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조선 고택 복원 완료 체험마을로
ㆍ멋스런 운치…영화 촬영지 각광
ㆍ천년 고찰 용문사엔 보물도 즐비
|
예천 금당실마을 고택과 돌담 |
‘금당(金塘)’은 경북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 일대를 일컫는다. 그 모양새가 꼭 ‘물에 떠있는 연꽃’을 닮았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체험마을이다. 조선시대 정감록에는 십승지지 중 한 곳으로 꼽혀
‘조선 도읍 후보지’로 거론됐을 만큼 명당이다. ‘금당 맛질 반 서울’이란 말도 이런 연유에서 생겨났다.
맛질은 금당실 마을인 상금곡리와 인접한 대제리, 제곡리, 하학리를 아우르는 옛 지명.
최근 고택 복원공사를 마무리해 아이들과 함께 체험여행에 나서볼 만하다.
금당실 마을은 2006년 당시 문화관광부(현 문화체육관광부)에 의해 ‘생활문화체험마을’로 선정돼
고택 복원공사를 벌였다. 이를 통해 현재 ‘민속마을’다운 모습을 온전히 갖추고 있다. 그중 마을에서
공동으로 운영하는 ‘금당 주막’이 대표적. 예천의 명물인 삼강주막에 버금가는 명물이 또 하나 탄생한 셈이다.
고택과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가 바로 돌담. 반송재 고택(문화재자료 제262호)과
사괴당 고택(문화재자료 제337호) 등 10여채의 고택과 함께 역사를 같이한 돌담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 당시 일부 돌담이 헐리는 수모를 당했지만 지금껏 옛 모습을 갖춘 돌담이 적지 않다.
볏짚과 황토를 이용해 차곡차곡 쌓아올린 돌담은 마을을 이리저리 굽이치며 거미줄처럼 이어진다. 마을입구에는
‘골목에서 길 잃어버리지 마시게’라는 표지판을 세웠다. 그도 그럴 것이 7㎞에 걸쳐 미로처럼 이어진 골목을 거닐다 보면
자칫 헤매기 일쑤다.
마을에서 즐길 수 있는 체험은 양반 및 농촌체험 등 다양하다. 마을체험센터 증축공사 기간 동안 잠시 중단하고 있지만
체험프로그램은 6월30일부터 다시 시작된다.
|
금당실마을 송림 |
‘금당실 송림’(천연기념물 제469호)도 마을의 명물 중 하나. 주민들이 ‘금당실쑤’라고 불리는 숲은 내륙지방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소나무 방풍림이다. 당초 2㎞에 달했지만 현재 800m 정도가 남아 있는 숲은 아픈 역사를 품고 있다.
1892년 마을 뒷산인 오미봉에서 몰래 금을 채취하던 러시아 광부 두 사람을 마을 주민이 살해한 것.
당시 이 사건은 조선과 러시아간 외교문제로 비화돼 마을의 존립 자체를 위협받기도 했다.
이에 주민들은 고심 끝에 마을의 공동재산이었던 소나무를 베어 러시아 측에서 요구하는 배상금으로 충당했다.
이 때문에 오랜 세월 천재와 인재로부터 마을을 지켜준 송림에 대한 주민들의 애정은 남다르다.
숲은 산책로가 조성돼 삼림욕을 즐기기에 좋고 봄이면 송림과 어우러진 벚꽃 길도 환상적이다.
이 길은 숲이 시작되는 마을입구에서 928번 지방도를 따라 용문사까지 8㎞에 달한다.
이즈음 신록을 벗 삼아 걷기에 딱 좋다.
외지인의 발길이 뜸한 까닭에 마을은 1960~1970년대 분위기가 고스란히 남아 한결 운치가 있다.
드라마나 영화의 단골 촬영지가 된 것도 이 때문. 영화 ‘영어완전정복’ ‘나의 결혼 원정기’ 등과 드라마 ‘황진이’도
이곳에서 촬영됐다.
|
금당리마을 체험 센터 |
‘황진이’의 주 촬영지였던 병암정에서 928번 지방도로를 따라 동로 방향으로 조금 가면 초간정을 만난다.
예천군 용문면 죽림리에 위치한 초간정(문화재자료 제143호)은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대동운부군옥’을 지은 초간 권문해 선생(1534~1591)이 세운 정자다.
주변 기암괴석과 어우러진 모습이 예스럽고 멋있다. 보물 제878호인 대동운부군옥 책판(부) 고본은 현재 예천권씨 종택에 모셔져 있다.
여기서 원류삼거리를 거쳐 가면 예천의 대표적 사찰인 용문사가 나온다.
신라시대 천년고찰인 소백산 용문사는 그 유구한 역사만큼이나 대장전(보물 제145호)과 윤장대(보물 제684호), 목각좌상 및 목각탱(보물 제989호), 교지(보물 제729호) 등 수많은 보물을 간직하고 있다.
|
예천 곤충생태체험관 |
예천곤충생태체험관과 예천천문과학문화센터도 놓칠 수 없는 볼거리.
특히 예천천문과학문화센터에서는 천문관 측은 물론 가변중력체험,
우주자세제어체험, 달중력체험 등 다양한 우주환경을 체험할 수 있어 아이들이 좋아할 만하다.
이중 스페이스타워 전망대에서 체험하는 우주유형체험이 단연 인기다.
■ 옛 방식 그대로 전통순대 꼭 맛보세요!
- 귀띔 -
▲찾아가는 길:서울→경부고속도로→신갈 분기점→영동고속도로→만종 분기점→중앙고속도로→예천 나들목→928번 지방도 예천방면→예천읍→용문면→금당실마을
▲주변 볼거리:예천진호국제양궁장, 석송령, 회룡포, 예천온천, 학가산 우래 자연휴양림 등
▲맛집:대표적인 향토음식은 청포묵과 복불고기, 회룡포 마을이 있는 용궁면 순대와 오징어불고기 등. 이중 갓 잡은 돼지 막창을 두른 순대가 유명하다. 현재 용궁면에서 순대를 파는 집은 다섯 집. 옛 방식 그대로의 전통순대를 맛볼 수 있는 ‘흥부네 순대’(054-653-6220)는 양옥자씨가 시어머니 황해옥씨의 손맛을 이어받아 음식을 내놓는다. 이외에 송포정통복어집(복탕, 054-655-5959), 백수식당(육회, 054-652-7777), 황도령휴게가든(등심, 054-654-2788), 새골목식당(한정식, 054-652-1345), 예천송어회집(송어회, 054-655-8923) 등이 있다.
▲숙박:파라다이스호텔(054-652-1108), 대연호텔(054-652-0988), 그랜드모텔(054-652-9000), 예천장(054-655-0505) 등
▲문의:예천문화관광과 (054)650-6395, 금당실 정보화 마을 (054)654-2222
<윤대헌기자 caos999@kyunghyang.co 자료제공=한국관광공사
예천 용문사, 윤장대 돌아 업장이 소멸하는 절집
늦은 봄, 물길을 따라 예천을 찾은 일요일 아침은 길도 마음도 고요했다. 지난 해 가을에 보았던 영주 무섬마을에서 한 꺼풀 마음을 씻고 또한 바람에 몸을 씻어 산사로 든 오후는 밝은 봄날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었다. 용문사 오르는 초입 일주문과 다리를 건너는 동안 활엽수의 잎들이 무성한 초록의 기운을 뿜어 푸른 물드는 느낌이다.
|
◇ 용문사 회전문,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사천왕이 모셔져 있다 ⓒ 들찔레 | 절 앞 넓은 마당을 두고 계단을 한참 밟고 나서야 여느 절의 천왕문에 해당하는 회전문(廻轉門)이 보이고 그 뒤로 웅자(雄姿)를 뽐내는 용문사는 작지 않은 절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사천왕상에게 가벼운 목례를 하고 불계에 들어서면 정면의 해운루(海雲樓)와 우측에 보이는 자운루(慈雲樓)가 비상하는 자세로 뒤편 산과 하늘을 받치고 있다. 바다구름과 자비로운 구름이 들고나는 땅 이렷다.
깊은 절집에 찾아든 범부가 불계에 들어서자 초록에 물드는 것처럼 억겁의 세월들 두고 업장을 내려놓는 마음으로 살다보면 부처님의 자비로움이 정신세계 가득, 사바세계 가득히 물들 수 있을 거라는 착각에 사로잡힌다.
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이며 신라 870년( 경문왕 10)에 두운(杜雲)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당시 두운이 이 산의 동구에 이르렀을 때 바위 위에서 용이 영접하여 절 이름을 용문사라 하였다고 한다. 또한 절을 짓기 시작하였을 때 나무둥치 사이에서 무게 16냥의 은병(銀甁)을 캐어 공사비에 충당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이 용이 지금도 살아 해운루, 자운루의 구름 위를 넘나들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
◇ 해운루에서 바라본 농익은 봄 풍경 ⓒ 들찔레 | 해운루에 올라 절 밖의 세상을 본다. 어두운 마루에서 통창으로 난 바깥세상은 온통 신록의 빛으로 가득한데 그 모양이 순하고 곱다. 눈이 부신다.
절 집 부처님 앞에서는 모든 것들이 순해지는가보다. 옛날 후삼국 정벌 중에 이 절에 머물렀던 태조 왕건도 이런 봄빛을 보았을까?
훗날 천하를 평정하면 이곳에 큰절을 일으키겠다는 맹세를 하였던 그가 936년(태조 19)에칙명으로 이 절을 중건하였고, 매년 150석의 쌀을 하사하였다는 기록을 보면서 숫한 세월이 지난 지금 일요일 오후, 해운루에서 상스러운 기운을 느낀다.
|
◇ 용문사의 한 풍경 ⓒ 들찔레 | 너른 절 마당에 깔린 고운 흙 길을 따라 위를 보면 절 뒤로 아름드리 소나무가 병풍처럼 호위를 하고 하늘 아래 산이 유연한 등성이로 엎드려 있다.
해운루 앞 정면에는 1984년 화재로 모두 불탔다가 복원된 보광명전(普光明殿)이 새 옷을 입고 자리를 잡고 있고 마당가운데는 어울리지 않게 요즘 조성한 오층석탑이 우두커니 서 있다.
있을 자리에서 소실된 옛 전각이나 탑을 새로 조성한 모습을 보는 것은 때로 당혹스럽다. 더구나 원래의 환경과 부조화를 이룬다는 느낌을 줄 때는 안타깝기 그지없다. 다만 탑 옆에서 대장전(大藏殿)으로부터 절 집의 전체적인 위용을 좌, 우로 조망하면서 위로를 받는다.
|
◇ 용문사 대장전 ⓒ 들찔레 | 이내 마음은 조급하여 대장전(보물 145호) 오르는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화마를 피해 유일하게 불에 타지 않은 맞배지붕에 다포양식의 대장전은 용문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고려시대 명종 3년(1173)에 건축된 것으로 알려진 대장전은 조선 현종 11년(1670년)에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건물의 이름처럼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기 위해 세웠다는 대장전은 한때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 건물로 추정되어 한때 국보 제243호로 지정되기도 하였다가 1963년도에 보물 제 145호로 변경 지정되었다.
|
◇ 대장전 외벽에 만들어진 귀면 모양의 조각이 물고기를 물고 있는 단청 ⓒ 들찔레 | 이 절에 화재가 나서 모두가 소실되고 이 대장전만 남게 된 이유가 외벽에 단청으로 치장된 귀면(鬼面)과 물고기 조각, 그리고 용 조각이 불 막이 기능을 제대로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 대장전 외부 공포 위 창방 뺄목에는 귀면 혹은 도깨비 모양의 조각이 물고기를 물고 있는 단청이 된 조각을 볼 수 있는데 다른 곳에서는 흔히 찾아볼 수 없는 특징적인 것이다.
이런 조각들에는 잡귀를 물리치려는 의도도 숨어 있을 것이다. 요모조모 단청과 조각을 살피는 재미는 어느 절에서건 만만치 않다.
대장전 자체의 의미도 크지만 이 당우 안에 조성된 여러 가지의 불교문화재들의 가치 또한 대단하다. 대장전 정면으로 보이는 삼존목불좌상 및 목각탱(木刻幀:보물 989호)가 눈에 띈다.
삼존목불좌상은 가운데에 아미타불을 모시고 좌, 우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모시고 있다. 크지 않은 불상은 위압감을 주지 않아 보기 편안하고 나무로 되어서인지 그 표면이 주는 질감이 부드럽다는 인상이다. 더불어 세 불상의 표정 또한 유려하고 부드럽다.
|
◇ 목조 삼존불과 목각후불탱 ⓒ 들찔레 | 조선 숙종 때 대추나무로 조성된 목각후불탱화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가로, 세로 각각 2미터가 조금 넘는 크기이다.
금빛 도금 입힌 색이 금방 조성한 것처럼 밝아 어두운 대장전 내부를 밝혀준다. 목각탱화 가운데는 아미타불이 있고 본존불 이외의 상(像)들은 상·중·하 3행으로 배치시키고 있다.
아랫줄에는 사천왕상이 본존의 대좌 좌우로 2구씩 일렬로 서 있다. 가운데 줄과 윗줄에는 각기 좌우 2보살씩 8대 보살이 배치되고, 윗줄의 보살 좌우에는 다시 무릎을 꿇고 손을 모은 모습의 가섭과 아난 2대 제자를 배치하여 구도의 미를 살리고 있다. 불상과 보살상 사이의 공간에는 구름, 광선 등을 배치했다.
이런 목각탱화는 상주 남장사나 덕숭산 수덕사, 여주 신륵사, 실상사 약수암 등에서도 볼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 탱화의 한자어 표기를 幀畵로 쓰게 되는데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이 한자를 `정화`라고 읽는 촌극이 벌어진다. 이것은 영정(影幀)을 이를 때 쓰는 정(幀)자가 불가에서는 `탱`자로 쓰이는 까닭 때문이다.
|
◇ 대장전 내 우측의 윤장대 ⓒ 들찔레 |
|
◇ 대장전 내 좌측의 윤장대 ⓒ 들찔레 | 앞서 이른 것처럼 대장전은 불교 경전을 보관한다는 뜻을 지닌 전각이다. 이름처럼 이곳에는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불교 문화유산인 윤장대((輪藏臺 보물 제684호)가 있다.
대장전을 창건할 당시 함께 제작된 것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장대의 중수는 1625년도에 하였다고 내부 천장에 쓰여 있다. 내부에 불경을 보관해 둔 이것의 역할은 부처님의 말씀을 온 세상에 퍼지게 하는 것과 사람들이 이것을 돌리면 불경을 읽는 효과를 얻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른바 부처님과 속세의 쌍방향 소통로인 것이다. 윤장대는 마치 티베트나 소승불교를 믿는 나라들에서 금속으로 만든 종형의 마니차를 돌리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면 된다.
따라서 이는 조선시대 전경신앙(轉經信仰)이 남긴 유일무이한 유물로 취급된다. 이와 같은 모양으로 최근에 만든 윤장대가 강화도 전등사 들머리에 만들어져 있다.
|
◇ 윤장대 꽃살문 I ⓒ 들찔레 |
|
◇ 윤장대 꽃살문 II ⓒ 들찔레 | 대장전 내부 좌, 우에 각각 하나씩의 놓인 윤장대는 높이가 4.2미터, 둘레3.15미터 정도이며 잘 돌 수 있게 하기 위해 중앙 축을 중심으로 아랫부분은 팽이모양으로 전체적으로는 팔각정자 혹은 석등 모양을 하고 있다.
지붕에 해당하는 상부는 다포식 공포로 그 솜씨가 섬세하고 정교하며 지붕 끝을 건물 천장에 연결하였다. 우측의 것은 팔면의 몸체에 빗살무늬 의 문 구조를 달아 단아하고 단순한 아름다움을, 좌측의 것은 꽃무늬의 문을 달아 화려한 불교 장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특히 좌측 윤장대에 조성된 꽃살문은 우리나라 고건축에 새겨진 꽃살문 중 가장 아름답게 꾸며진 것 중 하나로 꼽는다. 그 중 연꽃이 조각된 한 면의 것은 영주 성혈사 나한전의 우측 문에 새겨진 꽃창살과 너무도 흡사하며 혹시 한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할 정도이다.
|
◇ 윤장대 꽃살문 III ⓒ 들찔레 |
|
◇ 윤장대 꽃살문 IV ⓒ 들찔레 | 이즈음에서 문명을 하나의 유기체로 인식하고 모든 유기체와 마찬가지로 문명도 발생·성장·노쇠·사멸의 과정을 밟는다고 주장한 독일의 철학자 슈펭글러(Spengler)의 말이 기억난다. 혹은 역사의 순환을 이야기한 토인비(Toynbee)를 기억하기도 한다.
그러다 이미 이천 수백 년 전 역사뿐만 아니라 인간 자체의 윤회를 통해 살아있을 때에 생에 대해 늘 반성하고 업장을 내려놓으라던 부처의 가르침, 그 위대함을 읽는다. 윤장대를 돌며 업은 내려놓지도 못한 채 갖가지 생각에 사로잡히고 만다.
윤장대를 돌며 대장전 우물천장에 그려진 백로를 본다. 이렇게 윤장대를 돌리다 옛 사람들도 저 새들을 보았을까? 불경을 외는 구도의 정신을 모아 업이 소멸한 세상으로 새가 되어 날아가는 꿈을 꾸었을까?
다시 대장전 밖으로 나와 바로 옆에 있는 진영각(眞影閣) 앞에 서서 봄바람에 몸을 맡겨 본다. 새의 날개처럼 지나치게 상승 감을 불러일으키는 진영각 팔작지붕 처마 밑에 서서 그래도 좀 더 가벼운 움직임으로 비상하고 싶어 하는 나를 본다.
살면서 업장만 켜켜이 쌓인 몸이 가벼울 리 없다. 마당 한편에 있는 흐르는 물 한 사발 들이켜고 천천히 걸어 자운루 쪽으로 발을 옮긴다.
|
◇ 물 한모금 들이키고 속을 헹구다 ⓒ 들찔레 | 자운루((慈雲樓 경북문화재자료 169호)는 2층 누각집으로 고려 의종 20년(1166년)에 자엄대사가 세웠으며, 광해군 13년(1621년)에 고쳐지었으며 979년에 마지막 보수를 하여 오늘이 이르고 있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승병들이 회의를 하던 장소로 당시 이곳에서 짚신을 만들어 조달한 신방의 기능도 같이 수행한 호국의 장소이기도 하다. 지금은 불교 행사가 있을 때 법공양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자운루는 옆에 세워진 해운루와 더불어 절 밖을 잘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 봄볕이 기우는 오후의 절집에서 운치를 더해주는 곳이다.
누각의 문을 떼어 놓아 바람이 직접 통하는 곳에 서면 푸른 수풀에 가려 상서로운 구름은 보이지 않으나 상스러움 더할 나위 없이 가득하는 느낌이다.
그런 기분은 푸른 수풀이 맑은 햇살을 투영하는 봄이기에 더 충만한 것이라 여겨진다.
|
◇ 자운루에서 푸른 기운을 받다 ⓒ 들찔레 | 터벅걸음으로 절 아래를 내려오며 자운루의 굵은 기둥들이 불일정한 모습을 가지고도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상부를 받치고 있는 모습을 본다.
사람들도 그러하여서 자신의 색깔을 잃지 않되 상생의 기운으로 평화로운 삶을 가꾸어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읽는다.
나 역시 윤장대를 돌리며 간구하는 마음을 단 며칠이라도 유지하여 평정심에 젖은 하루아침을 맞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작지 않은 바람을 업장 대신 절에 내려놓는다. 하오의 햇살과 바람이 부드러운 늦은 봄이다.
|