지역 반파시스통일전선의 형성때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특히 일본군과 만주군 수백 명을 섬멸한 안도현 대사하전투, 악명 높은 일본군 마에다 토벌대 120여 명을 전멸시킨 화룡현 홍기하전투 등에서 빛나는 전과를 거두며 항일무장 투쟁을 새로운 고조에로 이끌어 갔다.
오른쪽 사진 맨 오른쪽 사람이 윤동주님 그리고 뒷줄 가운데분이 문익환님
윤동주님의 중학시절 습작노트
윤동주님의 생가도 가보고싶었지만 거리가 멀다하여서 아쉽지만 생략했다
항일시인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지금의 룡정시지신진 명동촌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명동학교와 은진학교, 평양숭실학교, 연희전문학교 등을 거치면서 식민지 현실을 꿰뚫는 날카로운 시대인식을 키워나갔다. 그는 식민지 지식인의 불안과 절망, 그리고 광복을 기다리는 간절한 소망을 문학적으로 승화시켜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 그 중 대표작 [서시]를 비롯한 여러 작품들은 아직도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차분하고 부드러운 성격의 투철한 항일민족의식을 소유한 윤동주는 일본 류학중 사상범으로 투옥되어 꿈에 그리던 광복을 앞둔 1945년 2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안타깝게 순국하였다 .
문익한 목사님과 라운규님의 사진들
보재 이상설 선생님
상소문
엎드려서 아뢰옵니다. 신이 어제 새벽 정부에서 일본과 조약을 체결하여 마침 조인까지 했다는 소식을 듣고 천하의 일을 다시 어찌할 수 없구나 하고 집에 돌아와 다만 슬피 울며 힘써 자정하기를 도모하고자 상소하여 면직을 바랐습니다. 이제 듣자오니 그 조약이 아직 인준을 거치지 아니하였다
하오니 신의 마음에 가득 찬 위행이옵고 국가지계로서 아직 해볼만한 길이 틔어있구나 하고 기뻐하였습니다.
대저 그 조약이란 인준해도 나라는 망하고 인준을 아니 해도 나라는 또한 망합니다.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할 ......
전시관을 나오면 한 쪽에 윤동주님의 시책이나 그밖의 책들이 전시되어있다
1층으로 내려오니 윤동주 교실이 따로 있다
윤동주교실
용정중학교 견학을 끝내고 용정을 가기 위해 사람들에게 물어도 모른다하고 인력거도 타볼겸 가는데 얼마냐고 하니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3원씩이라고 말해줬는데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안 그들은 금방 가격을 높여 부른다 그곳까지 가는데 5원이라고 한다 . 우리는 세팀으로 나뉘어서 5원씩 주고 가기로했다
용정에 도착
용정(龍井)은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중부에 위치하며, 두만강의 지류인 해란강(海蘭江)이 시내를 가로질러 흐른다.
우물의 유래가 적힌 표지석
클릭하면 크게 보입니다!
우물이 있는 공원에는 어르신들이 모여서 화투나 장기를 하고 계신다 이동네서 제일 맛있는 냉면집이 어디냐고 여쭈었더니 모두들 투도마다매식당이라고 알려주신다
찾아온 투도마다매식당, 냉면집
한그릇 15원인데 시원하고 맛이 진짜 좋다!
시원한 냉면을 먹었으니 다시 여행에 나선다. 이번엔 일송정을 찾아나섰다 2번 버스를 타라고 인터넷과 친구에게까지 전화해서 알려준 조선족 젊은분 어디가나 고마운 분들은 많이 있다.
2번 중에도 비암산(우리식 발음은 벽암산 碧岩山에 가는 버스여야만 된다고 알려준다
버스 안에서 멀리 일송정이 있는 정자가 보인다
일송정이라는 표지석이 있는 곳에 도착. 반가왔는데 열심히 중국어 연습하시는 윤선생님 현지 중국인에게 말을 걸어 물었더니 학생들과 함께 방문하신 어느 대학교 교수라는 한족분이 친절하게도 이곳의 일송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일송이 아니고 조금 더 올라가면 그 자리에 새로운 나무가 한그루 있다고 알려준다
사진 왼쪽에 있는 일송은 1999년에 GS 칼텍스 회장 허동수님과 산하 직원들이 심은 것이다고 표지석이 있다
나무를 심어만 놓고 돌보질 않아서 힘이 없고 늙어보인다
일송정 표지석 뒷편에는 일송정의 노랫말이 있다
멀리 보이는 정자 곁에 한그루의 소나무가 옛날의 일송을 대신해 서있는 일송정~
진짜 일송정이 있던 곳을 가기 위해 가져온 과일을 먹으며 잠시 쉬기로
일송정
이곳에 다시 심은 일송정의 유래가 적혀있다
復原記
碧岩山(一松亭)은 原來 亭子모양의 한그루 소나무로서 龍井八景의 하나였다. 이 소나무는 日帝에 의하여 1938년에 죽었다고 전해왔다. 龍井市人民政府에서는 한국 卞景燮局長, 김재천총재, 李承來사장의 후원으로 1991년 3월 12일 소나무를 다시 심고, 그해 9월 3일 亭子新建工事를 준공하였다.
이후 정자 확건과 보수공사에 한국 김서곤 허정남 김광희 박일남 유호담 김교봉 조일형 임종문 이상옥 황규흠 조재만 박응준 선생 등이 협찬하였다.
2001년 9월 3일
龍井市人民政府
혹시 읽고 싶은분을 위해 옮겨 적었음
일송정이 있던 자리에 대신 서있는 일송정!
일송정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된 유래는 비암산 정상에 우뚝 선 한그루의 소나무로, 그 모양이 정자처럼 생겼다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이 나무를 보기 위해 왔으니 기대도 보고 ~
일송정이 있는 정자에서 내려다 보이는 곳 멀리 보이는 강줄기가 해란강(海蘭江)이라고
해란강은 두만강 지류로 선구자에서 언급된 용정지역의 강으로 해란강 주변의 들판이 우리 민족이 간도 지방에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이기도 합니다
일송이 있는 일송정
이곳에 온 한국인들은 모두 일송정 노래를 부르고 싶은가보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는데 어떤 한무리의 여행객들은 열심히 부르고 있었다.
일송정을 내려와 버스를 타고 내려서 연길에 유명하다는 모아산을 찾는데 어떤 분에게 물었더니 길을 알려준다.
우린 그쪽으로 계속 가고 있는데 차 한대가 오더니 아까 길을 반대로 잘못 알려줘서 미안하다며 자기들이 데려다 주겠다고 타라고 한다 .
조선족인지? 북한말씨가 뚜렸하였지만 친절하게 알려주고 태워줘서 고마웠다
우리 일행이 직업을 물었더니 여자분 직업이 연길 법원에서 일한다고 알려준다
연길 모아산
멋진 탑과 특이한 것이 있어서 무엇인가 했더니 화장실이 그렇게 멋졌다. 하지만 겉과 달리 내부엔 물이 안나와서 불편을 주고 있었다.
모아산에 온 기념사진
구경을 마치고 저녁을 뭘먹을까 생각하다가 우리가 묶는 호텔 바로 아래에 연길 방식대로 이름이 '개탕' 집인 곳이 있어서 들어갔다 . 난 못먹어서 청국장을 시켰는데 맛은 비슷하지만 콩이 그대로 이고 우리것보다 덜 맛있었다.
호텔에 들어가는 길에 문화예술극장앞 광장에서 주민들 저녁춤 추고 있는 모습들을 찍어봤는데 어찌나 잘들 추는지 재미있게 지켜봤다.
'중국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심양고궁을 찾아 갔다 (0) | 2015.08.02 |
---|---|
아시아에서 5번째로 큰절이라는 육정산 정각사를 찾아서 (0) | 2015.08.02 |
장백폭포 (0) | 2015.08.02 |
장백산(백두산)을 오르다! (0) | 2015.08.02 |
경박협곡 (0) | 2015.08.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