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어진과 태조 진전太祖御眞과 太祖 眞殿
太祖御眞과 太祖 眞殿
太祖御眞
젊은 시절의 太祖御眞(유리 원판사진)
태조 어진(太祖 御眞) : 2011년/ 비단에 채색/ 151x 220cm/ 권오창 모사
어진 박물관에 있는 어진이 진본인줄 알았는데 모사랍니다
그럼 진본은 경기전에 있는 것인지?
태조어진은 1410년(태종 10) 전주 경기전에 봉안되었다. 현존하는 태조어진은 1872년(고종 9) 조중묵을 비롯한 10인의 화사가 새로 모사한 영정이다. 건국자의 권위와 위엄이 돋보이는 어진으로 용안의 정면을 그린 전신상이다. 머리에 익선관을 쓰고 청룡포를 입었으며, 허리에 각대를 차고 흑화를 신은 평상시 집무복을 입은 모습이다. 눈과 입은 작고 귀는 크며, 오른쪽 눈섭 위에 사마귀가 있다. 기록에 의하면 태조는 키가 크고, 몸이 반듯하며, 풍채가 좋다고 하였다.
일월오봉도 : (1872년 고종9) 비단에 채색/ 332.5x 248.2cm
경기전 진전 태조어진 뒤편의 일월오봉도이다. 궁궐 정전의 어좌 뒤편이나 왕의 초상인 어진 주변, 임금이 잠깐이라도 자리하시는 장소에 펼쳐 왕권을 상징하고 왕실의 번영을 기원했던 그림 병풍이다.
산봉우리. 해. 달 . 시내. 소나무와 같은 자연물을 파노라마처럼 펼치고 있다. 영원성을 지닌 소재들의 화려한 색채를 사용하여 평면성과 장식성을 부각시켜 그림으로써 왕의 권위를 직접적이고 명확한 이미지로 나타내었다.
보는 쪽에서 왼쪽은 용선, 오른쪽에 있는 것은 봉선
용선: 왕의 위엄을 높이기 위해 각종 의식에 사용된 부채이다. 양쪽면에 황룡을 각각 두 마리씩 그렸고, 자루는 붉은색을 칠하였다. 행렬 때 의장수들이 이것을 들고 어진의 거동을 예우하였으며, 평상시에는 정전 내에 도열해 두었다.
봉선: 용선과 마찬가지로 의식용 부채이다. 양쪽면에 오채로 봉황을 각각 두 마리씩 그렸고, 자루는 붉은색을 칠하였다.
함흥산으로 운봉(황산대첩)에서 싸울 때 태조가 탔던 말이라는데 참으로 특이하게 생겼습니다.
숙신옹주에게 가옥을 내린 문서 와 이성계 호적원본
태조의 능인 건원릉과 태조대왕 태실
순종어진과 고종어진 그리고 철종어진
철종어진哲宗御眞
1861년(철종12)/ 비단에 채색/114x164cm/이한철 . 조중목 외/ 복제
철종어진(보물 1492호)은 철종이 31세 되던 1861년(철종 12)에 그린 것이다.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이안 했다가 1954년 화재로 오른쪽이 1/3쯤 소실된 것을 복원하였다. 융복(군복) 차림이며, 초상화에서 보기 드문 손의 형태를 볼 수 있고, 용모에 순수한 인품이 반영되어 있다. 눈썹이 짙고, 쌍꺼풀이 진 동그란 눈에 눈동자가 안으로 모여 있다.
철종은 사도세자의 증손자로 강화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1849년 19세에 즉위하였다. 강화도령으로 불리며 안동김씨 세도정치 속에서 정치를 바로 잡지 못한 채 1863년(철종 14) 33세로 병사하였다.
순종어진純宗御眞
현대/비단에 채색/ 114x164cm/ 권오창 모사
순종 사진을 보고 그린 어진이다. 순종어진은 면류관을 쓰고 십이장복을 입은 대례복 차림이다. 의례를 행할 때 황제는 십이장복을 입었고, 왕은 구장복을 입었다. 십이장복이란 옷에 들어가는 문양의 수가 12가지라는 뜻이다.
조선의 27대왕 순종은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둘째 아들로 1907년 34세에 황제로 즉위하였다. 1910년 조선왕조가 몰락하면서 일제에 의해 '이왕李王'으로 강등되는 등 수모를 겪다가 1926년 53세에 승하하였다. 순종 장례날을 기해 6.10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고종어진高宗御眞
현대/비단에 채색/ 114x164cm/ 권오창 모사
고종 사진을 보고 그린 어진이다. 고종어진은 이전의 조선왕들과 달리 황색 곤룡포 차림이다. 고종이 황제복인 황룡포를 입은 것은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올랐기 때문이다
고종은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로 1863년 12살에 즉위하였다. 일본에게 외교권을 박탈당한 것의 부당함을 세계만방에 알리기 위해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했다가 1907년 폐위되었다. 1919년 68세로 승하하였으며, 고종 독살설은 3.1 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영조어진英祖御眞
현대/비단에 채색/ 114x164cm/ 김영철 모사
영조어진(보물 932호)은 51세 때 반신상으로 1900년(광무 4)에 조석진 . 채용신 등이 모사한 것이다. 어진박물관 어진은 반신상을 근래에 전신상으로 모사한 것이다. 안색이 붉으며, 눈이 치켜 올라가고 코가 오뚝한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깐깐한 성정이 엿보인다.
영조는 1724년 31세에 왕위에 올랐으며, 52년간 재위하다가 1776년 83세에 승하하였다. 조선의 왕 중 최장수 왕이자, 재위기간이 가장 긴 왕이다. 탕평책을 펼치는 등 조선왕조의 중흥을 이끌었으며, 조경묘를 건립하는 등 왕실의 위엄을 높였다.
세종어진世宗御眞
현대/비단에 채색/ 114x164cm/표준영정/김기창/ 김영철 모사
세종은 어진이 남아 있지 않아 실제 용안을 알 수 없다. 현재의 세종어진은 김기창화백이 추정하여 그린 상상도로 1973년 국가 표준영정으로 공인되었다.
세종은 태종의 셋째아들로 1418년 22세에 즉위하여 1450년 54세에 승하하였다. 한글을 창제한 성인 군주로 유교정치의 기틀을 확립하고, 문화와 과학기술을 크게 발전시켰으며, 4군 6진을 개척하여 국토를 확장하였다.
정조어진正祖御眞
현대/비단에 채색/ 114x164cm/표준영정/이길범 복제
정조는 어진이 남아 있지 않아 실제 용안을 알 수 없다. 현 정조어진은 근래에 추정하여 그린 상상도로 1989년 국가표준영정으로 공인되었다. 정조는 무예에 조예가 깊었으며 풍채 좋은 왕이라고 알려져 있어 이 어진과 차이가 있다. 정조는 영조에게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의 아들로 1776년 25세에 22대왕으로 즉위하였으며 1800년 49세에 승하하였다. 조선왕조의 중흥을 꾀한 군주로 규장각을 설치해 학문을 발전시켰고, 왕권 강화를 위해 수원 화성을 축조하여 천도를 시도하였다.
전라도 관찰사와 육방이속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조선말 전라감영에서 찍은 전라도 관찰사와 6방 아전들의 사진이다. 앞줄 가운데가 관찰사이고 그 밖의 갓을 쓰고 있는 6명이 6방 이속(吏屬)들이다. 조선사편수회가 1927~ 1935년에 우리나라, 일본, 만주지방에 산재해 있는 사료를 수집하여 촬영한 것이다.
선화당
태종대왕 어필
왕지
43x42 /조선시대 /광주안씨 문중 소장/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143호
태종 14년(1414) 청백리로 소문난 천곡 안성(安省)을 강원감사에 임명한 왕지이다. 조선초에는 임금이 내린 교지를 왕지라고 하였다.
御眞 奉安 가마와 의장물
어진을 이안하거나 환안할 때 신연을 비롯하여 여러 가마들이 동원되었다. 현재 경기전에는 1872년 어진을 전주로 모셔올 때 쓰였던 신연 2점, 향정자 2점, 채여 1점, 가교 1점 등이 보존되어 있다.
또 용선, 봉선, 홍개, 일산, 양산 등도 있다.
태조어진이 유일하듯이, 어진 이안 때 사용된 신연을 비롯한 의장물들도 유일한 것들이다. 따라서 태조어진과 경기전처럼 의장물들도 잘 보존되어야 할 하나밖에 없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또한 사진 왼쪽 향정 (향로가 없는것)은 1872년(고종 9) 62.5x82.5x109cm, 가마채 335cm
향정은 향로와 향합을 싣고 가는 조그마한 가마로, 향정자香亭子라고도 한다. 이 향정은 1872년 태조어진을 이안 할 때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4면이 개방 되어 있으며 지붕 아래에는 공포를 장식하였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구성한 후 녹색을 칠하였으며 추녀 하부에는 금칠을 한 풍경을 달았다.
또한 사진 오른쪽 향정 (향로가 들어 있는 가마)은
1771년(영조47) 62.5x82.5x109cm, 가마채 300cm
이 향정은[위판조성도감의궤] 의 반차도에 나와 있는 향정과 모양이 같아 1771년(영조47년)에 조경묘의 위패를 봉안할 때 사용했던 향정으로 추정된다. 4면이 개방되어 있고 앞뒤로 합각면이 보이는 팔작지붕을 취하고 있다. 지붕은 녹색을 칠하였다.
太祖御眞 奉安行列
닭종이 인형으로 재현한 태조어진 봉안행렬이다. 300여명이 태조어진 봉안행렬에 참여하였으며, 한양에서 전주로 태조어진을 모셔오는데 7박 8일이 소요되었다.
흙장궤黑長櫃
1872년(고종 9) 186x35.5x22cm
1872년에 태조어진을 새로 모사한 후 경기전에 봉안할 때 사용하던 어진 이안 궤이다
신연
신연은 둥근 지붕 형태의 가마이다. 꼭대기에는 호리병 모양의 정자를 장식하였으며 사면에 난간을 높게 설치하고 휘장을 둘렀다. 내부에는 흑장궤가 좌우로 기울어지지 않도록 옻칠한 나무를 끼워 세웠고 그 아래에는 흙장궤를 쉽게 움직일 수 있도록 윤여축輪輿軸을 설치하였다.
채여彩輿(1771년:영조 47)
채여는 왕실의식 때 귀중품을 옮겨 싣는 데 쓰던 교자와 비슷하게 만든 가마이다. 이 채여는 조경묘에 위패를 봉안할 때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향정자와 구조가 비슷한데 다만 가마채 아래에 운족(雲足)을 조각하였고 지붕은 집모양처럼 하되 아청색 면포를 덮고, 그 위에 주칠한 정자頂字를 설치하였다. 처마에는 기와를 상하로 장식하였고 사면에는 장자障子를 설치하여 안팎으로 종이를 붙여서 모란을 그려 넣었다.
가교駕轎 (1872년 고종 9년)
1872년 태조 어진을 봉안할 때, 또는 1771년 조경묘에 위패를 봉안 할 때 사용했던 가교로 추정된다. 가마 안에 의자를 설치하였으며 몸체 널판에 금색으로 연화문을 그렸다. 전후좌우에 구슬을 단 발을 설치하고, 가마채의 끝 부분 및 몸체와 접한 부분에 각각 용머리를 장식하였다. 가교는 임금이 타는 가마이다. 경기전에 임금이 온 적이 없는데 가교가 있다는 것은 임금을 상징하는 의식구로 쓰인 것이 아닌가 한다.
조경묘肇慶廟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16호
조경묘는 전주 이씨의 시조인 이한(李翰과 그 부인의 위패(位牌, 죽은 사람의 이름을 적은 나무패)를 모신 사당이다. 이한은 신라 때 [사공(司公, 도성을 쌓고 고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의 한 벼슬)]이라는 높은 벼슬을 지냈고, 그 부인은 경주 김씨이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이한의 21대 후손이다. 조경묘는 조선 영조 47년(1771)에 세워졌으며 영조가 세손(정조)으로 하여금 쓰도록 한, 이한과 그 부인의 위패를 봉안했다. 철종 5년(1854)에 경기전과 함께 보수해 오늘날의 모습을 갖췄다. 조경묘는 경기전과 함께, 전주가 조선왕조의 발상지임을 상징하는 곳이다.
예종대왕 태실 및 비睿宗大王 胎室 및 碑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 26호
이 태실은 조선 예종대왕의 태를 항아리에 담아 넣어 둔 석실이다. 왕가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그 태를 소중히 석실에 보관하였는데, 이를 태실이라 한다. 원래 선조 11년(1578) 완주군 구이면 원덕리 태실마을 뒷산에 세웠다가 영조 10년(1734) 다시 고쳐 세웠다. 1928년 일본의 조선총독부가 태항아리를 가져 가면서 파괴되어 구이초등학교 부근에 있던 것을 1970년 이곳으로 옮겼다. 이 태실은 팔각형 돌 난간 안에 기단석을 놓고 그 위에 둥근 돌을 얹은 다음 지붕돌로 덮었다. 비석은 태실과 함께 옮긴 것으로, 예종대왕의 태실임을 알리는 글과 비석의 건립 연대를 앞면과 뒷면에 각각 새겼는데, 건립연대는 선조 11년(1578)이다. 잘 보존된 거북 모양의 받침돌과 뿔 없는 용의 모습을 새긴 머릿돌이 돋보이는 비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