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태백산을 향해서

백합사랑 2016. 1. 3. 11:30

몇 번째 가는 단종대왕의 애환이 서린 청령포 

청령포 가는 입구에 생긴 매표소와 홍보관 건물앞에 저 사람 형상은 누굴 의미하는지?

 

청령포

멀리 단종대왕 어소가 있는 소나무숲이 보인다

청령포는 국가지정 명승 제 50호(육지 속의 작은 섬)

조선 제6대 왕인 단종은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상왕으로 있다가 1456년 박팽년, 성삼문 등 사육신들의 상왕복위의 움직임이 사전에 누설되어 모두 죽음을 당하는 사육신사건이 일어나고 다음해인 1457년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첨지중추원사 어득해가 거느리는 군졸 50인의 호위를 받으며 원주, 주천을 거쳐 이곳 청령포에 유배되었다.  

청령포는 동, 남, 북 삼면이 물로 둘러싸이고 서쪽으로는 육육봉이라 불리는 험준한 암벽이 솟아있어 나룻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밖으로 출입할  수 없는 마치 섬과도 같은 곳이다.

단종은 이 적막한 곳에서 외부와 두절된 유배생활을 했으며, 당시에는 이곳에 거처할 수 있는 집이 있어 호장 엄흥도는 남몰래 밤이면 이곳을 찾아 문안을 드렸다고 전한다.

그 해 뜻밖의 큰 홍수로 강물이 범람하여 청령포가 물에 잠기게 되니 단종은 영월 동헌의 객사인 관풍헌으로 처소를 옮겼다.

지금 청령포에는 영조 2년(1726)에 세운 금표비와 영조 39년(1763)에 세운 단묘재본부시유지비가 서 있어 옛일을 전하고 있다..

예전엔 메밀꽃이 있었는데 지금은 관리소와 홍보관이 그자리를 지킨다

오른쪽에 소나무 단종어소를 향해 절을 하는 모습이다.

 

 

단묘재본부시유지비(端廟在本府時遺址碑)

이곳은 1457년 6월 22일  조선왕조(朝鮮王朝) 제 6대 임금인 단종대왕(端宗大王)께서 왕위를 찬탈 당하고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 유배(流配)되어 계셨던 곳으로 당시 이곳에 단종대왕 거쳐(居處)인 어소(御所)가 있었으나 소실(消失)되고 영조39년(1763)에 이 비(碑)를 세워 어소위치(御所位置)를 전하고 있다.

비의 총 높이는 162cm로서 1단의 화강석 기단(基壇)위에 오석으로 된 비신(碑身)을 세우고 비 앞면에는 [단묘재본부시유지(端廟在本府時遺址)]라고 음각되었으며  후면에는 [세황명숭정무진기원후삼계미계추 체경서영원영수석 지명 청령포(歲皇明崇禎戊辰紀元後三癸未季秋  涕敬書令原營竪石 地名 淸泠浦)]로 음각되어 전면, 측면 각 1칸씩의 비각(碑閣)안에 보존(保存) 되어 있다.

 

 

단종어소(端宗御所)

단종어소는 승정원일기의 기록에 따라 기와집으로 그 당시의 모습을 재현하였다.

어소에는 당시 단종이 머물던 본채와 궁녀 및 관노들이 기거하던 행랑채가 있으며 밀남인형으로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어소 담장 안에 단종유지비각(端宗遺址碑閣)이 위치해 있다.

 

소나무 사이로 멀리 보이는 소나무숲은 왕방연의 시조비가 있는 곳이라는데 시간이 모자라서 가보지는 못했다  다음에 시간되면 가봐야겠다

왕방연이 관록을 먹는 금부도사인 관계로 단종을 처단하게 된 것에 가슴아파 하며 저 숲아래 흐르는 물을 보며 탄식하고 지은시비가 있고 그는 그 시를 짓고 한양에 올라와 벼슬을 내놓고 살았다고 한다.

언제 들어도 단종애사는 가슴 아프다.

 

왕방연의 시조비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서  울어 밤길 예 놋다 "

금부도사 왕방연이 단종께 사약을 진어하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비통한 심정으로 청령포를 바라보면서 읊은 시조이다.

금표비  비석에는   [淸泠浦 禁標 ] 라고  쓰여 있고,  뒷면에는 [東西三百尺 南北四百九十尺  此後 泥生亦在當禁] (동서로 300척 남북으로 490척과 이후에 진흙이 쌓여 생기는 곳도 또한 금지하는데 해당된다)]이라 쓰여 있으며 측면에는 [ 崇禎九十九年] 이라고 음각되어 있다.

우리가 이곳에 도착했을때 다른 팀을 위한 해설사님의 해설이 있어서 우리팀도 열심히 따라 다니며 들었다.

 

금표비(禁標碑)

금표비(禁標碑)는 단종(端宗)께서 1457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 유배되어 계시던 이곳을 일반 백성들의 출입과 행동을 제한하기 위하여 영조(영조)2년(1726)에 세운 비석이다.

뒷면에 [동서 삼백척 남북 사백구십척 차후 니생역재당금숭정구십구년[東西三百尺 南北四百九十尺  此後 泥生亦在當禁 崇禎九十九年] 이라 음각되어 있는데, 이 뜻은 [동서로 300척 남북으로 490척과 , 이후에 진흙이 쌓여 생기는 곳도 또한 금지하는데 해당된다.  숭정 99년] 이라는 내용으로 , 당시 단종에게도 이와 같은 제약(制約)이 있었을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관음송  국가지정 천연기념물 제 349호

청령포 수림지에 위치하고 있는 소나무로 단종 유배시의 설화를 간직하고 있으며 1988년 천연기념물 제 349호로 지정되었다.

단종이 유배생활을 할 때 두 갈래로 갈라진 이 소나무에 걸터앉아 쉬엇다는 전설이 있다.   또한 단종의 유배 당시 모습을 보았으며(觀), 때로는 오열하는 소리를 들었다(音)는 뜻에서 관음송(觀音松)이라 불리어 왔다.  소나무 크기는 높이 30m , 둘레 5m로 지상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 동, 서로 비스듬히 자랐다.    수령은 600년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단종 유배시의 수령을 약 60년생으로 추정하고 있다.

꼭대기쯤에 보이는 작은 소나무숲사이 노산대와 단종이 쌓은 망향탑

청령포 뒷산 육육봉(六六峯)과 노산대(魯山臺)사이 층암절벽 위에 있는 탑으로 단종대왕이  유배생활을 할 때 자신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근심속에서도 한양에 두고 온 왕비ㅣ 송씨를 생각하며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막돌을 주워 쌓아 올렸다는 탑으로 단종이 남긴 유일한 유적이다.

 

노산대(魯山臺) : 단종이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청령포로 유배된 후 해질 무렵 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던 곳이므로 노산대라 부르고 있다.

 

 

관음송을 머리끝에서 뿌리부분까지 잘좀 찍어보려면 시야가 잘 않된다 .그런데 이곳에선 앞에 가리는 나무가 있긴 하지만 그런대로 다 보이는것 같아서 한 번 찍어본다

청령포 수림지(천년의 숲 지정) 

수림지에서 보이는 단종어소와   단묘재본부시유지비 그리고 초가가 슬픈 아픔이 있는 곳이지만 아름답게 보인다

 

왕방연시조비가 있는 숲

 

우리는 점심을 먹기 위해 영월로 향한다. 가는 길 다리밑 강에는 사람들이 ~~

곤드레 밥이라는데 정말 맛있게 먹었다   저녁도 못먹을 정도로 ~~

그런데 밥 한그릇 더 시키면 4천원 곤드레밥이라 비싼가보다.

 

밥을 맛있게 먹었기에 다음에 가면 찾아보려고 전화번호를 찍어왔다

 

  우리나라 유일한 한옥역사로 유명한 영월역사

기차에서 보이는 저곳은 아마도 매봉산 풍력발전 단지인것 같다

 

내가 앉은 쪽은 산이 붙어 있어서 별 풍경이 없는데 옆쪽에 보이는 풍경이 아름답다

 

태백역 도착

낙동강의 발원지라는 황지연못을 찾아 나섰다

 

黃池는 낙동강 始發지랍니다.    " 落東江 千三百里 예서부터 시작되다"

황지

이 곳은 옛 신라와 가야의 문화를 꽃 피우며 이 겨레와 숨결을 같이 한 낙동강 1300리의 발원지이다 전설에 따르면 이 연못은 옛날 황부자의 집터였는데 어느날  노승이 시주를 청하자 외양간을 치고있던 인색한 황부자는 시주대신 두엄 한 가래를 퍼 주었다고 한다. 이를 본 며느리가  시주를 물리며 용서를 빌자 이 집은 운이 다 했으니 어떠한 일이 있어도

뒤돌아보지 말고 따라오라는  말에 며느리는 노승을 따라가다가  뇌성벽력이 치는 소리에 깜짝놀라 노승의 당부를 잊은 채 뒤돌아보는 순간 아기를 업은 며느리는 돌이 되어 버렸고 집터는 연못으로 변해 버렸다고 한다

황지라는 지명의 유래도 뇌성병력과 함께 황부자집 옛 터가 연못으로 변했다는 전설에서 온 것이다.

 

황지의 전설이 된 여인의 상

黃池못의 傳說

황지3동 시가 중심부에 위치하며  둘레가 100m인 상지(上池) 50m인 중지(中池) 30m인 하지(下池)로 된 3개 못으로 나뉘며 상지 남측(南侧)에 깊이를 잴수없는 수굴(水窟)이 있어  수원(水源)이 된다

수량은 가뭄에도 장마에도 변함없는 1일 약 500톤이 용출되며 수온또한 상온 15도C를 유지하는 해발 700m 이지역 주민들의 상수도 취수장으로 전국 최적의 오염되지 않은 상수원이다

고지도를 비롯한 동국여지승람 택리지등 옛문헌에 의하면

 

 

낙동강의 발원지로서 옛 신라문화와 가야의  번영을 이룩하며 한민족과 숨결을 함께한 젖줄 1300리 낙동강을 오늘도 쉽없이 흘러보내는 것이다  또한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낙동강의 근원으로서 관아에서 제전을두어 가물때는 기우제를 올렸다" 고 기록된 이못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못엔 원래 황씨(黃氏)성을 가진 황씨가의 옛터로서 주인 황씨는 많은 재산에 풍족하게 살았으나 돈에 인색하기 짝이 없는 수전노  노랭이였다  어느봄날 황부자는 외양간에서 쇠똥을 쳐내고있었는데 옷차림이 남루한 노승이 시주를 청했다  황부자는 시주하기를 거절했으나  노승은 물러나지않고 거듭 염불을 외며 시주를 청했다  이에 그만 화가치민 황부자는  쇠똥을 한가래 퍼서 시주바랑에 넣어주며  " 이거나 받아가라 " 고 하였다   노승은 조금도 노하지않고 공손히 인사하고 돌아가는데  마침 아기를 업고 방아를 찧던 며느리가 이를보고 부끄러히여겨 시아버지 몰래 자기가 찧은 쌀한바가지를 퍼내어 노승에게 시주해올리며 시아버지의 죄를 용서빌었으나  노승은 며느리에게 말하기를 "이집은 이미 운이다하였으니  아기를업고 속히 소승의뒤를 따라 오시오 어떠한일이 일어나도 절대 뒤를 돌아보지마시오 "  고 일러주었다

이에 며느리는  곧 집을 나서 송이재를 넘어 구사리(지금의 도계읍)  산마루에 이르렀을때 뇌성벽력과 땅이 갈라지는듯한 소리에 깜짝놀라 노승의 당부를 잊고  '뒤를 돌아보는 순간 그 자리에서 돌이되어버렸고 황부자의 집은 땅밑으로 꺼져내려가 간곳없고  집터는 큰 연못으로 변하였다

지금도 삼척군 도계읍 구사리 산마루에는 황지쪽을 뒤돌아보며  아기를 업은채 서있는 돌미륵이있어 보는 이로하여금 가슴을 아프게하며 함게 따라간 강아지도 돌이되어 그 앞에 있다   또한 그때 집터는 지금의 상지이고 방아간 자리가 중지 변소터가 하지로 변했다하며 뇌성벽력과함께 변해버린 연못(집터)에서 유래된 지명이 황지인 것이다

 

 *   이 여인상은 도계읍구사리(미인폭포동쪽 2km지점) 능선에 위치한 황씨의 며느리 미륵상을 모방조각하여 태백시 승격 10주년을 기념하여 옛터 이곳에 세우다

 

서기 1991년 7월 1일 황지라이온스클럽 세움

 

 

 

황지 공원내에는 황지의 전설을 루미나리에로 표현해 둔 것이 있다

 

연못이 아주 깨끗하고 그속엔 물고기들이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는데,    그 중간에는 동전 항아리에 동전을  던지면 동전이 담기는 항아리마다 행운이  다르답니다 ㅎㅎ

 

 

맨처음 우리가 관광버스를 탔을 때  리무진 버스가 나왔다고 우리에게 행운이라고 가이드님이 했던 말이 무색하게 여주 휴계소도 못가서부터 차가  속력을 내지 못하고 나처럼 비실비실한다 ㅎㅎ

전설이야기를 신나게 하던 가이드를 운전기사님이 부른다.  " 차가 이상하다고 ~"

승객들 모두 어리둥절 걱정들을 한다.   앞으로 닥칠 고생길 길에서 버릴 시간들 생각도 하기 싫지만 현실이 닥친듯보였다.

일단 여주 휴계소에 내려서 기사님이랑 가이드님이 차 손을 보긴했는데 임시 방편만했다고 한다.   속력을 내는 무슨 벨트가 빠져나갔다나?  구할 수도 없다고 한다. 정초라 놀기 때문에 가이드와 운전기사는 줄곧 여기저기 전화를 해보지만 번번이 부정의 답만 듣고  그러는 두사람을 보는 우리 승객들은 모두 비실거리며 가는 차가 언제 어디서 멈추고 우리를 애태울까 걱정만 하고 ~~

할 수없이 운전기사가  조카라는 안산에 있다는 정비사를   오라고 부탁을 한다.

그리고 우린 여전히 비실거리는 차로 영월역까지 와서 내려준후 빈차로 태백가는 길목 어디선가 멈춰서는곳에까지 와서 조카가 고쳐주기로 했다고  

그러는 동안 우린 원래 계획대로 영월역에서  태백산눈꽃열차를 갈아타고 고한역에서 하차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힘없는 버스가 고한역 언덕을  오를 수 없다고 우릴 태백까지 한 정류장 더 가서 내리라고 한다 ㅎㅎ

그러나 예상했던 눈은 산에 한 톨도 못보고 나목들만 보며 태백에 내려 黃池를 본후,   자유시간인 저녁은  그곳에  유명하다는 한우를 먹으면 좋다는데 점심에 너무 잘 먹은 탓에 시간적으로 도저히 저녁을 못먹겠다. 혼자 무엇을 먹을까?    이곳저곳 두리번 거리고 있을때 다시 母子를 만났다 .  그들 역시 나처럼 저녁 생각은 없는데 숙박지가 산골이라고 야참이라도 사가지고 가라는 가이드 말도 있고해서  아주 가볍게 먹을 것을 찾는다며

칼국수를 먹자고 한다. 평상시는 칼국수 좋아했는데 그마져도 생각이 없는 나였지만 함께 하는게 좋을 듯하여 함께 국수집에 들어갔지만 시골 작은 국수집엔  자리도 없고  주인 말이 오늘 낮에 갑자기 손님이 많아서 음식 남은 것이 없다고 ~~~ ㅎㅎㅎ

우린 하는수 없이 수펴에 가서 컵라면 한 개씩 사고 주인이  막 삶아 내오는 계란을 5개를 모자 엄마가 사서 내게 두 개를 준다. 사양을 했지만 한사코 주는 바람에 한 개 받아서 밤에 여관에서 먹은 계란 정말 맛있었다.  라면은 반개 먹고 그렇게 하루가 저물었다. 

 

우리의 모텔이 있는 시골

 

혼자라고 언제나 싱글차지는 받으면서 방이  너무 작고  이불도 너무 빈약하다  요를 두개 깔고 이불까지 깔아도 편치 않고 이불도 얇아 잠을 설쳤다.  방음은 왜 그렇게 않되는지 옆방에 떠드는 소리 ~~

 

아침은 태백산 입구 정다운이라는 음식점에서 버섯찌개인듯 시원하게 먹고

 

이제부터 태백산을 향해 당골로 오르는 길아래에 보이는 작은집은 무엇일까? 궁금했지만  내려오다 둘러 보리라 마음 먹었는데  내려올때는 만덕사라는 절표지판에  눈이 팔려서 결국  못가고 말았다.

 

난,  천제단을 향해 가다가 힘들면 포기 하더라도 일단 천제단을 향해서 가기로 하고

입구에 눈이 쌓인 것을 보며 산에 가면 대단하겠구나!

했는데

 

 

천제단 가는 입구에서 조금 갔더니  단군성전이 있다

안내문(案內文)

이 聖殿은 우리겨레의 始祖 되시는 檀君할아버님을 모신 聖域으로서 그 이름을 檀君聖殿이라 부릅니다.성전 안에는 단군할아버님의 英靈과 影帧을 奉安하여 우리 민족의 상징으로 기리고 있습니다.   聖殿 境內外에서는 敬虔한 마음으로 고개 숙여 옷깃을 여미고 宗敎와 理念을 超越하는 國祖 嵩募의 참 뜻을 다시 한 번 되새겨 주시기 바랍니다

 

성전 개요

단기 4308년(서기1975년) 國祖檀君奉祀會가 구성되어 단기 4315년(서기1982년)  회장 김대년을 비롯한 이지역 뜻있는 분들의 성금으로 성전을 창건하였다.

단기 4326년(서기1993년) 태백산도립공원 개발계획에 의거 성전을 개축하여 國祖檀君奉祀會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매년 10월 3일 開天節에 檀君祭禮를 지내고 있다.

성전의 규모는 전체 대지면적 2.37m2에  성전이 62.4m2 기타 부대시설로 이루어 졌으며 檀君聖殿의 縣板 글씨는 신덕선이 쓴 것이다.

성전 쪽문으로 들어간다

 

국조단군상

쪽문을 들어갔더니 檀君聖殿 정전이 보인다

모자가 이번에도 나와 동행하게 됬는데 그 학생이 이쁘게도 향을 꼿는다 성냥이나 나이타가 없어서 향을 피우지는 못했지만  향을 꼿는 마음이 이쁘다 .

안에는 기도하는 분들이 있어서 등산화 벗기 힘들고 밖에서 살짝 참배하고  단군할아버지 사진 한 장 찍었다

그래~   단군할아버지는 弘益人間을 주창하셨지~ 

단군성전앞에서 본 앞산풍경

이제 태백산을 향해 가는데 산에 눈이 안보인다 ㅎㅎ   먼저 올랐던 동행분들 벌써 내려온다  조금더 올라가면 눈이 있어서 위험할 것 같아 내려오신다고 ~~   은근히 눈을 보고싶었지만 약간 겁도 나고 하여간 힘들때까지 올라보자고 했다

모자 아드님이 사진을 찍기에 나도 가서 한 번 찍어보았다

어름장밑으로 흐르는 맑은 물 마시고싶다 ~

조심조심하며 계단을 오르는데 미끄럽다.   모자 엄마가 내게 아이젠을 하라고 권한다.  내 가방속에 아이젠이  있긴했지만 꺼내서 하기도 귀찮고 사실 쓸줄을 잘 모르지만 혹시 넘어지기라도 하면 가뜩이나 다쳐서 힘든허리 걱정도 되어 아이젠을 꺼내 신을 줄 몰라 절절매고 있을때 지나던 어떤 분이 내게 신켜준다 어찌나 고마운지

한쪽은 내가 할 수 있다고 감사드리며 가시라고 했다.   프론트라고 쓰인 곳이 앞이라고 친절하게 알려준다 정말 고마왔다. 산에 가면 사람들이 참 인심이 좋은것 같다 .  그분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앞으로는 혼자 아이젠을 신을 수 있을것 같은데 , 또 너무 오래 시간이 지나면 잊을까? 걱정이 된다

 

미끄러운 길을 지나니까 나무계단이 많이 있다.

한참을 올랐다

 

 

虎食塚(호식총)

이 호식총은 언제 누가 죽어 생긴 무덤인지는 알 수 없지만 虎患(호환)을 당한 사람의 무덤인 것만은 분명하다

우리나라에서 호랑이는 멸종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비록 100년 전만 하여도 태백산악에는 호랑이가 많이 서식하였고 호랑이에 물려간 화전민의 수도 부지기수 있다고 한다.

사람이 호랑이에 잡아 먹히면 창귀가 되어 호랑이의 종이 되는데 창귀는 또 다른 사람을 유인하여 호랑이에게 잡아 먹히게 하고 나서야 호랑이의 종에서 벗어나게 되고 좋은 곳으로 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창귀를 꼼작 못하게하고 또 다른 호환을 예방하려는 주술적 토속신앙에서나온 '호식장' 이란 독특한 장례의식을 치루었던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 호랑이에게 물려가면 유구를 찾아 나서게 되고 호랑이는 사람을 잡아 먹으면 머리와 굵은뼈는 남겨두는 습성이 있다. 유구가 발견된 그 자리에서  화장을 하고 돌무덤을 쌓은 후 옹성 같은 시루를 덮어 놓고, 창검과 같은 소꼬챙이(가락)를 꽂아 두는 " 호식총" 이란 무덤을 만들었다.

여기서 화장을 함은 사악함의 완전소멸을, 돌무덤을 쌓음은 신성한 지역임을 시루를  엎어 놓는 것은 창귀를 가두는 감옥을  가락은 창귀가 빠져나오지 못하게 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호랑이에 의해 비명횡사한 무명 화전민의 무덤인 이 호식총은 당시 화전민들의 생활관과 사고관을 살펴 볼 수 있는 소중한 민속자료이다.

 

 

 

오르다보니 어떤 분이 물을 지고 천제단까지 가신다고 한다  그곳에는 물이 없다고  ~~~  난 혼자몸도 힘든데 물을 지고 오르시는 아저씨 정말 복 많이 받으시길 빌어드린다.

아저씨 말씀이 여기가 입구에서 부터 천제단까지의 딱 반이된다고 하신다.

 

한시간 넘게 올라왔는데 조금 힘이 든다 . 속으로 부지런히 생각을 한다. 참고  끝까지 올라야하나? 아님 여기서 포기?  포기하겠다는 말을 모자에게 어떻게 하지?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서 난 여기서 쉬겠다고 두분만 다녀오라고 했다  자기들은 30분정도 더 올랐다가 내려오겠다고 한다.

 

여긴 뜨끈한 어묵이나 컵라면같은것을 팔고 있다.

모자 두 사람은 산을 향해 더 가겠다고 걸어가고 있다.

난 여기서 30분을 기다리나? 그냥 석탄박물관으로 갈까 망설이고 있는데 모자가 다시 내려온다 ㅎㅎㅎ

반가운거 ~~  자기들도 어차피 끝까지 못갈바에 그냥 내려왔다고 ~~

내려오는 길에 보이는 산과 하늘  그리고 절벽~

 

나무에 빨간 열매가 이쁜데  무슨 열매일까?

太白山 石長丞

강원도 민속자료 제 4호

소재지 : 강원도 태백시 소도동

태백산 석장승의 유래나 기능은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으며, 제작 시기 또한 정확하지 않다. 문인석이나 미륵상처럼 보이는 석장승은 태백산의 천제단과 관련하여 태백산신의 수호신상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석상의 코 일부가 마모된 것으로 보아 이 석장승이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여겨지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석장승은 원래 현재 위치보다 북쪽 약 1.200m  지점인 미루둔지(장승둔지)에 있던 것을 1950년대 중반에 태백산 망경사로 옮겼는데, 1987년에 태백문화원에서 현재 위치로 옮겨 복원하였다.   이전 복원을 할때 자연석 받침돌 위에 세웠다. 

  " 天將"과 "地將"을 음각하여 이들이 각각 天下大將軍과 地下女將軍 임을 표시하였다.   화강암의 암석에 마모가 심하여 지하여장군의 경우 얼굴 모습을 알아보기 어려운 점이 있으나 전반적으로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천하대장군은 높이 1.7m,  둘레  1.3m이며 지하여장군은 높이 1.55m, 둘레 1.35m이고 , 받침돌의 높이는 각각 50cm와 80cm이다.  남도지역에서는 석장승이 다수 발견되지만, 강원도지역에서는 석장승이 발견되는 경우가 거의 없으므로 보존 가치가 매우 높다.

내려오다보니 입구에 석장승이 보이고 그 앞엔 천부경을 쓴 바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