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낙안읍성 돌아보기

백합사랑 2016. 2. 12. 09:53

낙안읍성 민속마을

순천시 낙안면에 자리잡은 옛읍성인 낙안읍성은 살아있는 민속마을이다.  낙안읍성 마을엔 지금도 91세대가 성 안팎으로 생활하고 있으며,  옛날 민초들이 살아왔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제주의 민속마을이나 용인의 민속촌과는 그 근본이 다르다.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묻어있는 성곽과 옹기종기 붙어앉은 초가지붕 ..  옛 사람들이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친근감이 절로 든다




樂豊樓

락풍루에서 보이는 풍경





팽나무

객사  동쪽에 위치한 팽나무는 주민들로부터  가장 사랑을 받았던 나무 중의 하나이다.

여기 이 팽나무는 주민들에게 신성시 되는 나무중의 하나이며, 주민들의 희로애락을 함께 한 나무이다.

일제시대에는  이곳 낙안읍성에도 많은 피해가 있었다고 한다. 각종 공출이며,  강제징집으로 이곳 낙안의 많은 주민들도 크나큰 고통을 피해가지 못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 중 일부는  강제징집을 피하기 위해 여기 팽나무 위에 올라가 숨어 있었다고 하는데, 이상하게도  이 곳 팽나무 위에 숨으면 들키지 않았고 일본군이 찾지도 못하고 되돌아 가는 일이 허다하게 발생했다고 한다.   이후에도 일본군이 주민들을 괴롭힐 때면 두려움에 떨던 주민들이 이 곳 팽나무 주변에 모여서 살 방도를 모색하곤 했는데, 이 광경을 본 일본군은 많은 주민들이 모여서 싸우려하는 것으로 착각하여 지레 겁을 먹고 되돌아 갔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이 팽나무의 신묘함 덕분에 여기 주민들에게 오래도록 사랑을 받아 신성시하고 있으며, 주민과 함께해 온 나무로 동네에서 따로 관리하고 소원을 빌기도 하여 오늘날에도 명절에는 이 나무 아래에서 고사를 지내고 있다.


이 곳은 낙안 객사

객사(客舍) = 낙안지관(樂安之館)은 왕명으로 오는 사신들과 고을을 찾아오는 기타 관리나 외빈들이 머물다 갔던 곳으로, 고을의 가장 으뜸이 되는 건물로  동헌보다 격이 높아 낙안읍성 내(內) 가장 중앙 상단에 위치하고 있다. 낙안객사는  1450년(세종 32년)에 군수 이인(李인)이 건립한 후 1631년(인조 9년)과 1857년(철종 8년)에 중수하였다. 현재는 객사 본전만 남아 있어  전체적인 모습은 알 수 없으나 1900년대 초까지는 남아 있었다고 하며, 1909년 이후 낙안초등학교 건물로 사용되다가  1982년 이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낙안객사는 동쪽 방은 문관(文官= 동반)이 서쪽 방은 무관(武官= 서반)의 숙소로 사용되었으며,  객사 중앙 마루에서는 궐패(闕牌)와 전패(殿牌)를  모시거나 고을의 대소사시 향궐망배례(向闕望拜禮)를 행하던 곳이다.

건물형태는 정면 7칸, 측면 3칸으로 완벽한 좌우 대칭으로 되어 있으며,  본사의 경우 맞배지붕이고, 양날개는 팔작지붕이다.


객사 안에는 공연과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임경업장군의 비각

임경업장군)林慶業將軍) 비각

이곳은 1628년(인조 6)에 군수 임경업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비각과 그 안에 서 있는 비(碑)로 구성되어 있다.

임경업(1594~1646)은 조선시대 중기의 명장으로, 인조 4년(1626) 이곳 전라도 낙안지역의 군수로 부임해왔다.  인조 6년(1628) 3월 내직으로 옮겨갈 때까지 낙안읍성을 쌓는 등 어진 다스림을 베풀었으며,  병자호란과 정묘호란 때에도 큰 공을 세웠다.  이 지역에는 임경업 군수를 신봉하여 매년 정월 보름이면 낙안면 주민들에 의해 큰 제례가 이어지고 있다.  비각은 앞면 1칸 . 옆면 1칸으로 되어 있으며,  지붕은 팔작지붕을 얹었다.  앞면과 옆면의 기둥사이에는  붉은 막대들을 세워 놓았고 뒷면은 길다른 널판을 끼워 벽을 이루게 하였다. 비각 앞면에는 '전군수임장군비각  영건표적비' 가, 비각 앞면 윗부분에 '차임장군비각판상운(1893, 신병우)' 과 ' 비각문관중건기(1952 , 김상언)' 이라 새긴 두 개의  현판이 걸려 있어,  영조 24년(1784)에 비각을 세운후 1893년과 1952년에 각각 보수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비는 거북받침을 위로 비신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비신 앞면 중앙에는 '군수임공경업선정비' 라는 비의 명칭을 세로로 새겨 놓았고,  왼쪽 아래부분에 건립연대를  적어놓았다.  이 기록을 통해 임경업이 군수직을 마치고 낙안읍성을  떠나던 인조 6년(1628)에 이 비를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임경업장군의 비석


임경업장군의 비석


동헌

동헌 뜰에 핀 매화


동원엔 혼이 나고 있는 인형 ㅎㅎ



부억에 여인 앞에 글을 읽어보면

' 어린애들이 집에 기다려 얼렁 김장하고 가야겠는데  관람객들이 자꾸 출입문을 열고 들어오시니 늦어집니다'


전통가옥 체험장


체험장이라는 곳을 많은 관람객들은 여기저기 알뜰히 들여다봅니다


이곳은 죽엄을 체험하는 곳



이집은 국창 송만갑 선생님의 제자들이 기거 하였던 가옥이랍니다


집 안에는 물래도 있고  그곳에 출근하시는 아주머님도 계셨습니다


이곳은 대장금을 촬영한 곳

이쁜 이영애님 곁에 앉아도 보고 ㅎㅎ 이쁜 모습이 좀 닮아지려나?  




우물 (큰 샘)

이 우물은 옛날 낙안군수(고을 수령)님이 드셨다 하여 큰샘이라 불리어 오고 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낙안읍성이 행주형(行舟形)으로 성내에 깊은  우물을 파는 것을 금하였으며,  낮은 곳에서 나오는 우물을  길러 쓰도록  하였는데 이는 성내에 깊은 우물을 파게 되면 배 밑이 뚤리어 배가 가라앉는다는  유래가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 깊은 우물을  파는 것은  낙안고을이 쇠한다고 믿었으며, 낮은 곳에서 나오는 우물을 길러 쓰도록 한 것은 배 안에 고인 물을 퍼내어야만  배가 안전하여 낙안고을이 흥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렇듯 낮은 곳에서 나는 우물인데도 가뭄 때나 우기철이나 별  차이 없이 마르거나 넘치지 않고 본래의 그 수위를 유지하고 있다.  마을 한 중앙에 위치하여 읍성 주민들에게 식수를 공급하고 때로는 소통의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예로부터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이 우물물을 마시면 성품이 착해져  미인이 된다고 주민들은 믿고 있다.



도예촌


고기 잡는 총각 뒤에 금잉어가 왔다갔다 ~~


목화밭


낙안읍성의 모습

코너에 있는 집




 http://blog.daum.net/hyeanj/11735091  이곳에는 없고 지난번에 보았던 낙안읍성 곳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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